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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켜던 혜담은 타인의 숨결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대로 몸을 멈췄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어둠이 가득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베고 있는 딱딱한 것은 베개가 아님이 분명했고, 자신의 허리를 누르고 있는 묵직한 것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에 연봉을 걸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운 커피 향을 맡으며 혜담은 몸에 힘을 가득 줬다 빼며 멈췄던 기지개를 마저 켰다. 씻고 나와 홀로 침대에 누운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떻게 레오와 한 침대에 있는지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더니, 몸의 반절은 붙어 있네.
놀랍지 않은 사실을 파악한 후 침대를 벗어나는 대신 혜담은 이 시간을 고스란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자도 자도 피곤했고, 5분 간격으로 맞춰 놓은 알람을 여러 번 끄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던 지난 며칠과 달리 푹 잘 자고 일어난 개운한 기분에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조금 부은 것 같은 손을 풀고, 아직 남아 있는 잠기운에 작게 하품도 했다. 자신보다 조금 느린 레오의 숨소리에 맞춰 같이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내뱉던 혜담은 모로 누워 있는 자신을 더 꼭 끌어안는 상대의 행동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등과 그의 가슴이 빈틈없이 맞닿고, 정수리에 레오의 턱이 닿았다.
“잘 잤어요?”
꽉 잠긴 무거운 목소리가 들리고,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이 움직이더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잠든 척하기엔 늦은 것 같아 혜담은 작은 소리를 냈다.
“좋겠다. 잠도 잘 자고, 난 누구 때문에 제대로 못 잤는데.”
슬금슬금 허리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이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해 혜담은 슬쩍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기분 좋다.”
대답하지 않아도 레오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에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레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자신의 배를 쓱 쓰다듬자 그의 검지와 중지를 잡고는 슬쩍 잡아당겼다.
“왜? 어디 가려고.”
“일어나야지.”
서로가 없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은 연인도 아니고 한 침대를 쓰는 것이 당연한 부부도 아닌 사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우리가 이런 친밀한 스킨십과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싫은데? 안 놔줄 건데?”
손가락을 잡아당겼더니 멀어지던 레오의 손이 다시금 혜담의 배에 꼭 붙어 버렸다.
“팀장님.”
“……또 팀장님이야? 이름 불러요.”
“레오 루이스.”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잘 아는 혜담이었기에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의 의지였다.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출 시간이었다. 그래도 다정하게 레오라는 이름만 부르고 싶지는 않아 일부러 성까지 붙여서 불렀다.
“정 없게 왜 성까지 붙여서 불러요. 그냥 레오. 이렇게 부르면 되잖아.”
거참 아침부터 까다로우시네요.
“다시 호칭으로 부를까요?”
“알겠어요. 그런데 왜 불렀어요?”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있던 레오가 몸을 들썩이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자 혜담은 한 손을 천천히 들었다. 허공에서 멈칫거리고 손끝이 살짝 굽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던 혜담의 손이 레오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건들었다.
“아침이니까…….”
부드러운 레오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혜담은 말끝을 흐렸다. 몽글몽글하고 따뜻하며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더 침대에서 뭉그적거려서는 안 되는 것도 알고, 제가 먼저 선을 긋고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는데 생각과 다르게 행동은 굼떴다.
“출근해야죠.”
“네.”
둘의 의견은 맞았지만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혜담은 느릿하게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레오는 혜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얌전히 있었다.
“이러다 지각합니다.”
언행일치가 전혀 되지 않는 혜담의 말에 레오가 작게 웃었다. 작은 웃음으로 끝날 것 같던 레오의 웃음이 점차 커지고 꼭 붙어 있는 혜담의 몸까지 그의 큰 웃음에 같이 들썩였다.
“왜!”
자신을 세게 꾹 끌어안았다가 놓아주고는 편하게 누워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계속 웃기만 하는 그의 행동에 무안해진 혜담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하.
어두운 방 안에 레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왜, 왜 웃는데!”
레오의 웃음에 전염이라도 됐는지 큰 소리로 그를 다그치는 혜담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올라갔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
“아, 진짜 어떡하냐. 우리 못난이 너무 귀여워서.”
대답은 해 주지 않고 웃기만 웃던 레오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혜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잘 자고 일어나서 이건 또 무슨 망언이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웃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혜담은 이불을 확 젖히고는 두 발을 침대 아래로 내렸다.
