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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혜담.”
멀리서 들리는 준석의 목소리보다 먼저 혜담을 자극한 건 음식 냄새였다. 깨어나서 기지개를 켜며 눈을 뜨기보다 먼저 움직인 건 몸이었고,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간 혜담은 변기부터 부여잡았다. 헛구역질 몇 번과 함께 진을 뺀 혜담은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이러는 이유가 다…… 체한 게 아니라는 거잖아.
잠들었을 때는 잊고 있었던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뒤엉켰다. 정확한 진료를 위해 오메가 센터를 방문하라는 의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혜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겪어 본 일은 아니지만 알고 있는 내용들이잖아.
“괜찮아? 아직도 그래? 그러게 병원을 가라니까……. 속병 빨리 안 고치면 오래간다.”
“갈 거야.”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혜담은 세면대를 잡고 일어섰다.
“잘도 가겠다. 가라고 한 게 언제고, 간다고 한 게 언젠데.”
“오늘 좀 늦는다고 말하고 출근길에 병원 갔다가 갈 거야. 잔소리하지 마.”
뭘 만들다 온 건지 한 손에 뒤집개를 들고 있는 준석에게 혜담은 괜한 짜증을 부렸다. 왜 아침부터 계란프라이를 하는 건데, 네가 언제부터 내 아침을 챙겼다고. 평소처럼 알아서 가게 내버려 두면 되잖아.
“미루지 말고 진짜 병원 가.”
“가. 가. 간다고. 그리고 그거 하지 마. 속 안 좋아.”
“아침은 먹고 가야지.”
“언제부터 네가 내 아침을 챙기셨어요. 가서 무슨 검사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빈속으로 가야지. 괜히 밥 먹고 갔다가 검사 못 하면 어떡해.”
이미 다 준비했으니 먹으라고 재촉할 것을 예상해 먼저 선수를 친 혜담은 욕실에 들어와 있는 준석을 밀어내고는 후다닥 씻고 그의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누구에게도 선뜻 말하지 못하는 막막한 상황을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혜담의 발걸음은 회사로 향했다.
* * *
“전화도 안 받고, 꺼 버리기까지 하고…….”
평소보다 이른 출근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사무실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팀장실 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온 레오의 말에 혜담은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준석이랑 술 마시다 보니까 그리고 일부러 끈 게 아니라 배터리가…….”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덜컥 레오를 마주하게 된 혜담은 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꽤 큰 목소리로 자신을 추궁하는 것과 다르게 레오가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자 혜담은 입을 앙다물고 말았다.
촉.
볼에서 느껴지는 촉촉함에 혜담은 급히 손을 들어 볼을 매만졌다. 당황한 혜담의 눈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우왕좌왕했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이미 손이 잡혀 팀장실로 따라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소리를 죽인 혜담의 절규는 꽉 끌어안는 레오의 품에 먹혀 버렸다.
“아무도 안 봤어. 친구랑 뭐 하고 논다고 전화가 꺼진 것도 몰라요? 같이 있고 싶은 것도 참고 친구 만나고 싶다고 해서 보내 줬는데 이런 식으로 연락 끊기면…….”
“다음부터 잘 챙길게.”
아침부터 준석에게도 잔소리 들었다고, 너까지 잔소리하게? 그러지 마. 나 지금 굉장히 불안한 상태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버렸는데도 지금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군말 없이 꽉 끌어안아 주는 레오에게서 느껴지는 커피 향에 혜담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렁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들쑥날쑥 초조하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따뜻한 넓은 품과 등을 작게 토닥이는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혜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일정하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이내 머리에서 맴돌던 걱정거리까지 사라지고 편안한 기분이 찾아오자 혜담은 레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런데 이제 좀 놔줄래? 정신없이 출근한다고 네 스케줄 확인 못 했어.”
“놓으라고?”
“응.”
마주 안고 있음에도 혜담은 괜히 그에게 놓으라는 말을 꺼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혜담은 아닐 거라는 가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아직 확실하게 확인된 건 아니었다. 제대로 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상상임신 뭐 이런 것도 있지 않은가.
