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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손에 이끌려 저녁을 먹고, 야경이 근사한 카페에서 따뜻한 차도 마셨다.
그의 실없는 농담에 어이가 없어 웃었고, 언제부터 저를 좋아해 줄 거냐는 말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너와 이러고 있는 게 널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 없는 표정으로 딱 필요한 말만 하는 그가 제 앞에서만은 달랐다. 귀찮다고, 사람들이 본다며 다가오는 손을 매정하게 쳐 내도 능글맞게 웃으며 그럼 다른 것을 해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했다.
지금처럼.
“왜! 그건 또 왜 안 돼?”
“각자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너희 집에서 잠을 자. 너 있으면 더 피곤하고 잠도 못 자는데.”
“그럼 나랑 결혼해요.”
내 입에 생크림 잔뜩 올라간 와플 조각을 밀어 넣으면서 그게 할 말이냐?
“……시로.”
와플을 먹느라 대답을 놓쳤다가는 또 어떤 기발한 말을 할지 모르기에 혜담은 웅얼거렸다.
“내가 못생겼어요?”
“앙니.”
일부러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와플을 거의 다 먹자마자 음료를 내미는 레오의 행동에 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툭 때리고 자신의 음료 잔을 받아 왔다.
“잘생겼지. 능력 있지. 평생 먹고 놀아도 호강시켜 줄 수 있고, 또 노력 봉사도 잘하고, 어리고…….”
“그래서 안 돼.”
“왜! 우리 못난이가 몰라서 그렇지. 나 나름 인기 많아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지.”
커다란 손이 슥 다가와 입가를 훔치고 가기에 혜담은 냅킨을 들어 입가를 한 번 더 닦았다.
“그러는 넌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건데? 난 어리지도 않고, 일하지 않으면 당장 월세 낼 걱정부터 해야 하는 데다가 잘 생기지도 않았지. 너보다 체력이 떨어져서 널 만족시켜 주지도 못하잖아. 쯧…… 말하고 보니 기분 영 그러네. 거기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인기 없어.”
그가 한 말을 정확히 반대로 했을 뿐인데,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 오히려 씁쓸해진 혜담은 입을 다물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너여서.”
지금까지처럼 텐션이 높고 밝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음악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를 들었지만 혜담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페어라면 서로 첫눈에 알아본대요. 꼭 목을 물어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정신적 각인도 이루어지고, 그런데 그걸 본인들은 잘 모른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처럼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각인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 이런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있는데…….”
또 눈이야? 올해는 눈이 많네.
늦은 오후까지만 해도 화창하더니.
“난 첫눈에 알아봤는데, 대단하지 않아요?”
“넌 알파가 아니고, 난 오메가가 아니잖아. 넌 알파인데 알파 아니라고. 그럼 난 오메가인데 오메가 아닌 거야?”
“그건 모르죠.”
“자, 레오 루이스 씨. 밥도 먹고 차도 마셨고, 곧 잘 시간인데 그만 집으로 가죠. 눈 오니까 너희 집으로 꼭 가야 한다는 말 같잖은 말은 하지 마시고요.”
“좀 전에도 물었는데 그렇게 나한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하고 나면 기분이 어때요?”
“네가 상처를 안 받는데 내가 뭘 걱정해.”
“그건 그렇죠.”
“음…… 레오. 나 네가 너무 좋아. 네가 없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 나랑 24시간 붙어 있어 줘.”
“……와. 무섭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혜담은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이를 꽉 깨물고는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잔뜩 밀려오는 것이 무서워서 황급히 눈을 가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어둠 속에서 빛이 생겨났다. 하나였던 반짝임이 늘어나고 점차 시야가 밝아진 것을 느꼈을 땐, 이미 레오의 품 안이었다.
“괜찮아요?”
“아, 어. 현기증이 좀 나서.”
혜담은 민망함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다른 손으로는 레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디 안 좋은 거예요? 병원…….”
바로 병원 이야기를 꺼내기에 혜담은 다급하게 그의 입을 손으로 턱 하니 막았다.
