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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오는 로버트와 눈이 마주친 혜담은 아직 제 허리 뒤쪽에 닿아 있는 레오의 손을 빠르게 쳐 냈다.
“그럼, 추후 일정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씨와 조율하겠습니다.”
추후 일정은 무슨 일정.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얼렁뚱땅 말을 뱉은 혜담은 로버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도망치듯 팀장실을 벗어났다.
“혜담 씨, 안녕?”
로버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혜담은 블라인드가 내려진 팀장실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곤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과도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얼버무리듯 인사를 하고 곧장 탕비실로 들어간 혜담은 푹신한 소파에 푹 쓰러지듯 앉았다.
방금 누군가가 커피를 내려 마셨는지 탕비실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커피 향을 맡은 혜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어딜 가든 커피 향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축 늘어져 있던 혜담의 시선은 어느새 커피포트에 꽂혀 있었다. 아침에 눈뜨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시원하게 아아나 마실까. 생각과 함께 몸을 움직인 혜담은 자신의 컵에 얼음부터 잔뜩 채웠다.
추위를 제법 타는 편이라 한여름에도 얼음을 즐기지 않았는데, 이 겨울에 이게 무슨 짓인지. 커피 머신에 컵을 두고 버튼을 누르려던 혜담의 손끝이 멈췄다. 망설이던 손이 허공을 맴돌다 결국 옆에 놓여 있던 오렌지주스를 집어 들었다.
빨대를 꽂을 새도 없이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던 혜담은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 전화의 액정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받았다.
“왜?”
― 어디야?
“왜?”
― 병원?
“어.”
문을 나설 때까지도 따라 나와 병원에 가라고 종알거리더니 기어이 병원에 갔는지 확인하려는 준석의 전화에 혜담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 뭐래?
“아직 진료 시작 안 했거든. 문제 있음 나중에 보고할게.”
할 말만 한 채 준석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은 혜담은 남은 오렌지주스를 마시다 한숨을 푹 쉬었다.
한 잔을 다 마신 것도 아니고 반 잔 정도만 마셨는데, 잠시 멈췄던 멀미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나름 배려했잖아. 그러면 너도 내 상황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냐? 특정한 상대를 향한 불퉁한 감정이 튀어 올랐다.
전화를 끊은 지 10초도 안 돼서 다시 전화가 울렸다.
“진료 기다리고 있다고. 9시 진료 시작! 전화할 시간에 얼른 준비하고 나가서 운동이나 하세요.”
― …….
혜담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야!”라고 소리쳤다.
― ……무슨 진료?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혜담의 행동이 멈췄다. 잔에 맺힌 물방울이 손 위로 툭 떨어졌다.
― 이혜담.
준석의 목소리보다 훨씬 듣기 좋은 목소리가 휴대 전화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화면을 확인한 혜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 네, 팀장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었지만, 본능적인 대답이 튀어 나갔다.
― 어디 안 좋아?
“아닙니다.”
― 거짓말…….
“어제…… 술 마시고 준석이가 술병 나서 아침에 병원에 가서…… 같이 나와서 준석이는 병원 가고 전 출근해서…….”
근무시간만큼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철저히 지키겠다는 혜담의 신념이 흔들렸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는데, 다급한 마음에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 나갔다.
― 같이 점심 먹어요.
“저, 전 선약!”
― 루나랑 같이 먹으면 되잖아. 둘이 상의해서 식당 예약하고 11시 50분까지 나갈 준비해요.
“저기 그게 팀장…….”
일방적인 레오의 말에 반박할 새도 없이 휴대 전화 너머로 로버트와 레오가 불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고 통화는 그대로 종료됐다. 점심 먹을 생각 없는데, 어떻게 하지? 아니, 무슨 할 말이 또 남았다고 전화를 하는 거야.
화를 내거나 자책하거나 고민하기에도 체력이 부족한 혜담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9시가 다 돼서야 자리에 앉은 혜담이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로버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빼곡한 레오의 일정에서 추가되어야 할 사항들과 변경되는 것들을 비롯하여 제가 참고해야 할 것들이 적혀 있었다.
누구보다 바쁘게 사는 레오의 일정을 확인하는 혜담의 손끝에서 펜이 빠르게 돌아갔다. 변경되는 일정들은 죄다 자신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테고, 자신이 들어갈 공간도 부족한 곳에……. 입술을 꾹꾹 무는 혜담의 한 손이 배에 닿아 있었다.