레오와 닿자마자 불안정했던 컨디션이 온전하게 되돌아왔다. 이런 상태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겉으로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울렁거림이야 속이 안 좋은 것으로 치부하면 되고, 약속이 많은 레오이기에 항상 식사를 같이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스케줄은 로버트가 알아서 할 거야.”
“내 일이기도 하거든.”
“이것도 네 일.”
팀장실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게 무슨 내 일이야. 이래서 내가 사내 연애를 싫어한다고. 이러다 누군가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레오를 놓지 못한 혜담은 매번 그가 하는 것처럼 두 팔에 힘을 줘 그를 꽉 끌어안아 보았다.
“우리 못난이가 아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지금 몇 시야?”
“8시 32분.”
“그럼 딱 8분만 더 이러고 있어.”
혜담의 중얼거림에 레오는 대답 대신 꽉 끌어안았다. 온몸으로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아 혜담은 괜히 아프다고 투덜거렸다. 레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혜담은 나른해지는 기분에 레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졸음이 몰려오려는 찰나 혜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놔 봐.”
처음엔 무시했지만, 계속해서 메시지가 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싫어.”
“메시지 오잖아.”
“8분 동안 이렇게 안고 있으라며.”
“급한 거면 어떡해.”
“나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고?”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화를 하며 그제야 안고 있던 레오를 놓은 혜담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미적거리는 동안에도 메시지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어?”
서윤, 스텔라와 함께 있는 채팅방에 올라오는 메시지를 확인한 혜담의 눈이 커졌다.
갓 태어난 아기 사진과 스텔라와 서윤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달이 예정일이었지만 세상이 궁금했는지 한 달이나 빨리 아기가 태어났다는 스텔라의 설명보다 너무나도 작은 아기 사진이 계속해서 시선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는 마주 안고 있었지만 자신이 휴대전화를 확인하느라 돌아선 탓에 이제는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레오의 턱이 어깨를 눌렀다. 제 메시지를 그도 확인하고 있으리라.
“아기…… 예쁘네.”
선뜻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혜담은 괜히 아기 사진만 확대했다가 줄였다가 하며 작게 말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는데,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우리 못난이가 더 예뻐.”
“무슨 소리야. 아기가 더 예쁘지.”
혜담은 휴대전화를 잡은 손을 움직여 그가 아기 사진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아니.”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형식적인 대답에 혜담은 “잘 좀 봐.”라는 말을 기어이 꺼내고 말았다.
“봤어.”
“아기 좋아하지 않아?”
시큰둥한 반응에 직접적으로 묻는 혜담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별로…….”
“너 닮은 아기면 되게 예쁘거나 멋지거나…….”
“됐어. 오늘 점심 약속 없는데, 점심 뭐 먹을래요? 아침은 먹었어?”
마냥 좋다거나 이쁘다거나 그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가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 아기 너무 예쁘지 않아? 자는 모습 좀 봐. 그런데 진짜 작다.”
“그러네요. 아침은 뭐 먹었어요?”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레오 때문에 혜담은 이 대화를 더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기가 왜 싫어?”
“좋아해야 돼요?”
되돌아오는 질문에 혜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레오의 생각만큼은 확실히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야만 했다.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긴 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팀장님, 8시 40분 됐습니다.”
휴대전화를 꺼 주머니에 넣은 혜담은 허리와 배에 닿아 있는 레오의 손을 치우려 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일할 시간입니다만.”
“하, 이봐요. 레오 루이스 애인 이혜담 씨.”
레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느릿하게 떼어 내던 혜담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네게 필요한 건 베타 애인이지?
“오늘 점심은 루나 씨와의 선약이 있어서 팀장님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추가 주문 건이 있어 함께 점심 식사 후 추가 파일을 더 받기로 했습니다.”
“누구 맘대로?”
“가지 말까요?”
“너무하네.”
이제 나가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혜담은 선뜻 그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다. 레오 역시 제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든 손등을 툭툭 건드리든 상관하지 않고 혜담의 어깨에서 턱을 떼지 않았다.
똑똑.
미적거리던 둘을 떼어 놓은 것은 로버트의 노크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