내가 이 방을 나가야 끝나지.
하지만 혜담의 생각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다. 혜담이 일어나는 것보다 레오의 팔이 혜담의 허리를 끌어안는 것이 더 빨랐다.
“놔요.”
“그냥 출근하지 말자. 월차 쓰면 되지.”
“그건 팀장님 사정이고, 전 월차 쓸 생각 없습니다.”
“내가 출근 안 하면 너도 할 일 없잖아.”
“아니요. 많은데요.”
두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레오의 팔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던 혜담은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군가가 왔다고? 지금 들어온다고? 다급해진 혜담의 손길이 거칠어졌지만, 도저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혜담은 레오에게 허리를 꼭 붙들린 채 로버트와 대면해야 했다.
“우리 일어났어요.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밖에 있어요.”
로버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혜담은 “식사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말에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팀장님.”
“네.”
“장난 그만하고 놓으시죠.”
“그럼. 뽀뽀 한 번만 해 줘요.”
“……때려도 됩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고.”
계속해서 뽀뽀해 달라고 조르면 진짜 해 줘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레오는 때린다는 말에 쉽게 허리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일어날 생각은 없는지 침대에 편하게 누운 채 있는 그를 내려다본 혜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버트가 이 모습을 봤다고. 들켰다고. 레오의 최측근이자 그의 부모님과도 친분이 깊으신 분이 이걸 봤네.
레오와 말을 더 섞어 봤자 머리만 더 아프다는 결론을 내린 혜담은 어느새 은은하게 켜져 있는 간접조명에 의지한 채 비척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고민이 있거나 답답할 때 한겨울에도 차가운 물로 샤워하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 혜담은 따뜻한 물로 후다닥 씻고 나왔다. 그리고 어제처럼 세면대 옆에 놓여 있는 옷을 챙겨 입다 멈칫했다.
어젯밤 그가 준 옷은 제게 맞지 않는 그의 옷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입은 옷은 제게 꼭 맞는 정장이었다.
하아.
미적거리는 게 아니었는데,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엔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혜담은 홀로 작게 기합을 넣고는 거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 제가 하겠습니다.”
레오 역시 출근 준비를 하는지 보이지는 않고, 부엌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로버트를 본 혜담은 큰 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로버트 씨가 빵은 꺼냈고, 커피는 내리는 중이고 그러면 과일과 잼만 꺼내면 되나? 빠르게 상황을 스캔한 혜담은 냉장고 앞으로 갔다.
“아닙니다, 제가 하죠.”
“아뇨, 제 일이기도 한걸요. 어제 팀장님 오후 스케줄 바뀐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일정이 있을까요?”
쭈뼛거리거나 변명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아 혜담은 가장 무난한 일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내 스케줄부터 확인하고…….”
로버트의 말에 혜담은 게스트룸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태블릿을 꺼내 레오의 스케줄 표를 확인하며 로버트에게로 가던 혜담은 갑자기 자신을 홱 낚아채는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오늘 회의가 두 개나 있네요.”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어깨에 척 하니 턱을 올린 채, 제가 보고 있던 태블릿을 확인한 레오의 말에 혜담은 허리를 곧게 펴며 어깨를 털었다.
“회의 시간은 어떻게 되죠?”
자신이 모시는 상사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인지 로버트는 편안한 표정으로 오븐에서 빵을 꺼냈다.
“둘 다 오후.”
놓기 전에 세게 끌어안는 것이 버릇인지 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끌어안았다 놓아준 레오가 대신 대답하자 혜담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회의는 오전으로 변경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스케줄 조정이 끝나고 레오와 일정 거리를 만든 혜담은 스케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식사하실까요?”
회의 두 개 옆에 시간 변경이라는 메모를 한 후, 태블릿을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혜담은 로버트의 말에 얼른 커피포트 앞에 섰다. 그가 꺼낸 빵을 접시에 옮기고 있으니, 얼른 음료 준비하고 간단히 먹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오지 마. 오지 마. 거기 아일랜드 테이블 너머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혜담은 커피 두 잔을 내려서 돌아섰다.
“혜담 씨, 넥타이 좀 봐 줄래요?”
씨바…… 지금까지 넥타이 누가 매 줬냐. 싱긋 웃고 있는 레오와 눈이 마주친 혜담은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담은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