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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셨습니까?”
겨우 숨을 가다듬은 혜담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레오의 팔에 손을 올리며 돌아서려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가 놓은 레오는 혜담이 미처 넣지 못한 태블릿을 가져가 버렸다. 들고 간다고 한들 비밀번호 걸려 있…… 레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혜담의 오른쪽 손을 가져가 지문으로 잠긴 걸 풀어 버렸다.
“어디 가고 싶어요?”
회사용 태블릿이니 본다고 해 봐야 그의 스케줄이나 회사와 관련된 것이고, 검색 기록이라고 해도 방금 여행과 관련된 것밖에 없기에 그가 가져가서 보든 말든 문제 될 건 없었다.
“팀장님 없는 곳이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혜담은 레오의 옆에 있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자신의 관계, 직장 상사와 비서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미 그 경계가 무너진 지금 혜담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한 소리 하면 무시하지 뭐.
자르면 퇴직금 받고 실업급여 받으면서 좀 쉬면 되고.
참을 인 세 번에 살인도 면한다던데, 이미 참을 인 열댓 번은 더 새긴 것 같고 호구 된 건 오래인 것 같고. 속으로 앓다가 속병 나는 것보다 할 말은 하고 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병들면 돌봐 줄 피붙이도 없는데 내 건강 내가 지켜야지. 누가 지켜.
“못난이, 방금 한 말 좀 아픈데?”
“퍽이나 아프시겠습니다.”
태블릿을 돌려주고, 캐리어를 가져가기에 일단 그에게 짐을 넘긴 혜담은 태블릿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네.”
“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연락하면 싫어할까 봐 못 했어요.”
“그건 잘하셨네요.”
“칭찬이죠?”
“네.”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주차장으로 향하던 혜담은 자신의 팔을 잡고 당기는 힘에 휘청이며 레오의 몸에 부딪혔다.
“조심.”
“아, 감사…….”
카트와 부딪히지 않게 잡아 준 레오에게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하던 혜담은 팔을 꾹 잡는 힘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얼굴 보여 주네. 방금도 나 잘했죠?”
저를 보고 싱긋 웃는 잘난 얼굴에 혜담은 슬쩍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관리가 안 되는 표정을 숨기며 그의 손에 잡혀 있는 팔을 슬쩍 뺐다.
“머뭇거리다 늦습니다. 오는 동안에도 길 막혔는데, 나가는 길도 만만찮더라고요.”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멍하니 있다가 그에게 휘둘렸던 전적이 있는 혜담은 그의 헛소리를 차단하고는 또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칭찬받을 일을 했으면, 충분히 칭찬하고 상도 줘야죠.”
네가 다섯 살짜리 꼬마냐.
“댁으로 가는 것 맞습니까?”
네가 뭐라고 하든 난 내 일을 하겠다.
“상 안 줘요?”
“……앱니까?”
“혜담 씨보다는 어리잖아요. 보자 3년이니까…… 혜담 씨가 저보다 3,000번 정도 식사도 더 했을걸요.”
말도 안 되는 기적의 논리에 결국 혜담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쯤에서 정확히 자르지 않으면 오늘 그의 집까지 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조금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3,000끼 더 먹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양으로 치면 팀장님이 두 배는 더 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또 그러네. 그럼,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상 주세요.”
나한테 뭐 맡겨 놨냐? 맡겨 놨어? 그리고 난 크리스마스고 생일이고 선물 같은 거 안 한다고 말했잖아. 도대체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더 이상해져서 나타났어?
대답 대신 혜담은 레오를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크리스마스 지났구나. 그럼 새해 선물.”
새해 아직 안 됐다는 말을 하려다,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황당한 답을 내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 하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말하면 들어줘요?”
“아니요.”
혜담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의 뜻을 담은 대답을 내놓았다. 오늘따라 왜 애처럼 구는 거야. 다시 그를 쳐다본 혜담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헤어 스타일은 늘 단정하게, 정장은 몸에 딱 맞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화보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던 레오였다. 대부분 회사에서 그를 봤으니 그런 모습이 제게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오늘은…….
손질하지 않은 듯한 앞머리가 반듯한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를 위해 만들어진 수제 정장이 아닌 면바지에 후드티셔츠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러면 말 안 할래요.”
뭐가 그리 재밌고, 즐거운지 싱글벙글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띤 그의 말에 혜담은 한숨을 억누르느라 잠시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가시죠.”
