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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외모에 싹싹하고 성격도 좋은 혜담과 일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빈말은 아니었고, 선을 넘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눈치 빠르고 일 재주 있는 팀원이 있다는 건 같이 일하는 이들에겐 행운이었다.
지금도 제가 고기를 굽겠다며 집게를 들고 설치는 혜담을 보는 서윤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깔려 있었다. 나이 차이 제법 많이 나는 막냇동생 같다고나 할까.
“다 익었어요.”
“누가 될지 몰라도 우리 혜담 씨랑 사귀려면 삼대가 덕을 쌓았을 거야.”
“……그건 아닐걸요?”
자신의 앞접시에 놓아 준 고기를 먹은 서윤은 옆에 있던 술잔을 비우고 술병을 들었다. 자신과 맞춰 술을 마신 혜담이 술잔을 들기에 둘은 나란히 다시금 잔을 채웠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에이, 제가 누굴 사귀긴 뭘 사귀어요.”
“귀신을 속여.”
“다른 사람이 의심하면 이해해도 팀장님은 그럴 자격 없으신 거 아시죠?”
“이제 내 직속 팀원 아니다. 이거지? 이런 식으로 팩폭을 날리네.”
“아름다운 서윤 씨는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시는 거죠.”
“말이나 못 하면…….”
느긋하게 고기를 먹으며 반주를 하는 동안에도 겉도는 말만 하는 혜담이었지만 서윤은 재촉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꺼내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다. 아침에 퇴사하고 싶다는 건 북받쳐 오른 감정에 충동적으로 한번 질러 본 말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평소보다 빨리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아서는 확실히 혜담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반주를 곁들인 식사 후 근처 바로 자리를 옮겨서도 혜담은 혼자 하기 좋은 취미가 뭐가 있는지 얘기하거나 운동을 해야겠다는 말만 하기에 서윤은 적당한 것들을 추천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들 어쩜 저리 바쁘게 사는지 몰라, 올해도 다 갔고 며칠 뒤엔 나이만 한 살 더 먹네. 올해 한 것도 없는데. 내년엔 나도 연애나 해 볼까?”
“연애 좋죠.”
“괜찮은 사람 있어? 이 누나 프리하다. 연상 연하 다 상관없어. 알파, 오메가도 상관없고.”
“연하는 좀…….”
“나와 나이 차 많이 나는 연상이면 내가 슬프지 않겠니?”
“연하는 뭐…… 맨날 이겨 먹다가 자기 아쉬울 때만 어린 척하는데요. 뭘.”
“귀엽겠네.”
“……그 덩치를 보면 누구도 귀엽다고는 생각하지 못할걸요.”
황금빛 액체가 담긴 양주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혜담이 대답하자 서윤의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이 나오려나.
내 연애는 힘들어도 남의 연애 이야기 듣는 건 즐겁잖아. 가까이에선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인생처럼 말이야.
하지만 혜담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서윤의 머리 위엔 물음표만 가득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 전에 만났고 같이 밤까지 보냈는데 다시 만났을 때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
“……걘 그럴 수 있어요. 어쨌거나 그건 과거고 지난 일이니까…….”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결국은 썸을 타게 됐다는 거네. 마케팅팀에 어떤 직원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서윤은 간단한 호응만 해 주며 혜담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만난 사람은 마케팅팀 직원인 것 같고, 매일 얼굴 보고 얽히다 보니 불편해서 퇴사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서윤은 조각조각 나오는 혜담의 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보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혜담 씨 말대로 과거는 과거고. 혜담 씨가 말 안 하면 끝! 지금 서로 좋은 감정이면 사귀면 되지. 사귄다고 다 결혼하고 해피엔딩인 줄 알아?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거라고. 오늘 행복하고 오늘 즐거우면 돼! 지금 말하는 거 보니까 이미 사귀는 사이 같은데?”
“또 남겨지면 너무 아파서요. 지금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무엇 하나 사 주고 싶어도 내가 사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이미 다 가지고 있거든요. 든든한 백도 되어 주지 못하고, 나중엔 발목만 잡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래요.”
“그러니까 상대가 너보다 어리고, 돈도 많고, 능력도 있고, 평생 든든한 백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모님도 다 계시고, 집안도 좋고, 인기도 많다는 거네?”
잔에 든 양주를 홀랑 비우더니 제가 움직이기도 전에 알아서 잔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이는 혜담의 모습에 서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혜담 씨 좋다고 하고?”
