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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레오 그 자식 재수 없지만 다 가졌잖아요. 완전 인싸 중의 인싸고, 못 하는 거 하나 없고. 오죽하면 애들이 걔랑은 시답잖은 내기도 안 했을까. 공부 잘해, 성격 좋아, 잘생겼지, 거기다 집안은 말해 뭐 해요. 누가 장난으로 레오 학생회장 지원서 대신 제출했는데 떡하니 학생회장 된 건 또 뭐래.
“……그, 그래.”
― 거기다 폴로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나중에 레오 폴로 게임할 때 찍은 사진 보여 줄게요. 완전 하이틴 스타 그 자체잖아요. 하마터면 나도 반할 뻔. 다행이 내 취향이 레오가 아니라서 망정이지…….
폴로 게임이라는 말에 혜담은 “그거 말 타고, 공 치는 거?”라고 되물어야 했다. 그리고 들은 대답은 사냥도 잘한다는 말이었다.
핫초코를 마시며 루나와 수다를 떨면서도 혜담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빗줄기는 수시로 거세졌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고, 아직 폭풍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야자수 잎들이 이리저리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
자신의 온달은 여전히 모래사장을 헤매고 있었다.
드문드문 놓여 있는 조명에 의지해서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폭풍우 치는 날 모래사장에 떨어진 반지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레오를 향해 불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가 그래도 제 곁을 지켜 준 유일한 인간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 불퉁한 마음이 둥글어졌다. 그러다가도 기억을 잃은 채 나타났다가 먹튀한 걸 생각하면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 오빠! 듣고 있어요?
잠시 딴생각을 하던 혜담은 카랑카랑한 루나의 목소리에 “어, 응.”이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
― 봐, 또 레오 걱정했네. 했어. 사람 마음이 그렇게 물러서 어떻게 살아왔어요? 막 굴리라고요. 걘 굴러도 돼. 오빠 마음이 뭐, 허락한다고 해도. 바로 어! 그래! 이러지 말고. 아닌 척하고 막 힘들다고 하고. 보기 싫다고 막.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게 뭔데?”
― 하…… 이 오빠를 어떡하면 좋아. 레오가 무릎 꿇고 머리 박고 막 그래도 모른 척하시라고요.
“어떻게?”
― 정 불쌍하면 별채 가서 자라고 해요.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말고 뭐든 다 시켜 먹어요. 밥도 하라고 하고.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시키고.
난감한 루나의 제안에 혜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별채 가서 자라고 한다고 쟤가 말 들을까? 다른 건 몰라도 오늘같이 스산한 날에 전기장판도 없는데 쟤 끌어안고 자면 따뜻하긴 할 것 같은데…….
쟤 아기 있는 거 아직 모른다는데 배 나온 건 살찐 거라고 우기면 믿으려나?
또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 혜담은 아랫배를 슬슬 문질러 보았다. 남자 오메가들은 배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시나 자신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상황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
전에 제주도에서 보니 브런치는 제법 만드니까 그건 시켜도 될 것 같고, 무인도에서 뭘 사 오라고 하긴 어렵겠고.
― 걔 아직 반지 찾아요?
“그런 것 같아. 이번엔 휴식처 반대쪽으로 가서 잘 보이진 않고.”
― 멍청한…… 새ㄲ…… 아. 오빠 미안해요. 아가야 미안. 진짜 걔. 진짜 그 머리로 어떻게 공부 잘했지? 그냥 그 뭐니? 그거 자석 같은 거 광물 찾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걸로 모래사장 쫙 훑으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두운 데서 뭔 짓이래요. 못 찾을 것 같으면 포기하고 와서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든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비 그만 맞고 들어오라고 해야겠네.”
혜담은 한숨을 길게 쉬고는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대화라고는 하지만 거의 루나가 일방적으로 떠들어 분위기를 띄우며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는 상황이었다.
― 오빠가 잘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그놈은 굴러야 돼요! 알겠죠?
끝까지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말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루나의 응원과 함께 통화를 끝낸 혜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릴 적 만났던 건 확실히 기억하는 것 같은데, 시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그 일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것저것 자잘하게 안다고 해서 루나가 둘 사이의 모든 일을 아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레오와 혜담 둘이서 풀어야 할 것들이 태산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니? 그녀는 굴리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둘 사이의 기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 하나 섣불리 말할 수 없기에 착잡해진 혜담은 벗어 두었던 숄을 집어 들다 다시 내려놓았다.