“너 때문이잖아. 난 너처럼 적게 자고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휴가를 주면 뭘 해. 너랑 붙어 지내느라 진정 편하게 쉰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조만간 휴가 써도 놀라지 마.”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카페에서 반쯤 끌어안고 있는 상황이 민망해 혜담은 레오를 슬쩍 밀어냈다.
“나도 같이…….”
“씁. 너 일 많거든. 방금 말했지. 너랑 있으면 더 못 쉰다고.”
혜담은 레오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고는 여전히 떨어질 기미가 없는 그의 손을 먼저 잡았다. 지금껏 제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있을까? 먼저 그를 안아 본 적은? 능동적인 레오와 다르게 자신은 항상 수동적이었다.
먼저 다가오는 것도 레오였고, 말을 꺼내는 것도 레오였으며, 담을 쌓을 때마다 무해하게 웃으며 그 담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였다. 퉁명스럽고, 틱틱거리고, 뭐든 하지 말라고 하고 타박하고. 레오가 직접적으로 묻기 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진짜 최악이네. 이혜담.
그보다 세 살 많으면 뭐 하나. 정신연령이 애보다 못한데.
레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진 혜담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먼저 잡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혀 넣었다.
“휴가 허락해 준다고 하면, 오늘 너희 집에서 잘게.”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못난이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준다고.”
장난스럽게 손을 힘을 줘 잡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은 괜히 아프다고 말하며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 *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레오와 있을 때는 잠도 잘 잤고, 밥도 잘 먹었으며, 불편한 것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많은 불편한 증상이 혜담을 지배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지 못했고, 이사 준비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레오가 2박 3일 해외 출장을 간 지금이 제가 떠나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었다.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떠날 준비를 시작했건만 더부룩한 속 때문에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진행된 건 거의 없었다.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큰 캐리어에 옷가지 몇 개 던져 넣은 것이 전부였다. 새로 계약한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계약금은 날릴 수밖에 없고, 계약 완료까지 넉 달 남은 이 집을 처리하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도 없고, 급한 짐만 챙겨서 떠날 마음에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선 혜담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동안 모아 놓은 돈도 조금 있고, 넉 달 뒤엔 이 집에 걸어 놓은 반전세금도 받을 수 있으니 절약하고 살면 2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참. 재미없게 살았네.”
꼭 필요한 것만 챙겨 넣으려던 혜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챙기고 싶은데 챙겨 갈 것이 없다. 물건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레오가 선물해 준 옷을 제외한 원래 제가 갖고 있던 옷만 들어 있던 캐리어 안으로 노트북과 충전기들을 툭툭 던져 넣었다.
공식적으로 로버트에게 제출한 휴가 기간은 일주일. 레오가 닦달해 그에게 알려 준 목적지는 시골 할머니 댁이었다. 설날 연휴까지 있으니 정말 그럴듯한 핑계가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단 한 번도 챙겨 본 적 없는 명절과 제사라니……. 제사음식은 할 줄도 모르는데.
한참을 서서 방을 둘러보던 혜담은 침대 옆 협탁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제일 아래 서랍을 열자 작은 상자가 나왔고, 한참을 상자 겉면만 손으로 쓰다듬던 그의 손이 움직이자 상자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덩그러니 들어 있는 시계를 보는 혜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온달이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읍내 나가는 길에 시계를 착용하더니, 이내 불편하다고 빼놓고 간 시계는 멈춰 있었다.
“후. 인연 참 웃기네.”
시계 뒷면을 본 혜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시계에 새겨져 있는 이니셜에 대한 비밀이 풀렸다. 늘 그 이니셜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름일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약자였기에 좀처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바보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평강공주는…… 이야기만큼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는 결코 같을 수가 없었다. 제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면 레오는 이 집으로 올 것이 분명했다. 이 시계를 그런 그를 위한 선물로 남겨 놓을 것이다.
내가 왜 처음에 널 그리 밀어냈는지, 차갑게 대했는지. 너도 좀 알아.
그래도 결국은 널 선택했어. 그리고 난 우리의 만남으로 일어난 운명을 끝까지 책임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아팠으면 좋겠다.
뚜껑을 닫은 혜담은 다시금 상자를 서랍에 넣고, 활짝 열려 있는 캐리어를 잠근 후 느릿하게 집을 나섰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을 나서는 혜담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