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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59화 (5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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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때 그 순간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고,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의 결과로 지금을 살고 있고, 지금의 삶에 딱히 별 불만도 없었다.

이런 마인드로 꽤 긴 시간을 살아왔지만, 지금만큼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 이놈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어찌나 잘 깜빡깜빡하는지.

그래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이걸 까먹어?

처음엔 레오에게 향했던 너무한다는 마음이 이제는 깜박거리는 자신의 두뇌로 향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어깨와 등이 따뜻해졌지만, 혜담은 눈만 겨우 감았다 뜨면서 온몸의 힘을 쭉 뺀 채로, 레오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몰아치던 쾌감도 격한 숨소리도, 오직 자신과 레오만으로 가득하던 순간은 사그라들고 남은 것은 안락함과 나른함이었다.

“자요?”

드러나 있는 자신의 어깨와 등이 신경 쓰이는지 몸을 움직여 조금 더 물속에 잠기게 하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은 불만 어린 소리만 작게 내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아릿하게 올라오는 아래쪽의 둔통에 대한 불만이었다.

“안 자는 거 다 아는데.”

응. 알면 됐어. 말 시키지 마.

네가 말만 안 시키면 이대로 있다가 고대로 잘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난 씻고 나가려고 했는데, 우리 못난이가…….”

어쭈.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날 물고 늘어지네? 씻고 나가려고 했다고?

그런 놈이 여기저기 만지고, 주무르고, 입을 대냐?

그랬으면 샤워 부스에서만 하고 끝을 내든가, 침대로 갔다가 씻겨 준다고 하더니 여기에서까지 이러는 게 말이 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자각하니? 너와 나의 체력 차를 알긴 알고?

내가 언제 하지 말라고 했어? 그만하라고 했어? 쉬었다가 하자는 말이 왜 네 머릿속엔 입력이 안 되는 거야. 앓느니 죽지.

머릿속에 뱅뱅 돌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말들을 다 꺼낸다 한들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레오를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혜담은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짙게 내린 어둠 위로 눈들이 춤추듯 휘날리고, 정말 자신을 재울 생각인지 은은하게 들리는 클래식 소리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사이로 간간이 낮게 스며드는 레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혜담은 수시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오르내리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혜담아.”

“응.”

한동안 침묵 속에 있던 레오의 부름에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가 흘러나갔다.

“해피 뉴 이어.”

여기 시계가 있었어? 대충 그 정도 시간이 됐을 거 같긴 하네. 오늘 낮만 해도 집 소파에 편하게 드러누워 치맥을 먹고 TV를 통해 종이 울리는 것을 보며 새해를 맞이할 계획이었다. 한데 지금은 제주도였고, 따뜻한 물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자쿠지 안에서 그를 품은 채 안겨 있었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낮게 잠긴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울퉁불퉁 거칠었지만 제 뜻을 전한 혜담은 눈을 꼭 감았다.

속으로 그를 향한 울퉁불퉁한 생각이 솟구쳤지만 그 아래 깔려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러고 있는 거지. 그런데 레오야, 나 손가락 다 쪼글쪼글해졌는데. 진짜 그만 나가면 안 될까? 진짜 물에 불은 오징어가 될 것 같아.

역시나 그에게 전하지 못한 많은 생각의 끝은 까무룩 몰려오는 잠이었다.

* * *

“레오.”

“응?”

“우리 대화 좀 할까?”

“필요한 거 있어요? 커피는 지금 내리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혹시 거기 불편해요? 다른 데로 옮겨 줘요?”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에 둘둘 말려 넓은 소파에 앉혀져 있던 혜담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제게로 다가오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편안한 면바지에 헐렁한 니트를 입은 그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막 씻고 나와 부산스럽게 아침인지, 점심인지 알 수 없는 어쨌거나 음식을 준비하던 그의 얼굴에서 광이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필요한 건 옷이야.”

“왜?”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이 생활하면서 기본적인 의복을 챙겨 입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 아닐까?”

“여기저기 쓸려서 아프다면서요. 거기다 어차피 벗을 건데 왜 입어요?”

“그러는 넌 왜 입는데!”

“아, 나도 벗길 바란 거였구나. 난 또…….”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훌떡 니트를 벗어 잘난 상체를 드러내는 레오를 향해 혜담은 “야! 이 미친놈아.”라는 말을 버럭 내지르고 말았다.

“…….”

니트를 벗어 대충 바닥에 흘려 놓는 것과 동시에 바지에 손을 댔던 레오가 뻣뻣하게 굳었다.