보슬비를 조금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숄은 생각보다 많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잠시 밖에 있던 제가 그럴진대, 굵은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았을 레오를 생각하자 역시나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루나의 말대로 냉큼 레오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레오가 다섯 살. 제가 여덟 살. 우연히 스쳐 지나간 아이들의 약속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면 제 첫 키스 상대는 레오가 아니라 여섯 살 때 같은 유치원을 다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였다.
적당히 다독거려서 돌려보내야지. 휴가계가 아니라 사직서 확실하게 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톡톡한 후드점퍼를 걸친 혜담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정을 지나는 늦은 시각의 바닷가의 찬 기운에 얼른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야!”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문 앞에 선 채, 혜담은 큰 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야!”
멀어서 잘 들리지 않는지 검은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그러자 휴식처 뒤쪽에서 검은 것이 쑥 올라왔다.
“이리 와!”
돌아오는 대답도 큰 움직임도 없는 것으로 보아 바보 온달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냉큼 뛰어오기 쪽팔리겠지. 사죄하고 나름대로 프러포즈라는 것을 하다가 버려지다시피 했는데. 반지인 줄 알았다면 자신도 그리 손을 내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모든 일은 레오가 잘못한 것 같은데. 아! 몰래 도망친 건 빼고. 어쨌거나 제멋대로 나타나서 이상한 말을 하다가 생긴 불상사였다.
“열 셀 동안 안 오면 절대 못 들어올 줄 알아.”
유치부 아이에게나 먹힐 만한 조건을 꺼낸 혜담은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열…… 아홉…… 여덟…….”
어쭈. 이거 봐 라 안 움직여?
“일곱…….”
레오가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를 가늠했을 때 지금쯤은 움직여야 했다.
“여…….”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남겨 놓고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루나의 짧은 통화가 없었다면 이렇게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함께 레오의 죄를 낱낱이 파헤치고 무한한 응원을 해 준 루나의 활기찬 에너지를 받은 덕분인지, 심각한 상황이 심각하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프러포즈할 거면서 그동안은 왜 안 찾았대? 진짜 반지 만들어질 때까지 휴가 준 거야 뭐야?
우산을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낀 혜담은 수를 세지 않고 있었다. 그저 레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걸어오는 것을 감상할 뿐. 아…… 재수 없게 이놈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어도 멋있냐.
제대로 젖은 것도 아니고 젖지 않은 것도 아닌 물만 어설프게 먹은 것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에 혜담은 혀를 찼다. 그거 몇 걸음 된다고 걸어오는 와중에 혼자 패션쇼를 해. 정장 재킷은 어디 던져 놨어? 다 젖은 흰 셔츠 안으로 그의 속살이 비쳐 보였다.
처음엔 반듯하게 매고 있었겠지만 대충 손으로 끌어 내린 듯 풀려 있는 넥타이라든가 두 개 풀린 셔츠 단추, 대충 둘둘 걷어 놓은 소매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던 혜담의 손이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닿았다.
‘아빠 닮지 말라고 했던 거 취소할게. 나 말고 아빠 닮아, 그러면 죽을죄를 지었을 때 한 번쯤은 외모로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 내 마음이 그러니까.’
처음엔 제법 속도가 나더니 점차 느려지던 레오가 몇 걸음 앞에 멈춰 서자 혜담은 홱하니 몸을 돌렸다.
“춥고, 비 와. 이야기는 내일 해. 졸려서 자야겠거든.”
루나가 튕기고 혼내고 무시하랬다. 그리고 혜담은 그녀의 말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미안해요.”
“뭐가.”
“전부……. 어릴 때 만난 걸 잊은 것도, 두 번째 만난 것도 잊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떠난 것도, 마지막으로 지금 혼자 둔 것까지 모두.”
“아니까 다행이네.”
당장 뒤돌아 레오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혜담은 먼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오른쪽 첫 번째 방 쓰고 있어. 씻고 들어와.”
최대한 감정을 싣지 말고, 차갑게 용건만 간단히. 루나가 한 말들을 되새기며 말을 끝낸 혜담은 레오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2층 방으로 들어갔다.
“와. 심장 터질 뻔…….”
2층 방문을 닫자마자 펄쩍펄쩍 뛰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린 혜담은 문에 기댄 채, 잠시 서 있었다. 별채로 가라고 해도 됐다. 제가 이 방을 쓰고 있으니 다른 방으로 가라고 해도 됐다.
하지만 그를 이 방으로 오라고 한 건…….
제게 남은 미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