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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52화 (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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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레오와 제자리걸음 같은 대화 후, 결국 입술도 내주고, 커피 대신 그가 권하는 뱅쇼까지 마시고 나서야 출근을 할 수 있었던 혜담은 이미 녹초 상태였다.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듯 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의 시선이 절로 블라인드가 쳐진 팀장실을 향했다.

저 꼴통과 계속 일을 해야 해? 말아? 매일 이렇게 만나서 얼굴을 보다 보면 그의 꾐에 홀랑 넘어갈 것 같다. 강약 조절은 어찌나 잘하는지, 속을 휙 뒤집어 놓았다가도 저를 어르고 달래는 말을 듣는 순간 격해진 감정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안아 달라는 말에 안아 주고, 뽀뽀해 달라는 말에 제가 입술을 먼저 갖다 댄 것까지 생각한 혜담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 버렸다.

레오와의 감정적인 부분이 어떻게 되든 일단 일을 그만두면 자연스럽게 매일 보지 않아도 되고, 매번 그에게 휘둘리는 일을 그만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생각이 닿은 혜담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혜담 씨, 오랜만이네요. 크리스마스 연휴 잘 보냈어요? 팀장님. 파티에 가셨다면서요. 어땠어요?”

늘 그렇듯 활발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온 유진의 말에 혜담은 “안녕하세요.”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직 근무 시간 아닌데 벌써 일하시는 거예요?”

“아, 스케줄 변경된 게 있어서요. 근무 시간을 떠나서 할 일은 확실히 해야죠. 유진 씨도 연휴 잘 보내셨어요?”

“크리스마스라고 거리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밀려다녔잖아요. 그래도 남친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곳도 가고 재밌었죠. 팀장님 파티 어땠어요?”

“꿈과 환상의 세계던데요. 밤 12시 정각에 불꽃놀이도 했으니까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손에는 술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클래식 음악도 흐르고요.”

“헙. 진짜요? 마케팅팀을 지원할 게 아니라 비서팀을 지원했어야 하나. 대단한 사람들도 엄청 왔어요?”

“연예인들도 있고, 유럽 귀족분들도 오시고 그랬네요.”

“사진 없어요?”

“……없습니다.”

유진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혜담은 사내 메신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서윤이 접속하자마자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시간 되시면 저랑 티타임 좀 해주세요.

응? 우리 잘생긴 혜담 씨?

네! 아름다우신 서윤씨 제발...

8층 휴게실?

넵! 지금 갑니다.

서윤과 약속이 잡히자마자 혜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케팅실을 박차고 나갔다. 다들 출근하는 바쁜 시각. 휴게실은 한산했고,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서윤이 손을 흔들자 혜담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으로 갔다.

“겨우 몇 주 못 봤는데, 우리 잘생긴 혜담 씨. 더 잘생겨졌네? 무슨 일 있었어요?”

“팀장님~”

평소에 애교 있는 스타일도 아니고, 말꼬리를 늘이는 버릇도 없는데. 서윤을 보는 순간 절로 말꼬리가 늘어졌다.

“왜? 왜? 무슨 일 있어요?”

“나 퇴사할까 봐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혜담의 입에서 퇴사라는 단어가 튀어 나갔다.

“응? 왜? 회장 아드님이 괴롭혀? 우리 팀으로 다시 올래요? 우린 혜담 씨 없어서 너무 외로운데.”

친한 누나처럼 반겨 주고 공감해 주고, 다독거리며 이유를 묻는 그녀의 목소리와 행동만으로도 안도감에 휩싸인 혜담은 그녀 앞도 아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퇴직금 정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일한 지 꽤 됐잖아. 그럼 퇴직금도 제법 될 건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인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줄 테니 왜 퇴직까지 생각하게 됐는지 그것부터 말해 봐요.”

“그게 있잖아요~”

그녀의 재촉에 급하게 입을 열었던 혜담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서윤을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다정하게 “괜찮아.”라고 말하며 손을 꼭 잡아 주는 그 온기에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게 무슨 울 일이라고. 울 일이 아닌데,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공감해 주는 이에 대한 고마움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속을 헤집어 댔다.

“힘들었어?”

막상 말을 꺼내지 못하자 손을 토닥이는 그녀의 질문에 혜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진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혜담 씨, 휴가 얼마나 남았지? 이번에 재계약하면서 휴가 늘었다고 하지 않았어? 너무 힘들면 잠시 쉬는 것도 괜찮아. 마음 같아서는 누구나 퇴직하고 싶지만 우리는 성인이고 생계를 생각하면 그게 답이 쉽게 안 나오잖아. 퇴직서 내기 전에 휴가 쓰고 쉬면서 찬찬히 생각해 보고, 이직 준비도 하고 그러는 게 맞지 않을까?”