네 장단에 맞춰 충분히 놀아 줬으니까, 그만 가자꾸나.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궁금해해야 하는데, 로버트 씨가 새해 넘기고 들어온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막연하던 걱정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얌전히 뒤따르면서도 종알종알 물어 오기에 큰마음을 먹은 혜담은 우뚝 멈춰 섰다.
툭.
자신이 멈춰 설 것을 예상하지 못한 레오의 움직임에 그와 부딪히고 말았다. 건장한 그에게 밀려나듯 몇 걸음 앞으로 걸었던 혜담은 돌아서서 레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갑자기 멈춰 서면…….”
터벅터벅 걸어 그와의 거리를 좁힌 혜담은 두 팔을 벌려 레오를 끌어안았다.
이렇게나 컸나? 어쨌거나 서 있는 그를 안은 혜담은 그의 등허리를 손으로 두어 번 토닥거렸다. 평소라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을 그가 가만히 있기에 무안해진 혜담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는 그의 몸에 둘렀던 팔을 천천히 뗐다.
이제 물러서서 거리만 만들면 되기에 혜담은 한 발을 뒤로 살짝 물렀다. 그리고 맞닿았던 가슴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잘못한 건가? 상 달라며. 애들 말 잘 들으면 꼭 안아 주잖아. 그리고 토닥토닥도 해 주는데?
뒤로 디뎠던 발에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둘 사이의 공간이 더 넓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혜담이 뒤로 물러날수록 레오에게서 짧게나마 느꼈던 온기도 커피 향도 점차 옅어졌다.
“이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레오의 중얼거리는 것 같은 말에 혜담은 작은 목소리로 “상.”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내가 상 달라고 해서 진짜로 상 준 거라고?”
눈가를 가렸기에 레오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던 혜담은 그가 손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급하게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나름 방어적인 혜담의 몸짓은 포효하는 커다란 백곰 앞의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으억.
커다란 것이 혜담을 확 덮쳤고, 말 그대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몸통을 꽉 죄는 그 힘에 알 수 없는 의성어가 절로 튀어 나갔다. 거기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킁킁거리기까지 하는 레오의 격한 행동에 살기 위한 본능으로 그와 거리를 만들려던 혜담의 허리가 절로 뒤로 꺾였다.
“우리 못난이. 진짜 이러니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서 이런 거 배웠어요? 누구한테 또 이런 적 있어요?”
갈비뼈 다 나갈 만큼 세게 끌어안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팔뚝을 잡고 쭉 밀어 거리를 만들더니 눈높이를 맞춘 채, 하는 말에 혜담은 눈만 껌벅거렸다. 이런 걸 어디서 배워? 배우는 건 뭐든 배운다 쳐도 누가 뭘 가르쳐? 그리고 내가 누구한테 이래.
“아니.”
“그럼. 이 머리로 혼자 생각한 거라고? 틱틱거리고 화내더니 속으로는 다 생각하고 있었네?”
레오. 너 좀 무섭다. 좀 놓고, 떨어져서 말하면 안 될까? 저기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저기…… 팀장님?”
“레오.”
“어, 그래. 레오. 우리 좀 놓고, 일단 나가서 이야기할까? 여기 공항이고 사람들도 많고…….”
어설프게 앞으로 뻗고 있던 손끝으로 레오의 가슴을 톡톡 건들면서 그를 진정시키려던 혜담은 어느새 그에게 손이 꽉 잡힌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레오 루이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자면서요.”
“그런데 이쪽 방향이 아니야.”
5번 게이트로 나가야 주차장이 가깝다고. 지금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잖아. 한 손으로는 캐리어 끌고 다른 손으로 제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어찌나 잘 지나가는지. 하긴 사람들 사이를 잘 지나간다기보다 다른 이들이 레오를 보고 알아서들 피하는 분위기이긴 했다.
거기에 손 잡혀서 쫄래쫄래 따라가는 자신까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땡깡 부려서 달래 주고, 상 달래서 상 준 죄밖에 더 있어? 해 달라는 거 해 줘도 이 난리고. 안 해 줘도 그 난리고 나더러 어쩌라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반쯤 뛰다시피 레오를 따라 걷던 혜담은 갑자기 그와 함께 어떤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 읍!”
레오의 손에 의해 몸이 이리저리 휘리릭 움직이고, 갑자기 등에서 느껴지는 약한 통증에 놀라는 것과 동시에 입술까지 먹혀 버린 혜담의 두 손이 급히 레오의 어깨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