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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65화 (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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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주어진 파일을 뒤적거리는 것도 잠시, 다시금 속이 불편해지자 혜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창 일에 집중해 있는 루나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심조심 회의실을 빠져나와 구석에 있는 큰 나무 뒤 소파에 앉았다.

밖은 영하의 추운 날씨일지 몰라도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소파 위는 아늑하고 따뜻했다. 나른함에 하품을 해 가며 기지개를 켰지만, 슬슬 밀려오는 잠을 이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스함과 졸음, 울렁거리는 속과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혜담의 눈이 감겼다.

비몽사몽, 잠이 든 것도 아니고 잠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루나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들이 멀게 느껴졌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많이 사용되는 곳이기에 그들의 대화 소리는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외국 영화를 틀어놓은 것 같은 기분에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유독 크고 음이 높은 루나의 목소리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가 또 그녀를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늘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튀었다. 문제라도 생겼나? 몽롱한 상태에서 혜담의 엉뚱한 상상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구하려던 물건을 못 구해서? 아니면 정말 마음에 드는 걸 찾아서? 또 아니면 클라이언트가 불가능에 가까운 걸 주문해서? 그녀의 입장에서 그렇게 흥분할 만한 일을 떠올리다 보니 절로 그녀의 말에 귀가 기울여졌다.

“또 나타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때 그 난리 쳐서 애 멘탈 다 빻아 놓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입 닥치고 사는 조건으로 돈 뜯어 갔으면 됐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건가?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루나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영어는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빠른 그녀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제가 뜻을 다 알지 못하는 비속어 같은 말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무심하게 듣고 있었지만 어느새 혜담은 그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도 엄청난 막장 같은데? 그러니까 과거에 누군가가 아이를 가지고 협박 같은 걸 해서 돈도 뜯어내고 했는데, 몇 년 만에 또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어느 호구가 자신의 애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 책임진다고 한 건지. 너무 완강하게 제 아이라고 우긴다고 해도 제가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른다고? 아무리 그쪽 문화가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고 술이 떡이 됐다고 해도 말이지. 쯧…….

이 정도만 들어도 루나가 왜 이렇게 화가 나서 소리소리 지르는지 알 만했다. 아마도 돈을 뜯긴 애 아버지라는 쪽이 루나와 친한 것 같았다.

“미친……. 처음부터 그쪽이 막무가내로 우겼잖아. 그때 아무도 안 믿었던 거 기억 안 나? 새벽에 방에서 나오는 모습 애들 몇 명이 본 거 말고는 증거가 없었잖아. 진짜 관계가 있긴 있었는지, 잠깐 들어갔다가 나온 건지 누가 알아. 하필 거기 CCTV 사각지대여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기에 루나의 말에 귀를 기울인 채, 혜담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내 말이. 그래서 임신 중에도 출산 때도 다 지원해 줬잖아. 태어난 애가 혈액형부터가 안 맞는데, 친자 검사 안 해? 친자 검사도 계속 이상하게 나와서 몇 번인가 더 하고!”

잠깐의 침묵과 빠른 대답이 이어지더니, 이제는 간간이 루나의 욕설만 들렸다.

“그래서 루이스 가에서는 어떻게 한대?”

잠도 다 달아났고, 루나가 통화를 끝내고 나면 슬슬 들어가서 그녀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주무르던 혜담의 손이 멈췄다.

“레오도 모르고? 당연히 모르겠지. 지금 상황에서 이 이야기 레오 귀에 들어가면 바로 살인 나.”

루이스? 레오?

“솔직히 학교 때도 그렇고 불나방처럼 붙었던 것들이 한둘이야? 어떻게든 꼬셔서 팔자 펴 보려던 것들만 생각하면……. 오메가들은 히트만 오면 약도 안 먹고 레오 기숙사 가려고 얼쩡거리고, 다른 알파들만 또 발정 나서……. 아오. 진짜 그 짐승들. 어쨌거나 그 일 정리되자마자 레오 휴학하고 한국 들어가 버렸잖아. 그 뒤에도 미친 듯이 공부랑 일만 하고.”

