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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60화 (6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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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여행에서 혜담이 한 일이라고는 그의 부모님 소유의 별장에서 먹고, 자고, 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이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유명한 관광지는커녕 별장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혜담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시간이 돼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감귤빵이 맛있다지?”

“준비할게요.”

“우도에 새로 생긴 관광지가 참 좋다고…….”

“이번 주말에 다시 올까요?”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바깥 풍경을 보며 이제야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둘 꺼낼 때마다 곧바로 돌아오는 레오의 대답에 혜담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참 속 편하게 사는구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삶. 갖고 싶은 건 다 가지는 삶.

그게 바로 레오의 삶이었다. 그의 비서로 있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지난 며칠 동안 그와 붙어 지내면서 그의 삶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TV를 보다 다금바리 이야기를 꺼냈고, 한 시간 뒤. 그의 집 온실에서 다금바리 회를 먹었다. 눈이 쌓인 밖과 다르게 적당히 습하고 적당히 따스한 온실 안은 봄 같았고, 제주 바다를 보며 먹는 회 맛은 지금껏 먹었던 회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끝까지 옷은 주지 않았고, 마지막 타협안으로 가운만 입고 살았던 혜담은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외에 몇 벌의 옷들이 차에 더 있는 걸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행 한번 하려면 계획을 세우고, 이곳저곳 알아보고, 예약하고, 많은 과정을 거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레오는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레오.”

“응?”

“이번 주말에도 보게?”

태블릿을 보고 있던 레오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는 순간 혜담은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못난이가 우리 사이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태블릿 케이스를 덮고 몸을 틀어 완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의 눈빛과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며칠 동안 늘 걸려 있던 미소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

선뜻 대답하지 않자 레오는 진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할 뿐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좋은 사이?”

“일반적으로 포옹, 키스, 같이 밤을 보내는 것 등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사귀는 사이, 연인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데, 우리 혜담이는 조금 다르네?”

지금까지 적당히 반존대 잘 섞어서 하더니.

거기다 우리 못난이라고 칭하더니 지금은 왜 갑자기 우리 혜담이야? 사람 무섭게?

“아…… 어, 일반적으로 그……렇지.”

“혜담이는 기준이 다른 것 같고. 그럼, 혜담의 기준을 들어야 지금 내 의문이 해소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본능적으로 몸을 문 쪽으로 조금 옮긴 혜담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아니. 나는…… 뭐, 그러니까. 키스, 포옹 뭐 그런 것들을 같이한다는 건, 서로 감정 없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좋은 감정을 가진 사이…….”

“이래서 준비고 뭐고 다 필요 없지. 품에 안겨 있을 때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다 해 주더니 이렇게 밖에만 나오면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지금 나 먹고 버리는 거?”

쿨럭.

“맞네. 온몸을 다 바쳐서 만족시켜 줬지, 먹여 줬지, 재워 줬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줬는데. 이제 집으로 돌아가니까 입 싹 닦겠다? 내일 출근하면 ‘팀장님. 오늘 일정은…….’ 이런 말만 하려고. 분명 비행기 내리자마자 ‘저는 제집으로 데려다주면 됩니다.’ 이런 말 할거고. 그래요? 안 그래요?”

아니. 꼭 그렇게 입을 싹 닦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행은 끝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리고 도착하면 난 당연히 내 집으로 가서 쉬고, 내일 출근하고. 회사에서 당연히 팀장님이라 부르고 일 이야기하는 게 맞지.

자신이 할 말들을 미리 다 말해 버리는 레오를 보며 혜담은 입만 벙긋거렸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간 뭔 일이 날 것 같은데. 가장 레오가 좋아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 혜담의 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봐 봐. 지금 머리 굴리느라 바로 대답도 못 하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할 건데요. 이제 와서 우리는 사귀는 사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대답하려고? 회사에서는 아무런 티 내지 말고, 일 이야기만 하는 거니 ‘팀장님’이라고 부른다고 하겠지. 또, 당연히 내 집이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 회사에서 만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도 할 테고, 또 뭐가 있나? 아! 나 달래려고, 주말에 같이 있자는 말도 할 거죠?”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한 뇌가 답이라고 내놓는 말을 딱딱 받아치는 레오를 보는 혜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를 내놓아 막히면 다른 걸 생각하고, 또 다른 걸 생각해도 마치 제 머릿속을 읽는 듯 레오는 모든 것을 말해 버렸다.

“아…… 아닌데!”