“누가 벗으래! 입어! 너도 입고, 나도 입고. 입고 살자고!”

레오의 상체 여기저기 긁힌 상처에 눈이 커졌던 것도 잠시, 홱 하니 고개를 돌린 혜담의 귀가 한껏 붉어졌다.

“그러니까 난 입고, 우리 못난이는 벗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잖아.”

투덜거리며 니트를 다시 주워 입는 레오는 어느새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오렌지주스나 가져와.”

“오렌지주스? 커피 마신다며.”

“오렌지주스랑 리코타치즈 들어간 샐러드, 거기 베이컨은 바삭하게. 빵은 호밀빵. 잼은 마멀레이드 계열로, 오렌지주스 없으면 파인애플주스도 괜찮아.”

손끝으로 이불 끝을 꼭 잡아 단단히 여며 레오에게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인 혜담은 떠오르는 음식들을 모두 말했다.

“시간 좀 걸릴 건데, 커피부터 줘?”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 볼에 입도 맞춰 주는 레오의 섬세한 행동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기다릴게.”

그러곤 그대로 소파 옆으로 누워 푹신한 카펫을 바라보았다. 앞에 있던 레오가 일어나고 부엌으로 향하는 인기척을 듣는 혜담의 보조개가 평소보다 더 짙어졌다. 이런 말과 행동은 다 처음이었다.

한편으로 이래도 되나 걱정이 되지만, 레오에겐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응석이라고 해야 하나, 투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이래도 받아 줄 거야? 이래도? 계속해서 그를 시험하는 것 같은 자신의 못난 행동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프렌치토스트와 커피, 베리 계열의 잼을 준비하던 레오가 방금 제가 말한 것들을 준비하려면 번거롭고 귀찮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레오는 토를 달지 않았고, 다정하게 행동하는 그와 반대로 자신은 틱틱거리거나 그의 손길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먹는 게 뭐라고. 옷이 뭐라고. 좀 벗고 다니면 되고, 이렇게 대충 이불로 말고 있으면 되지. 레오의 말대로 울긋불긋해진 피부에서 몇몇 곳은 부드러운 이불이 스치기만 해도 아렸다. 원인 제공자가 레오였지만 그가 이렇게 만들도록 내버려 둔 자신도 공범이었다.

“그냥 토스트랑 커피 먹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혜담은 소파 아래로 다리는 내려 슬리퍼를 신었다.

“금방 해. 재료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귀찮잖아. 커피는 다 내려졌고, 토스트만 살짝 익히면 되는데.”

이불을 끌며 부엌으로 들어간 혜담은 계란 물을 입고 있는 식빵을 확인하고는 프라이팬을 찾으려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말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 안 들어. 침대에서 쉬라고 했더니, 기어이 따라 나와야 한다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결국 부엌까지 들어와?”

그릇들만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옆 서랍을 열려던 혜담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레오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둘이 같이하면 빨리 끝나.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해 달라는 걸 다 해 줘. 그냥 만들고 있는 거 먹으라면 되잖아.”

“전부.”

“뭐?”

어깨와 팔을 움직여 뒤에서 붙은 레오를 떼어 내려던 혜담은 레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전부라고. 우리 못난이가 내 전부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걸로. 몇 번을 다시 만들어야 하든 멀리 가서 사 와야 하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뭐든 말해도 돼요. 화가 나면 화내도 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날 생각하지 말고, 우리 못난이만 생각하라고요.”

“어떻게 그래?”

레오의 말에 혜담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야만 했다.

“그래도 되니까. 다른 사람한테 못 하는 거 나한텐 다 해도 돼요. 그게 뭐가 됐든. 왜냐면 나도 마음대로 하니까.”

말 끝나기 무섭게 자신을 안아 드는 행동에 혜담이 “야!”라고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건 레오의 웃음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갔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금 햇볕이 잘 드는 소파에 앉혀진 혜담은 “부엌으로 들어오기만 해. 며칠은 못 일어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 빈말 아닌 건 알죠?”라고 따라붙는 레오는 말에 일어나려던 걸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왜?”

“나도 손 있거든.”

“뭐, 정 그러시다면……. 그런데 이불은 어떡하실 건지?”

“그러니까 내가 가운이라도 달랬잖아. 샐러드 말고, 빵.”

이불을 놓고 수저로 직접 먹겠다는 의사를 전하던 혜담은 결국, 자신의 의견을 꺾고 아기 새처럼 레오가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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