어깨를 만지고 있던 혜담의 손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방금까지 제가 귀 기울이던 가십의 주인공이 레오 루이스라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언론과도 접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50억이라는 돈을 척 하니 줄 수 있는 집안. 루나의 친한 지인.

스무 살 늦은 가을쯤 돌연 한국으로 가 버렸단다. 혜담이 온달을 만난 것도 그가 스무 살이던 해의 가을이었는데. 그에게 제일 힘든 시간, 제일 잊고 싶을 만한 기억에 제가 끼어 있었다. 기억을 잃은 척 제 옆에 있었던 이유가 뭘까.

지금처럼 능글맞지도, 잘 웃지도 않았다. 같이 있을 때면 어찌나 말이 많은지, 가끔 조용히 하라고 제가 입을 틀어막는 지금의 레오와 그때의 온달은 같으면서도 많이 달랐다.

싸늘한 날씨에도 혼자 평상에 덩그러니 앉아 먼 곳을 바라봤던 이유가, 잘 웃지도 않고, 말이 없었던 이유가…… 로버트가 나타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곳을 떠나 버렸던 이유를 모두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나랑은 왜 그랬어? 그냥 그렇게 있다가 훌쩍 떠나도 됐는데, 도대체 나랑 잔 이유가 뭐야? 내가 호구였네. 레오가 아니라 제가 호구였다.

얼마나 제가 우스웠을까.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으니 쉬웠나 보지? 절대 아기로 발목 잡지 않을 상대였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제 입에서 아기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저 이야기 속의 상대는 아마도 오메가겠지? 그러니 그 집안에서 임신 기간과 출산까지 책임졌겠지. 손이 귀한 집안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공식적으로 베타인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고, 그런데 그 아이가 네 아이라고 말하면 레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게도 거금을 쥐여 주고 쫓아내 버릴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속을 리가 없다. 비록 제가 가진 건 진실이지만,

허벅지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손끝이 떨렸다. 안 그래도 불편하던 속이 요동치고, 구역감이 밀려들었다. 머리가 아픈 것인지, 가슴이 아픈 것이 구분되지 않고, 숨이 턱 막혔다.

덜덜 떨리는 혜담의 손이 느리게 자신의 배를 감쌌다.

“아, 몰라. 난 오늘 이야기 안 들은 걸로 할래. 나 일해야 해. 바쁘다고. 레오한테 입도 벙긋하지 마. 지금 걔 귀에 들어갔다가는 진짜 다 죽어.”

통화를 끝낸 것 같은 루나의 거친 욕설이 들어간 혼잣말에 이어 슬리퍼 소리가 들렸지만 혜담은 동상처럼 굳은 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아기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다. 좋아하라고 종용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그럴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스무 살.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다.

누구나 충분히 실수를 할 수 있다. 대학 입학 후, 저 역시 네발로 집에 기어들어 가는 일이 허다했고, 과방에서 술 먹고 뻗어서 잔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루나의 말대로라면 무슨 이유인지 레오는 그날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책임지려 했지만, 상대가 그와 그의 집을 끝까지 기만했다.

“…….”

가슴이 갑갑하게 죄어 와 느린 손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그제야 꽉 막혔던 숨구멍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그를 이해하고, 배려할 게 아니라 지금은 자신을 챙겨야 할 때였다.

응급실 당직 의사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늦은 밤이었고, 응급실은 많은 환자로 북적거렸다. 누군가와 자신의 혈액 샘플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호르몬이라는 건 늘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게 호르몬이 아니던가? 어쨌거나 난 지금 심각한 위장병을 겪는 것일 뿐이고. 지금은 자신이 꿈결에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이다. 이류도 아닌 쓰레기 같은 삼류 영화 같은 꿈 말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놓은 혜담의 떨림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불규칙하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혜담은 최대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그만큼이나 느리게 숨을 뱉었다. 차가워진 손을 살짝 비빈 후 얼굴을 쓸어내렸고, 다음으로 소파에 늘어져 있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한 혜담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려 발을 떼던 혜담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독종 이혜담 다 죽었네.”

욕설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혜담은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답을 찾을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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