일단 급하게 말을 뱉긴 했지만, 뒤이을 말이 없는 혜담은 입술을 꾹 물었다. 그 순간 레오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보조개 보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보조개 보일 때마다 입 맞출 거니까 알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혜담은 물고 있던 입술을 얼른 뗐다.

“그래서 오늘 어느 집으로 갈 거예요?”

“출근 준비를 해야…….”

“같이 일어나서 같이 준비하고 같이 출근하는 거 굉장히 효율적인 동선인 건 알죠?”

혜담은 자신의 말꼬리를 뚝 자른 레오가 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제주도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부정할 거예요?”

이번엔 혜담의 머리가 얼른 좌우로 흔들렸다.

“나 싫어요?”

그것도 아니니, 도리도리.

“나 좋아요?”

어. 그러니까…… 이건 끄덕끄덕.

“아. 착하다. 우리 못난이. 이러니까 얼마나 예뻐.”

순식간에 지나간 대화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다급하게 레오의 팔을 잡은 혜담이 마주한 건 환하게 웃는 레오의 얼굴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석에 기사님 있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레오에게 손이 붙들려 공항으로 들어가는 혜담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홀리지 않고서야. 자신을 앞서 걷는 커다란 남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피부까지 하얘 가지고 북극곰같이 느껴지는 레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 *

곰 같은 여우에게 홀려 더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이 레오의 집으로 가야 했고, 그와 같이 출근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고야 말했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한 그의 일정은 로버트가 있기에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오후엔 회사가 아닌 루나의 사무실로 향해야만 했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혜담은 차가운 얼음물이 든 잔을 받아 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루나 씨도 나이 먹어 봐요. 한 해 한 해 다르다니까요.”

“에. 우리 세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요. 누가 들으면 열 살은 차이 나는 줄 알겠어요. 가끔 혜담 씨 진짜 아저씨같이 말하는 거 알죠?”

“아저씨 맞는데요.”

“아. 쫌! 밖에 나가서 물어봐요. 누가 혜담 씨를 그 나이로 보는지.”

버럭하는 루나의 말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혜담은 얼음물을 마셨다. 어제저녁부터 불편한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체했다고 하기엔 구토는 없었고, 멀쩡하다고 하기엔 무언가가 불편했다.

멀미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침까지는 레오의 눈치를 보느라 조금 먹긴 했지만 점심은 먹지 않았음에도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새콤하고 시원한 게 당겼는데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물은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것 같았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얼음물이에요. 안 추워요?”

“계속 히터 빵빵한 실내에만 있으니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번엔 또 뭘 사길래 카탈로그가 이렇게 많아요?”

“곧 설날이잖아요. 이렇게 꾸준한 이벤트들이 있으니 저 같은 쇼퍼들이 먹고 사는 거죠. 거기 왼쪽에 짙은 파란색 파일 있죠? 그건 혜담 씨 거. 마음에 드는 거 몇 개든 선택해도 되니까 꼭 챙겨 가세요. 대신 다른 것들과 함께 다음 주 수요일까지 체크해서 주셔야 됩니다.”

“네? 저요?”

“네, 혜담 씨요. 최소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필요 없다거나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전용 비서면 충분히 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저도 전담 쇼퍼라서 개인 파일이 있답니다.”

얼음물을 다 마시고도 느껴지는 갈증에 얼음을 입 안에 머금고 오독오독 씹으며 혜담은 루나가 말한 짙은 파란색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옷, 가방, 구두, 장신구부터 가전에 가구까지 없는 게 없는 파일을 빠르게 훑어보던 혜담의 손이 가구 쪽으로 돌아갔다.

맞다. 내 이사.

레오와 같이 있기만 해도 그에게 휘둘려 제 주위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이사 갈 집 가계약까지 끝났는데, 이사를 잊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이참에 레오를 통해서 좋은 것들로 싹 바꿔?

가구와 가전 부분을 유심히 보는 혜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메일로 보내면 편한데, 로버트 씨도 그렇고 레오도 이런 쪽은 아날로그더라고요. 파일로 보는 게 더 편하다나? 괜히 바쁜 혜담 씨만 고생하는 건데.”

“아뇨. 제가 뭐가 바빠요. 이런 일 하라고 저 고용한 건데.”

새 얼음을 입에 머금고 깨물어 먹던 혜담은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레모네이드나 오렌지주스 같은 걸로 더 드려요? 아니면 유자차도 있는데, 유자차도 시원하게 먹으면 맛있잖아요. 모과차랑 오미자차는 없어서. 다음엔 준비해 둘게요.”

루나가 챙겨 준 파일들을 차에 실은 혜담의 손엔 얼음이 잔뜩 든 유자차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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