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54화 (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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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를 타인으로 착각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죠?”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혜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딜 그렇게 신나게 가나 했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제게 말한 것과는 달리 잠든 혜담의 머리와 얼굴을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목소리 역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새로운 등장인물. 오너가의 자제이자 마케팅팀장. 일거수일투족이 가십이 되어 수많은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 혜담보다 어린 나이. 완벽한 배경.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어도 최상의 물건을 먼저 가지고 있을 사람. 절대 귀엽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

본능적으로 서윤은 몸을 바로 하곤 그들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저 가벼운 연애 상담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레오 루이스라면……. 순간 혜담의 고민과 어려움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현대판 신데렐라도 이런 신데렐라가 없겠네.

이거 정말 답이 안 보이는데? 너무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봤나? 둘의 연애 사실을 안 루이스 가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타나서 당장 곁에서 떠나. 라고 말해도 루이스 가라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인정할 것 같았다.

헤어지는 게 아니라 숨겨진 연인 같은 걸로 만족하라고 말하면? 머릿속에서 막장 드라마 내용이 다양하게 떠올랐다. 무엇 하나 혜담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혜담아, 다 놀았어?”

레오의 말에 혜담이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서윤은 혜담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배제되었고 지금은 혜담, 레오 둘만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 이제 집에 가자.”

불편하게 누워 있는 혜담을 바로 앉히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혜담에게 입히는 레오나 그의 수발을 받는 혜담이나 어색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혜담에겐 큰 코트를 잘 여며 입힌 레오가 잔뜩 취해 있는 혜담을 안아 들고 일어서는 것까지 지켜본 서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얼떨떨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서윤과 눈이 마주친 레오는 “내려가면 검은 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돌아가도록 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눈에 띄는 남자가 또 다른 남자를 안아 들고 나가 버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서윤은 제게로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가방을 찾아 들었다.

몰라도 되는 사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으니 오늘은 혼자 집에서 3차를 해야 할 것 같았다.

* * *

술을 먹은 다음 날 하는 자책 중 하나.

내가 또 술을 먹으면 개다. 개

“까짓거 개 하지 뭐.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데.”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났으니 지각은 확정됐고, 한 시간 지각이냐 두 시간 지각이냐 차이인 상황에 혜담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뒤집힌 속 때문에 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던 혜담이 비척거리며 침대를 벗어나자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어떻게 집에 기어들어 와서 옷은 또 어떻게 벗은 것인지. 속옷 한 장 달랑 입고 있는 비천한 자신의 몸을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헤라. 회사에서 연락 온 거 없어?”

― 네, 없습니다.

“내가 출근 안 해도 모르는 거 아냐? 오늘 레오 일정도 모르는데. 오늘 알람 몇 번이나 울렸어?”

― 오늘 지정된 알람은 없습니다.

“뭔 소리야? 네 개잖아.”

― 어제저녁에 오늘 예약된 알람을 모두 취소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윤과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넋두리를 좀 한 것 같은데, 그 뒤로는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귀소 본능이 집으로 잘 데려다준 것 같기는 한데…….

“내가?”

― 아니요.

“뭐?”

아무리 술을 처먹었어도 알람까지 취소하는 엽기적인 일을 저지른 게 믿기지 않는데, 뜬금없이 자신이 취소한 것이 아니라는 헤라의 대답에 욕실로 향하던 혜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도어락 고장 났었잖아. 나 어떻게 집에 들어왔지?

― 이해할 수 있게 질문해 주세요.

“도어락 고장 났잖아.”

― 새 도어락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비밀번호는 예전에 쓰시던 번호 그대로 XXXXXX입니다. 지문 인식도 가능한 제품이므로 지문 등록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 어제 오후 4시 32분 도어락 교체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가?”

― 이해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헤라와 대화를 나눌수록 두통이 심해진 혜담은 욕실이 아닌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일단 차가운 물부터 마시고 찬찬히 생각이라는 것 좀 해 보자.

냉장고에 죽 있으니 챙겨 먹고, 오늘부터 3일 동안은 휴가이니 푹 쉬도록 해요.