* * *
“나랑 혜담 씨 데이트인데 네가 왜 따라와!”
역시 할 말은 하는 루나 씨. 동행하겠다는 말에 조금의 불평도 하지 못한 자신과 다르게 같이 음식점에 들어가자마자 레오를 보고 한 소리 하는 루나의 모습에 혜담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루나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제가 앉을 의자를 빼 주는 레오의 행동에 금세 입꼬리가 내려갔다.
내가 네 의자를 빼 줘야 한다고. 분명 제게 앉으라는 레오의 제스처를 보았으나 슬쩍 그가 그 자리에 앉게 유도한 혜담은 얼른 의자를 빼 앉았다.
“브런치?”
“우리가 먹고 싶은 거야. 토 달지 마.”
“고기가 낫지 않나?”
“우리는 브런치 먹을 거거든. 혜담 씨, 뭐 드실래요? 여기 샐러드 유자 드레싱 들어가서 진짜 상큼해요.”
“아침도 아니고 점심을 이런 걸 먹어?”
속이 차도 불편하고 비어도 불편한 상황이라 입맛이 없는 혜담은 메뉴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둘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냥 우리 둘이 먹으면 딱 좋구만, 따라와서 말이 많아. 여기 스테이크 샐러드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든지. 혜담 씨, 파니니?”
“전 유자 드레싱 샐러드 먹을게요.”
안 먹는다는 말을 했다가는 레오의 추궁을 들을 것이 뻔해 혜담은 가장 가벼워 보이는 메뉴를 선택했다.
“리소토는?”
샐러드면 됐지 뭔 리소토야. 그리고 너 스테이크 샐러드 먹지 마. 고기 냄새 별로야.
루나가 없었다면 그의 메뉴에까지 관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자격이 없기에 혜담은 나서지 않고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있는 걸 선택했다. 세 명이 방문해서 왜 일곱 개까지 주문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루나는 “일단 먹어 보고 더 시키든지 하자.”라는 말로 메뉴 선정을 끝냈다.
“혜담 씨, 이거 좀 봐 봐요.”
집중해서 일할 때를 제외하곤 쉼 없이 떠드는 걸 좋아하는 루나의 부름에 혜담은 그녀에게서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아…….
바닥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던 아기가 일어나는 영상이었다. 응원하는 루나의 목소리에 저도 좋은지 아기는 저도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곧바로 뒤로 발라당 넘어졌지만, 화면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엔 행복이 가득 넘쳐났다.
“어제 진짜 운 좋게 찍었어요.”
화면을 끄거나 멈추지 않았기에 같은 영상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귀여운 아기에 집중하던 혜담의 시선이 옆에 앉아 있는 레오에게 닿았다. 루나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화면을 들이대고 있는데도, 레오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곧 걷겠네요.”
“그래서 전쟁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꾸민 인테리어인데, 아이가 있으면 인테리어 진짜 다 포기해야 돼. 가구마다 모서리 보호대 붙이는 심정을 혜담 씨도 곧 알게 될 거예요.”
“네?”
아무도 모르는데, 루나가 전혀 알 리가 없는데 순간 정곡을 찔린 혜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튀었다.
“왜요? 혜담 씨는 아기 생각 없어요?”
“아니, 제가 무슨 아기…….”
“미래에. 지금 당장이 아니라.”
때마침 음식이 나와 대화가 끊기자 혜담은 고개를 숙인 채, 제 앞에 놓인 유자 샐러드를 섞는 것에 집중했다. 먹을 수 있으려나, 여기서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간 큰일 날 것이 뻔했다. 아침의 병원 소동은 준석이 병원을 가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레오는 그 일에 대해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불편함을 내색했다가는 레오의 의심이 다시 시작될 것이고, 그의 성격으로 보아 다음 일정은 루나에게 파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병원 진료실일 것이 뻔했다. 그것도 그와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눈치 빠른 루나가 제게 무언가를 캐물을지도 모르고…….
망설이는 것도 잠시 샐러드를 조금 입에 넣은 혜담의 포크가 점차 빨리 움직였다. 어제 오전부터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는 상태였다. 별로 생각이 없어서 샐러드 하나만 먹겠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혜담은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며칠 만에 불편함 없이 신나게 잔뜩 먹던 혜담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레모네이드를 마시다 생긋 미소 짓고 있는 루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