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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고, 열심히 학교 다니고, 취직하고…….”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닌데.”
“그러는 넌?”
질문의 의도를 모를 때는 솔직하게 묻는 게 가장 이상적인 대답이었다.
“궁금했고, 보고 싶었고, 생각했죠.”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혜담은 들고 있던 추로스를 입 안에 다 넣고는 천천히 씹었다. 상큼한 레모네이드로 입 안을 적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오 루이스.”
자신의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방금 제가 먹은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레오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나랑 약속 하나 해.”
음료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혜담은 말을 이었다.
“같이 제주도 다녀오는 동안 방금 같은 수수께끼 같은 질문 금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대답도 금지. 지금부터 난 너를 내가 모시는 상사가 아니라 그냥 내가 아는 레오로 대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해.”
“예쁘네.”
레오의 눈에 웃음기가 스미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후 나온 말에 혜담의 얼굴에 깔려 있던 옅은 미소가 싹 사라졌다. 방금 말했는데 바로 수수께끼냐.
“그런 말도 금지.”
“아, 왜요!”
“툭하면 못생겼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뭔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 차라리 계속 못생겼다 그래. 그게 나아.”
“싫은데? 예쁜데?”
어이없이 우겨 대는 말투에 혜담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솔직하게 사실 그대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말 했잖아요. 그런데 왜 또 싫다는 건데?”
“어디가 사실인데. 그리고 정확한 목적어나 주어가 없었어. 뭘 보고 말하는지 알 게 뭐야.”
“아! 그래서 화가 났구나. 우리 못난이 예뻐.”
턱을 괴고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말에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우리는 일 이야기를 제외한 평범한 대화는 정상적으로 3분 이상을 하지 못하는 거니.
“돌아오는 대로 종합검진 예약할게. 정상적인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정확한 의사의 진료가 필요해.”
“어느 때보다 문제없고 건강해요.”
“다른 건 몰라도 시각적인 부분에 문제가 커.”
“뭐가 문제예요. 예쁜 걸 보고 예쁘다고 하고, 못생긴 걸 보고 못생겼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문제지. 어떻게 못생긴 것과 예쁜 것이 공존할 수 있어?”
“있잖아. 바로 내 앞에. 그럼, 종합검진할 때 같이 할까요?”
“너나 하세요. 난 지극히 정상이야.”
아무 말 대잔치도 아니고 뭐 이런 대화가 다 있는지, 하지만 이런 실속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둘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야!”
안 맞아. 안 맞아. 안 맞아도 어떻게 이렇게나 안 맞아?
혜담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럴 거면 같이 제주도까지 안 왔지. 그냥 내 집으로 갔을 거라고. 오늘 밤 치맥 먹으면서 카운트다운 보고 잠들 내 일정을 다 엎어 놓은 건 바로 너잖아!
“왜요?”
“네가 왜 여길 와?”
“씻어야죠.”
혼자 있는 시간을 1초도 줄 수는 없는 거냐. 나에겐 조용히 혼자 있을 권리가 있다고.
레오가 말한 제주도에 있는 작은 별장은 어느 기준의 작은 별장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욕실이 다섯 개인 건 확실했다. 방이 일곱 개였고, 메인 거실이라 부를 만한 곳도 몇 군데가 됐다. 온실도 있고, 마구간까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던 혜담이 앞으로 그가 말하는 ‘작은’의 개념을 재정립하기로 한 것이 불과 3분 전이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은 후 잠시 씻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데 언제 따라 들어온 것인지 레오는 입고 있던 후드 티를 훌떡 벗었다.
“야! 왜 벗…….”
아, 안에 티셔츠 있었…… 그게 아니라.
“벗지 마요?”
“어. 벗지 말고 그냥 나가. 욕실이 다섯 개나 있잖아. 왜 여기서 씻어. 그리고 여기 내가 쓰는 방이라며…….”
“못난이가 쓰는 방이 내 방이고, 욕실이 다섯 개 있는 거랑 여기서 씻으면 안 되는 것은 무슨 상관일까요?”
아니. 얘는 분명히 존댓말 하고 있는데 왜 계속 반말로 들리고, 왜 내 방이 네 방이며…… 어쨌거나 어느 것부터 반박할지 생각하던 혜담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이 방 너 써. 다른 방 내가 쓸게. 욕실 이어진 방이 여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던데. 실랑이를 하며 피곤해지느니 차라리 피하는 것을 선택하고 욕실 밖으로 나가려던 혜담은 제 허리를 감싸는 팔에 의해 나가는 것조차 차단당했다.
