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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 씨가 이동 중입니다. 그런데 경로가 좀 이상합니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던 레오는 제 옆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상황을 전달하는 로버트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어디로?”
“공항 쪽입니다.”
“시골로 간다고 했잖아.”
요 며칠 입 안의 혀처럼 굴던 혜담이었다. 무섭게 왜 이러냐고 말할 때마다 더는 네게 상처 주기 싫다는 말만 했다. 어떤 모습이든지 네가 다 감당하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설날에 맞춰 휴가계를 올리기에 그러라 했다.
그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의 시골집도 그가 모르게 조금 손을 봐 뒀다. 그런데 어디로 가? 공항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어디에서 뭘 하는지 확인해서 변동사항 있으면 바로바로 전해 주세요.”
온종일 붙어 있고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에서도 혜담은 좀처럼 속을 보여 주지 않았다. 톡톡 쏘는 언행과 달리 따뜻했고, 배려 깊은 성격이었다. 그래. 그 배려 깊은 성격이 문제였다. 선을 넘을 것처럼 하면서도 좀처럼 선을 넘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것을 알고 다 해 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 마음대로 날아왔다가 제 마음대로 날아가 버리는 새처럼 그는 언제든 제 곁을 훌쩍 떠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날아가 버린다고? 예전에 대디가 했던 새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매번 뒷걸음질 치고 발을 빼는 코맘 때문에 대디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큰 새장을 만들려고 했단다. 새가 새장에 갇힌 걸 모른다면, 그 새는 불행할까? 행복할까? 새가 모를 만큼 큰 새장 안에서 새가 안락한 삶을 살 것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코맘에게 했더니 그는 코웃음을 쳤다.
[새장은 개뿔. 새는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가둘 생각을 하지 말고, 머물고 싶은 장소로 만들라고. 하여튼 루이스 가 알파들 승질머리하고는. 너.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대디가 틀린 거니까. 알겠어?]
미안해요, 코맘.
저도 어쩔 수 없는 루이스 가의 알파인가 보죠.
혜담이 언제든지 기대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었다. 새가 떠나지 않고 살고 싶은 나무 말이다. 그래서 늘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라고. 갖고 싶은 것도 다 말하고. 뭐든 다 말하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떠난 건 새잖아.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혜담에게 미행을 붙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알아야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새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큰 새장을 지으려면 약간의 인내심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새가 원하는 만큼 크고 튼튼한 새장을 지을 수 있으니까.
* * *
깔끔하게 깐 오렌지를 통째로 덥석 깨물어 먹으며 혜담은 문을 열고 햇살 속으로 걸어갔다. 일렁이는 푸른 바다와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데크를 따라 걸은 혜담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데이베드였다.
“아이고. 힘들다. 한 게 뭐 있다고 이렇게 힘들어.”
오렌지의 과즙이 흐르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은 채, 혜담은 데이베드에 편하게 기대 누웠다. 그림 같은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을 보며 오렌지를 베어 문 혜담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레오와 떨어져 지낸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거의 2주 동안은 심한 입덧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약이라더니 정말 그 말이 딱이었다. 여전히 잠에서 깨어 있을 때나 심하게 움직였을 때, 공복 시간이 길어지거나 조금만 과식해도 어김없이 입덧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충 어떻게 하면 완화되는지 알기에 그런 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우면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됐다. 남성 오메가의 임신인 만큼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대로 혜담은 바다에 떠다니는 물미역 같은 삶을 고수하고 있었다.
갑자기 좀비가 출몰한다고 해도 최소 1년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고, 자가발전기까지 있기에 생활에 불편은 조금도 없었다. 거기다 센스있는 루나는 일주일에 한 번 드론으로 신선한 음식들을 보내 주었다.
일어나라고 깨우는 사람도 없고, 늦게 잔다고 잔소리하는 이도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계속 쉬고 있으니 이건 아닌가.
루나가 알려 준 우회 프로그램을 통해 인터넷을 쓰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고, 출국 전 새로 개통한 번호로 준석에게 연락해 살던 집을 정리해 달라는 말도 전했다. 어디서 뭐 하냐고 욕을 한 바가지 먹긴 했지만 착한 준석은 제가 부탁한 것들을 착실히 이행해 줄 것이다.
