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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못 찾는다고 생각하나?”
레오는 좁은 원룸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오늘 오후 갑자기 최준석이 혜담의 짐을 뺀다는 연락에 급히 온 것이었다. 방 한쪽에 있던 침대도 그 옆에 있던 협탁도 벽걸이 TV와 작은 테이블까지 모두 사라진 공간에선 혜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배어 있던 은은한 페로몬 향도 모두 사라진 공간은 허전하고 을씨년스러울 뿐이었다.
쉬고 싶다며. 일주일만 휴가 쓴다며.
일주일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레오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휴가는 공식적으로 45일이니까 그 안에만 돌아온다면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45일이 넘는다면 직접 그를 찾아가면 됐다.
정말 도망이라도 갈 생각인지 제가 해외 출장 간 틈을 타 로버트에게 휴가계를 내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출국해 버렸다. 너무 또렷한 흔적들을 남겨 놓고 이동하기에 처음엔 따라와서 찾아달라는 건가? 하는 의심도 했다.
하지만 유유자적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몰래 이사까지 하려는 건 아니지.
요즘 최준석이 지방에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것까지 떠올린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혜담의 집도 아닌 곳에 길게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느릿하게 밖으로 나가려던 레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쓰레기들을 대충 담아 놓은 봉투를 바라보았다.
봉투 옆에 떨어져 있는 작은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는 먼지가 잔뜩 묻은 상자를 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빈 상자가 아니라 무언가가 들어 있는지 덜그덕거리는 소리에 상자를 연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한 채, 상자 안을 보는 레오의 턱선이 도드라졌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 물질. 특유의 묵직함과 서늘한 감촉이 살갗에 닿자 온기를 앗아 갔다. 뒷면을 확인한 레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
기억하지 못했다면 오해를 사기 충분한 물건이었다. 혜담을 만난 이후 불쑥불쑥 떠오르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혜담의 모습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그날 밤. 저도 모르게 떠올린 ‘온달’이라는 단어와 잠결에 저를 ‘온달’이라고 부르던 혜담의 모습까지 다양한 장면들이 두서없이 생각났다.
한창 대학 생활을 즐기던 중 갑자기 일어난 일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같은 학과 학생인 걸 알고 있었지만 몇 번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는 오메가가 제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가 잠들었던 방에서 그 오메가가 나오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제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시간은 흘렀고, 아기가 태어난 후 시도한 유전자 검사는 다섯 번이나 진행되었다. 오메가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유전자 검사를 방해했다. 결국 레오는 유전자 검사 실험실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검사를 직접 할 연구원이 자신과 오메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채취하도록 했다.
정확한 검사 결과까지 부인하며 끝까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우기던 오메가는 수십억을 받고서야 웃으면서 떠났다.
그 모든 일이 끝난 후 제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사람들의 과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선택한 것이 홀로 한국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왜 제가 그의 집에 쓰러져 있었는지, 그리고 왜 기억을 잃었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것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환상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나타났다. 착각도 환영도 오해도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혜담은.
시계를 움켜쥔 레오의 손등에 핏줄이 잔뜩 섰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저도 모르게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기억을 잃은 사람을 도와주고, 먹여 주고, 따뜻한 품까지 내어 준 혜담이었다. 그런 그를 홀로 두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났을 때보다 더 무례하게 그를 등졌다. 일정하게 뛰던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무리 크게 숨을 들이마셔도 숨이 채워지지 않고, 깊게 내쉬려고 해도 가슴에 복잡하게 쌓이는 것들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은 감정과 밀려오는 과호흡으로 괴로워하며 제 가슴을 세게 치던 레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거친 숨과 함께 자신을 향한 욕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사무적인 모습으로 감추려 했지만, 저를 향한 혜담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도, 그의 감정이 자신을 볼 때면 폭풍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타인들과 다른 그의 반응 때문에 그를 가까이 두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를 제 곁에 둬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그를 놓치고 그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왔다.