“나 선비 아닌데.”
방금까지 티격태격하면서 언성을 높이며 장난치던 분위기가 레오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뒤에서 자신을 꼭 끌어안은 레오의 체온이 이렇게 높았었나? 거기다 이 목소리는. 귀 아래에서 흩어지는 레오의 숨결에 혜담은 그의 팔을 잡았다.
“선비 하라고 한 적 없어.”
혹여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킬세라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혜담은 작게 웅얼거렸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목덜미에서 레오가 웃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맞닿은 몸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감정과 상태, 기분 등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몇 개나 떠올릴 수 있을까. 작은 제스처와 숨결, 눈빛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에 숨겨진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그의 팔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런데 지금이라고는 말 안 했어.”
혜담은 한 손으로 제 셔츠 단추를 푸는 레오의 손길을 저지하지 않으며 고개를 젖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레오의 대답에 혜담은 작게 웃었다. 셔츠 단추가 다 풀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셔츠가 몸에서 멀어졌다.
“이따가…….”
슬랙스에 흰 티셔츠만 걸친 혜담은 손을 들어 여전히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레오의 머리를 만졌다. 둘 중 하나 누구라도 둘 사이에 있는 선을 건드는 순간 깨져 버릴 이 아슬아슬함이 주는 긴장감이 좋았다. 부정하고 계속해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와 달리 인정하고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수용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제가 뱉어 낸 ‘싫어.’는 말 그대로의 ‘싫어’가 아니었고, 투덜거림은 투덜거림이 아니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려 본 적이 없다. 말도 안 되는 걸 우겨 본 적이 없고. 그런데 그걸 지금 레오에게 하고 있었다.
레오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복부에 닿자마자 혜담의 입에서 낮고 긴 한숨이 흘러 나갔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복부를 쓰다듬고 허리를 건드리는 사이 그의 입술은 혜담의 귓불을 가지고 놀았다.
“언행불일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목소리에 혜담은 웃으면서 몸의 힘을 뺐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레오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흘러내리고, 자신의 등에 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에서 전해져 오는 열기를 즐겼다.
“아니야. 이제 곧 이행할 거야.”
“열심히 해 봐요.”
읏.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를 세워 목덜미를 물어 버리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은 억눌린 신음을 뱉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고 있어.”
웅얼거리며 혜담은 슬쩍 아래로 향하는 레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두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둘러싼 커피 향에 점점 취하는 것 같았다. 덩달아 이제는 빵 내음까지 같이 나는 것 같았다.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가고 드러난 다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온에 혜담은 그의 팔 안에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바로 앞에 있는 레오의 높은 코에 자신의 코끝을 갖다 대었다.
“언행불일치면 불이익 있어?”
“아마도.”
대답과 함께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레오의 손길에 살짝 몸을 굳혔던 혜담은 발끝을 살짝 들어 레오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래도?”
“거래하자고? 그럼, 이걸로는 부족하지.”
슬쩍 얼굴을 뒤로 물린 레오의 대답에 혜담은 레오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끝으로만 그의 등을 건드리며 허리에서부터 점차 위로 손을 옮겨 갔다.
“이건?”
“……안 돼.”
단호한 레오의 대답에 혜담은 그의 티셔츠 끝을 잡아서 벗겨 냈다. 그리곤 보란 듯이 자신의 티셔츠를 벗었고, 이내 헐벗은 둘의 가슴이 맞닿았다.
“이건 조금 흔들렸다.”
욕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커피 향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비롯하여 짙은 녹색으로 변한 눈동자까지. 그의 말과 신체 언어가 상반된 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 이번엔 네가 언행불일치야.”
“들켰어? 그럼, 내가 받는 불이익은 뭔데요.”
레오의 말에 혜담은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레오가 욕실로 들어온 이후, 둘 다 입에 올린 적 없는 문장을 만들어 냈다.
“같이 씻어. 대신, 하는 건 안 돼.”
“……좀 너무한데?”
“그럼, 나가든가. 조금 전에도 욕실에서 나가라고 말했을 텐데?”
혜담은 그의 등을 장난스럽게 더듬는 손을 옮겨 레오의 바지 버클에 올려 두었다.
“선택해. 나갈래? 아니면…….”
톡 소리와 함께 버클이 풀렸고, 조금 더 손을 움직이자 지이익 하는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씻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