들고 나온 오렌지를 다 먹은 혜담은 걸치고 있던 헐렁한 셔츠에 손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고는 했지만 계속 이렇게 한량처럼 지낼 수는 없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이 섬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준석이 집을 정리하고 제가 말한 지방에 작은 원룸을 구해 주겠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리자, 대충 머리를 쓸어넘긴 혜담은 옆에 뒀던 담요를 덮었다. 일어났고, 씻었고,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밥도 먹고 후식으로 오렌지도 먹었다. 그러니 이제 할 일은 낮잠이었다.
“고임금은 아니지만, 무노동의 삶이 좋긴 좋네.”
아랫배에 손을 올려 두고 약하게 토닥거리던 혜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혀를 찼다.
그래도 찾을 줄 알았는데.
한 달째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니 레오는 정말 저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보면 잘도 찾던데, 역시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 같았다.
하긴 출국 전에 전화번호도 바꿨지, 고객의 정보만큼은 목숨보다 철저하게 관리하는 루나를 통해 이곳으로 왔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준석을 찾아간다고 해도 준석이 아는 건 제가 여행 중이라는 것뿐이었다. 제가 바랐던 상황이고 그렇게 되고 있긴 한데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혹시 처음부터 찾을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레오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모든 건 제 추측이었다.
[혹시 말이야. 네게 아이가 있다면…….]
[그럴 일 없어.]
[왜? 나중에 너도 결혼하고 그러면 당연히 2세가 생기는 거지. 그리고 네 상황에서 대가 끊기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래서 조심하고 있잖아요.]
뒤에서 저를 꼭 끌어안고, 머리에 입 맞추면서 속삭이는 레오의 말에 혜담은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을 툭 때렸다. 그는 그럴 일 없다고 장담하고 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가정하잖아. 내가 네 아이 가졌어! 이러면 어떡할래?]
[우리 못난이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상상이 안 되는데? 그런 거랑 상관없이 난 정말 우리 못난이만 있으면 돼. 그런데 우리 못난이는 나 하나로 만족 못 해? 결혼도 당연히 우리 못난이랑 할 건데…… 음, 못난이는 아기 갖고 싶어?]
조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레오의 말에 가슴에 쿡 틀어박혔다. 그의 대답에 자신은 있지만 역시나 아이는 없었다.
아이 이야기만큼은 이리저리 피하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통에 더는 말을 꺼낼 방법이 없었다. 대놓고 말했지만, 레오는 코웃음을 치며 넘겨 버렸고 오히려 지금부터 아기 만들자며 덤벼들었다.
“아, 어렵다.”
인생에 답이 어디 있겠냐마는 혹시나 나중에 레오가 이 모든 것을 안 후 어떻게 반응할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너, 그놈 닮지 말고 날 닮아.”
남들은 태명이나 뭐다 이런 것을 만들어 부른다지만 혜담의 아기에겐 그런 호칭이 없었다. 절대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동자는 닮지 마. 그래야 우리 둘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누가 봐도 루이스가 2세처럼 생기면, 혹시나 살다가 우연히라도 스치게 됐을 때 그들이 알면 안 되잖아.
처음부터 아이를 포기한다는 건 혜담의 계획에 없었다. 제 상황과 제 나이를 봤을 때, 말 그대로 이건 기적이었다. 오메가에서 베타로 다시 오메가가 됐다지만 형질을 변경 신청할 생각은 없었다.
레오는 그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자신은 아기랑 도란도란 자신의 삶을 살고. 각자의 삶을 살면 되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하자 혜담은 손을 들어 햇살을 가렸다. 결혼하자, 같이 살자는 레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숨 쉬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수없이 꺼낸 말이라 농담처럼 여겨졌다. 지금이야 제게 콩깍지가 씌여서 그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절로 벗겨질 것이었다.
독수리가 우연히 열려 있던 작은 새장에 들어가 거기 있던 사료를 먹었다고 해서 길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말을 타고 사냥용 총을 들고 야영을 즐기는 레오를 품기엔 제가 너무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