많이 느리고, 머뭇거림이 가득하긴 했지만 혜담이 다시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지금 노처녀 약 올려? 당연히 감사합니다. 완전 개꿀이네 하고 덥썩 받아먹어야지. 뭘 고민해! 혜담 씨 말대로 끝이 안 좋다고 쳐. 이거 평생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잖아. 나 예전에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랑도 연애해 봤다고. 이런 무용담이라도 되잖아!”
“그런데요. 팀장님…… 저는요. 처음이거든요. 걔랑 하는 게 다 처음이라서 다른 사람은 못 만날 거 같아요. 무뎌지고 잊는 데 몇 년이나 걸렸는데, 다시 보니까 그건 잊은 것도 무뎌진 것도 아니더라고요. 다 기억나.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다 기억나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기억할 것들이 더 많아서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도록 못 잊으면 어떡해요?”
웅얼웅얼 늘어놓던 말꼬리가 늘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서윤은 지금껏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해. 그리고 혜담 씨. 내가 봤을 때 이미 늦었어. 발 빼기엔 혜담 씨 감정 절대 가볍지 않거든.”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똥고집인지 입술 꾹 다물고 고개를 가로젓는 답답한 모습에 서윤은 혀를 차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대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혜담의 휴대전화엔 ‘온달’이라는 사람이 계속해서 연락을 해 오고 있었다.
알람도, 진동도 해 놓지 않아 끊임없이 불빛만 반짝이는 걸 혜담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두어 번 해 보고 연락이 되지 않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메시지에 전화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혜담이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타인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도 없기에 서윤은 어느새 비어 버린 혜담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빨리 떠나요. 부모님도 그랬고, 절 힘들게 키워 주신 할머니도……. 이제 좀 자리 잡고 할머니께 잘해 드리려고 했는데. 저는요. 부모님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작별 인사조차 못 했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하얀 천을 덮고 누워 있는 모습 같은 거,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있는 이 불행이 그 사람한테도 가면 어떡해요?”
본의 아니게 혜담의 아픈 가정사까지 듣게 된 서윤은 더는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혜담이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건 절대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좋아하는데 헤어질까 봐 무서워서 시작하지 못하겠어요, 같은 귀여운 연애에 훈수를 둘 순 있지만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아픔은 함부로 말을 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취한 것 같던 혜담이 긴 한숨과 함께 지금도 열심히 빛을 반짝이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 바보 멍청아. 전화하지 마!”
아…… 저기. 혜담 씨?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른 혜담이 소파로 푹 고꾸라짐과 동시에 “이혜담!”이라는 소리가 휴대전화를 통해서 들려왔다.
― 어디야? 전화도 안 받고. 이 못난이가. 대답 안 해?
잠이 든 건지 눈을 꼭 감고 있는 혜담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전화 너머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리기에 난처해진 건 서윤이었다. 이걸 그냥 둘 수도 없고. 상대는 적당히 혼자 떠들다가 끊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남자였어? 이건 생각지 못한 건데…….
끼어들고 싶지 않지만 취해서 뻗어 버린 혜담을 혼자 수습할 엄두도 나지 않기에 서윤은 혜담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네, 이혜담 씨 전화입니다.”
― 누구십니까?
“혜담 씨와 동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지금 갈 테니, 그대로 두세요. 어디에 있습니까?
사무적인 어조의 날이 잔뜩 선 상대의 목소리에 서윤은 잠든 혜담을 바라보았다.
“누구신지도 모르는 분께 지금 위치를 말씀해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캐묻지 않고 바로 통화를 끝내기에 무색해진 서윤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면서 왜 그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날을 세운 거야? 혜담이 말하던 상대가 아닌가?
서윤 역시 취한 상태였기에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취한 혜담을 수습해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저 역시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혜담 씨, 자? 내일 출근하려면 그만 가야지.”
혜담이 푹 쓰러져 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긴 서윤은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는 혜담의 어깨를 손끝으로 살짝 흔들었다.
“눼…….”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던지 작게 돌아오는 대답에 서윤은 직원을 불러 계산부터 끝냈다.
“혜담 씨. 집 주소 말해 봐. 콜 부르려고.”
“……우리…… 지븐…….”
“응? 어디?”
“제가 데려가죠.”
주소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에 혜담 쪽으로 몸을 숙였던 서윤은 한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