혜담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고, 제게 화를 내거나 불편한 감정을 가득 드러내더라도 그가 제 옆에 있으면 편안함을 느꼈다.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허기와 욕구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골든 알파인 제 짝인 히든 오메가가 아닐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느릿하게 시계를 쥐고 있던 주먹을 푼 레오는 착용하고 있던 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고 혜담이 간직하고 있던 시계를 찼다.
편히 쉬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더는 그에게 시간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빈 상자를 닫으려던 레오는 손끝으로 안쪽 벽을 더듬었다. 종이 같은 것이 벽 쪽으로 붙어서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상자 안에 숨겨져 있던 종이를 꺼낸 레오는 한참이나 손안에 들어온 것을 살펴보았다.
낮은 언덕의 작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어린 혜담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는 네잎 클로버가 붙어 있었다.
* * *
레오는 코맘이 찾아 준 네잎 클로버를 들고는 낮은 언덕을 열심히 걸어 올라갔다. 언덕 위에서 나는 빵 냄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냄새가 좋다면 맛도 분명히 좋을 것이었다.
아침마다 부엌에서 빵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보다 가슴이 더 빨리 뛰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찾아 모험을 떠났던 레오가 찾은 건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레오보다 조금 큰 남자아이였다.
“형아.”
빵 냄새는 계속 나는데, 있는 것이라고는 형밖에 없으니 형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빵 주인이 형이라고 하면 조금 나눠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형아.”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움직이지 않는 형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살짝 건들며 레오는 한 번 더 형을 불렀다.
“……응.”
고개를 든 형은 눈도 빨갛고, 코도 빨갛고, 입도 빨갰다. 급하게 소매로 얼굴을 닦는 모습에 레오는 형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형아, 울어?”
“으응. 아니, 안 울어.”
대답해 주는 형이 너무 이뻐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리고 이 맛있는 냄새도 형아에게서 나는 것 같았다. 알파나 오메가는 향이 난다는데, 형도 그런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형이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울면 눈도, 코도, 입술도 다 빨개지고, 얼굴에 눈물도 묻고 그러니까.
“안아 줄까?”
혹시나 또 울었냐고 물어보면 형이 부끄러울까 봐 레오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제가 울면 코맘이나 대디, 유모들은 항상 안아 줬다. 그러면 슬픈 것도 아픈 것도 괜찮아졌다.
레오가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자 형도 팔을 벌려 주기에 레오는 냉큼 그에게 안겼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 냄새에 폭 빠지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형아.”
“응.”
“슬퍼?”
숨이 막힐 만큼 꽉 안아 주는 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코맘이 슬퍼했던 것이 떠올랐다. 코맘의 엄마, 엄마…… 꼬꼬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는데……. 너무 예쁜 형을 만나서 웃음이 나는 자신과 다르게 형이 너무 슬퍼 보였다.
코맘처럼 형을 제 품 안에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작은 레오는 자신보다 큰 형을 안아 줄 수가 없었다. 레오는 코맘이 해 주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형의 등을 토닥토닥해 줬다.
“괜찮아.”
“형아 꼬꼬 할머니도 하늘나라 갔어?”
“형아는 꼬꼬 할머니 말고 엄마, 아빠.”
“하늘나라 가면 못 만나!”
“응, 이제 못 만난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형이 다시 울었고, 레오도 덩달아 같이 울었다.
“넌 왜 울어.”
“흐엉…… 형아 슬퍼…….”
처음엔 형아가 울었지만 나중엔 제가 더 많이 울어서 형이 저를 달래 줬다. 코맘보다 더 천사 같아서 코맘이 찾아 준 네잎 클로버를 형아에게 주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응. 형아, 나랑 결혼해.”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다급해진 레오는 하고 싶은 말을 얼른 꺼냈다.
“뭐?”
“이거 줬으니까 커서 나랑 결혼해.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형아 안 울게 해 줄게.”
“저기 결혼은…….”
“반지는 나중에 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