냉장고를 열려던 혜담은 자신의 눈높이에 붙어 있는 종이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몇 번을 읽어도 글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고, 냉장고를 열자 작은 플라스틱 통 여러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냉장고 문을 닫은 혜담은 붙어 있는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또다시 냉장고 문을 연 혜담은 플라스틱 용기 몇 개를 꺼내 싱크대에 올렸다. 상표 대신 깔끔한 필체로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적어 놓은 종이가 뚜껑에 붙어 있었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종이에 적힌 글씨체와 같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허락 없이 이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 준석의 필체가 아니다.

도어락을 마음대로 고치고, 자신의 휴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존재를 떠올린 혜담은 고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헤라, 어젯밤 9시부터 나한테 온 메시지랑 통화 내역 좀 말해 봐.”

― 온달 님께서 52개의 메시지를 보냈고, 32통의 전화를 걸었습니다.

온달 이 새끼,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일단 출근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이고, 일단 씻고 배를 채우고, 서윤 팀장님과 연락을 해야 해? 말아야 해? 이놈 팀장님한테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겠지?

쪼그리고 앉은 채, 머리를 부여잡고 있어 봤자 이미 일어난 일이 무마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마른세수를 한 혜담은 무릎을 짚고 느릿하게 일어났다.

깨끗하게 씻고, 준비되어 있는 죽을 데워 먹은 혜담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온달과 비서님 두 개의 연락처를 두고 머뭇거리던 혜담은 레오가 아닌 로버트에게 연락을 했고, 그에게 휴가임을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3일의 휴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준석이랑 맛집도 다니고,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대로 준석이 운동하는 곳에서 나름 운동이라는 것도 좀 깨작거려 보았다. 자도 자도 계속 오는 잠도 원 없이 잤고, 며칠 동안 레오의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도 아니라서 혜담은 오랜만에 그에게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개인 일정으로 영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그를 픽업하는 것으로 다시 일이 시작되긴 하지만 모처럼 제대로 된 휴가 같은 휴가를 보낸 혜담의 입에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서둘러 나왔으니 망정이지,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막히는 길에 하마터면 비행기 도착 시간을 놓칠 뻔한 혜담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연말은 연말이네. 나가는 사람도 많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고.”

가족 또는 연인, 친구들과 공항을 찾은 이들의 얼굴엔 모두 즐거움이 가득했다. 크리스마스라고 파티를 열어 즐기거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처음 본 것도 올해인데, 연말 여행이라니. 자신은 즐겨 보지 못한 상황과 분위기를 느낀 혜담은 한편으로 쓸쓸함을 느꼈다.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이 계실 때야 여행을 다녔다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기억보다는 남겨진 사진을 봐야만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 봐야 하나? 혼자가 익숙하기도 하고 또 혼자서 많은 것들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못 해 본 것이 더 많았다.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건 진정한 여행이 아니니까, 서윤의 조언이나 준석의 말대로 휴가를 받아서 2~3주 정도 해외를 홀로 여행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권이야 만들면 되고, 영어가 그리 서툰 것도 아니다. 통역기가 있는데 언어가 무슨 문제일까. 다 자기 마음먹기 나름인데 그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려웠다.

길게 여행을 하려면 캐리어도 큰 게 필요할 테고, 고생하러 가는 게 아니니 숙소도 좀 괜찮아야겠지? 너무 한량처럼 노는 것도 심심할 테니까 투어도 몇 개 하고. 투어하려면 유럽이 좋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데는 동남아가 좋지 않을까?

출국장 앞에 선 혜담은 머릿속으로 여행과 관련된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언제 가지? 방학 시즌은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공권과 숙박비가 많이 드니까 방학 피하고, 그럼 3월 지나야겠네?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혜담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해외 여행’ 네 글자만 검색해도 쏟아지는 정보와 사진, 영상들에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남들에겐 쉬운 일이 제게만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

그런데 레오가 나올 시간 되지 않았나?

“여행 가고 싶어요?”

태블릿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던 혜담은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으며 하는 말에 사레가 걸려 기침을 쏟아 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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