가장 이성적이면서 정답을 말해 주는 서윤의 눈을 바라보던 혜담은 역시나 이번에도 고개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 언제나 혜담 씨 편인 거 알지?”

“…….”

“회사에서 쉽게 못 하는 말이면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할래요? 결혼 안 한 노처녀는 남는 게 시간이잖아. 내 시간 뺏는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술친구라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혜담 씨 생각은?”

얼른 “네! 그럴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멘 혜담은 애꿎은 입술만 물고 있었다.

“우리 혜담 씨 이래서 내 밑에 딱 끼고 있으려고 했는데, 속상한 일 있으면 미리미리 연락해서 말하고 하지 그랬어요. 깊은 이야기 지금 다 들어주고 싶지만, 이제 근무 시간이라서 급한 일이면 점심 같이 먹을까?”

“아뇨, 팀장님 저녁 시간 내주시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딘데요.”

“속마음도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술술 나오고 들어주는 사람도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고 그래.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힘들어하지도 말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그래야 저녁 술이 더 맛있을 거야.”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가늘고 고운 서윤의 손을 보던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신보다 손도 작으면서, 그러곤 이내 그녀의 손을 자신의 두 손 사이에 꼭 잡았다.

“고마워요.”

“알겠어. 커피 한잔 들고 올라갈래요? 커피 사 올 시간은 될 것 같은데.”

둘만 있던 휴게실을 나온 혜담은 사이좋게 서윤과 함께 근처 카페로 향했다.

“마케팅 팀장님. 크리스마스 파티도 엄청나게 했다면서?”

“……그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니까. 거기다 요즘 우리 회사에서 제일 핫한 셀럽이잖아. 젠틀하고 멋지고, 전에 보니 목소리도 좋으시던데. 회사 일도 하지만 대외적으로 나가는 일도 많다며.”

“그렇죠.”

“개인 비서 혜담 씨뿐이지?”

“아, 저는 회사랑 관련된 것만 맡고, 개인적인 일은 원래부터 해 주시던 분이 계신데 그분이 계속하고 계세요. 그래서 팀장님보다 그분이랑 이야기하는 일이 더 많고요.”

“뭐야. 그럼. 일이 힘든 건 아니고, 혹시 마케팅팀이랑 문제야?”

“……여기 회사 앞인데요.”

“아! 맞다. 맞다. 나이 들어 봐 혜담 씨도 이렇게 된다?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혜담 씨 뭐 마실래?”

카페에 들어선 혜담은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아메리카노요.”

“커피 안 마시잖아. 이제 마시는 거야?”

“마셔 보니 괜찮더라고요. 커피 제가 살게요. 제가 팀장님 부른 거잖아요.”

서윤과 나란히 서서 수다를 떠는 사이 울렁거리던 가슴이 점차 진정되었다. 아침부터 사람 흔들리게 하고, 심장을 몇 번이나 주물럭거린 그 나쁜 놈 대신 이렇게 편안한 사람과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중에 더 맛있는 거 사 준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팀장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면 뭐든지요.”

“이래서 내가 우리 잘생긴 혜담 씨를 미워할 수 없다니까.”

“사는 김에 스텔라 것도 사요. 스텔라도 잘 지내죠?”

“요즘 몸 무거워서 힘들대. 연말까지만 일하고 내년부터 육아휴직이니까, 우리 팀에 나만 남는다니까. 다른 팀에서 두 명 오기로 했는데 지금이라도 혜담 씨가 온다고 하면 난 언제든지 환영.”

“진짜 가고 싶다.”

서윤과의 대화와 같이 마신 커피의 힘으로 하루를 버틴 혜담은 퇴근 시각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회사를 벗어났다. 늦지 않게 서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으로 향하는 그의 입에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예전엔 서윤, 스텔라와 함께 퇴근 후에 맛집도 다니고 했는데, 지난 몇 주가 제겐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 여가 생활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자신이 레오에게 휘둘렸는지를 떠올린 혜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레오는 레오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지. 그의 등장만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던 제 삶을 되돌릴 시간이었다.

그와 어떤 관계가 되든 평소처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심야 영화도 보고, 취미 생활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뭐가 좋을까? 준석에게 가서 운동을 배우든지, 공부를 좀 더 하든지. 뭐든 도전하고 진취적인 인간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음식점으로 들어선 혜담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과 행복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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