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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 씨, 어디 갔었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갔다 왔어요. 일에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말을 못 했네요. 혹시 그사이 무슨 일 있었나요?”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루나의 말에 혜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뇨, 정리 끝나서 혜담 씨랑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티타임?”
“네, 로버트 씨가 예약됐다고 연락 주셨거든요.”
“그럼 기꺼이 함께해야죠. 루나 씨 아니면 제가 언제 호텔에서 티타임을 해 보겠어요.”
루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파일 뭉치를 들려 하자 혜담은 성큼 나서 파일을 대신 들었다.
“제가 들면…….”
“절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요?”
혜담은 앞서 걸으며 옆에 붙어 안절부절못하는 루나를 보며 “왜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속은 괜찮아요?”
“낮에 너무 과식해서 더부룩한 것만 빼면 괜찮죠. 그래도 티타임할 여유는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혹시 불편하거나 그러면 안 가도 돼요.”
“간다고 했는데, 안 가면 팀장님이 뭐라고 하실걸요. 대신 티타임 끝나고 회사 들어갈 때 빵 좀 사 가려고요. 오늘 야근 있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루나와의 티타임은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것에 그쳤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루이보스티를 조금 마셨고, 달콤한 것들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느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는 효과 따위는 없었다.
일 이야기 조금, 잡담 조금.
대신 그녀의 사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햇볕을 쬐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미소 짓는 것이 혜담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레오에게 주기 위해 산 빵과 루나에게 받은 파일이 든 종이백을 든 채, 회사 앞에 선 혜담은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에 회사의 꼭대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유동적인 출퇴근 시간 때문에 회사 앞은 늘 직원들도 붐볐다.
회사로 복귀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빵이야 내일 가져다줘도 되고, 깜박했다고 말하며 제가 다 먹어 치워도 됐다. 레오의 사무실에 불이 켜졌는지, 꺼졌는지 따위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전화할 생각도 없고.
평소처럼 회사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케팅팀 사무실로 들어선 혜담은 아직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락거리는 팀장실 앞에 선 혜담의 손이 선뜻 문으로 향하지 못했다.
손바닥이 끈적거리는 것 같아 허벅지에 쓱 문지르는 순간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혜담은 자신을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야 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레오에게 꽉 끌어안긴 혜담은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어깨에 얼굴이 파묻히는 걸 피했다.
“우리 못난이. 티타임은 즐거웠어?”
“네, 그리고 파일은…….”
손에 들고 있던 빵과 파일을 한 손에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는 레오의 한 팔은 여전히 혜담의 허리에 걸쳐져 있었다.
슬쩍 그의 손을 잡아떼어 내려 하자 레오의 입술이 볼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팀장님!”
“정각 6시까지는 그렇게 하시겠다?”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하시죠.”
“6시에 키스해 준다고 하면.”
장난기 가득한 레오의 목소리와 조명에 빛나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혜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10분이나 남았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싫어.”
커다란 덩치로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갔다.
“저녁 뭐 먹을까?”
“선약 있으십니다.”
“우리 못난이가 이렇게 발칙한 짓을 하는데 약속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낮에는 좀 부실하게 먹었으니까, 고기 먹으러 갈까? 무슨 고기 먹지? 닭 어때요?”
여기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속이 불편해서 저녁 따위는 건너뛰겠다고 생각하던 혜담은 레오가 메뉴를 꺼내자마자 느껴지는 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익숙해지는지 구역감은 있어도 오후 내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리진 않아도 됐다. 하지만 레오를 만나는 순간부터 늘어지던 몸에 생기가 돌고, 허기가 지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들에 제게 일어나는 일은 말 그대로 미스터리의 복합체였다.
“로버트 씨께 연락해 보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일정을 바꿀 때마다 죽어나는 건 로버트라고. 나야 계속해서 그의 곁에서 보조하는 수준이지만 그는 아니란 말이다.
“아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어때요?”
“넵?”
머지않은 미래에 그만둘 생각은 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퇴사 권유에 혜담의 입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둘 다 회사 그만두고, 부모님처럼 여행이나 다니고 그러고 살래요?”
“저는 일을 해야…….”
난 너 같은 부르주아의 끝판왕이 아니라고. 가만히 있어도 자산이 알아서 증식하는 너 같은 금수저가 아니라 밥벌이를 안 하면 굶어 죽는 흙수저야. 천애 고아인 것까지 참작하면 아예 수저조차 안 되는 등급. 거기다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가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한다고요?”
“팀장님이 가진 건 팀장님 것이지. 제 것이 아니니까요.”
솔직하게 대답하자마자 계속해서 저를 끌어안고 있던 레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방금까지 따스하게 감싸 주던 품도 멀어졌다. 저를 보고 해사하게 웃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계속해서 능글거리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늘어놓던 그의 입이 굳게 닫혔다.
팀장실 가운데 덩그러니 혜담을 세워 놓은 레오는 책상 앞으로 가 의자에 앉았고, 펼쳐져 있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레오의 태도 변화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혜담은 살짝 머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문으로 향했다.
“나가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요.”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에 발길을 옮긴 혜담은 한쪽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늘 은은하게 배어 있던 커피 향도 사라지고 함께 있는 공간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혜담의 시선이 벽에 있는 시계로 향했다.
일 분 일 초가 이렇게 길었었나? 입술이 바싹 마르기에 혀끝으로 입술을 조금 적셨다. 마치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는 혜담은 지금 저를 감싸는 무거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게 친절하고 다정하며, 자신의 엉뚱한 요구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받아 주는 건 모두 레오의 뜻이었다. 자신이 이 관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레오였다. 매정하게 떠났던 그날처럼 그는 언제든 제 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늘 없는 자가 힘겨울 뿐이다.
시계에서 천천히 시선을 옮긴 혜담의 시선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고 있는 레오에게로 향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하면서도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여행을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며, 공과 사가 섞일 만한 일은 아예 싹을 잘랐을 것이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참으로 반듯하게 잘생겼네. 포마드도 좋지만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이마를 드러낸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확실히 앞머리 다 내린 게 어려 보이긴 해. 머리카락은 자연 색이고, 눈동자 색은 오로라처럼 신비로운 초록색. 티끌 하나 없이 뽀얘서 더 귀티 나는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은 채, 레오를 훔쳐보던 혜담은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전보다 더 오랜 시간 붙어 있었으니까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한 것이 더 많기에 추억할 것도 많고. 억지로 잊으려 하거나 그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으니 더 소중하게 간직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고개를 들어주면 좋겠다. 반듯하고 높은 콧대에 가려 그의 입술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 볼 거예요?”
“아, 네?”
집중해서 레오의 코끝과 턱선을 응시하던 혜담은 살짝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내 얼굴. 언제까지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을 거냐구요.”
레오가 숙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 하며 고개를 들자 보고 싶던 그의 입술과 하관이 완전히 드러났다. 조금 전. 제가 보았던 냉랭한 얼굴 대신 늘 제가 보던 평온한 미소가 깔린 레오의 얼굴에 혜담은 흠칫 소파 안쪽으로 몸을 물렀다.
“진짜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나한테 그렇게 냉정하고 매몰차게 말하고 난 뒤 기분이 어때요? 난 두 번은 못 하겠는데. 우리 못난이가 6시까지 일만 하래서 해 보려고 했는데, 내 마음이 불편해서 못하겠어.”
아…….
방금 그 모습이 제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혜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저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가 꺼내는 말 하나하나가 저를 이렇게나 흔들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발을 빼야 하는데, 내키는 대로 할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즐기기만 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레오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제게 파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