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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이사하죠. 이 집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원하는 집을 말해 봐요. 전에 파티했던 곳? 회사에서 좀 멀긴 하지만 혜담 씨가 원하면 뭐…….”
대리기사를 보내고 그의 집 앞에 선 혜담은 이사에 꽂혔는지 집요하게 그 부분을 확인하는 레오는 쳐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사고 자시고 피곤해 죽겠다고.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몸이 나른한 것인지, 그러지 않으려 해도 레오의 말장난 같은 대화에 얽히다 보면 피로감은 두세 배 늘어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 내가 원하는 건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이야.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얼른 문이나 열어.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입으로는 헛소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얌전히 문을 열고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는 그의 행동에 마다하지 않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과 몇 주 전 매일 아침 드나들던 공간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훅하고 느껴지는 짙은 커피 향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제 손에 빵과 음료가 없었고, 시간이 이름 아침이 아닌 늦은 밤이라는 것이었다.
몇 걸음 더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그가 자신을 따라 걷는 소리가 이어졌다.
“티, 음…… 레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계속 이어지던 레오의 말소리가 뚝 끊기고 침묵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침묵을 참기 어려웠는지 레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불렀어요?”
“피곤한데, 게스트룸에서 쉬면 될까요?”
안쪽에 있는 그의 침실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기본적인 구조를 알고 있기에 혜담은 게스트룸이 있는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말했다.
“내 방에서 쉬어요.”
이럴 줄 알았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손도 안 댄다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꺼내는 그의 말에 혜담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대답은 하지 않고 쳐다만 보았더니 레오가 결백을 주장하려는 듯 슬쩍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거기가 더 조용하고, 쉬기에 좋아요.”
변명임이 분명한 말을 듣자마자 혜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든 누워서 잘 수만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대화가 끊기고 찾아드는 적막함에 레오의 표정을 살피던 혜담은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자신의 진심이 닿은 것인지 더는 말을 걸지도 따라오지도 않는 것을 느끼며 혜담은 제일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집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그의 페로몬 향에 그가 곁에 있지 않은데도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진짜 되는 일 없다. 어디 가서 사주라도 봐야 하나? 나 삼재 아냐?”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믿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사주팔자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혜담은 방과 이어져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말이 게스트룸이지 이 방과 욕실을 합친 크기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보다 넓었다.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어 옆에 잘 정리해 둔 혜담은 느린 걸음으로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결 속에 한참을 서 있다 씻고 나온 혜담은 세면대 옆에 놓여 있는 속옷과 잠옷을 보았다.
그새 들어왔다 나간 건가? 대충 샤워가운 걸쳐 입고 자도 되는데.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레오가 둔 것이 확실한 옷을 입은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군대까지 갔다 온 대한의 건아인데, 레오와 있을 때면 제가 참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옷을 입은 지금 손끝만 보이는 상의라든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짓단이 그와 자신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대충 둘둘 옷 소매와 바짓단을 대충 둘둘 말아 올리고,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침실로 돌아온 혜담은 망설임 없이 크고 넓은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푹신한 매트에 몸이 파묻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큰 이불이 묵직하게 몸을 눌러 주었다.
레오의 집. 그가 입는 잠옷. 그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공간. 어색하고 불편한 타인의 침대에 누운 혜담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평소처럼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뒤척거리는 것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좇을 여유조차 없었다.
고요한 게스트룸에 들어선 레오는 세상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혜담을 내려다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커튼도 치지 않았는데도 잘 잔다. 밖에서 들어오는 옅은 빛에 의지한 채 레오는 한참을 혜담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날도 세우지 않고, 나른한 모습의 혜담이 자신의 집으로 순순히 따라와 줄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친구의 집으로 간다고 우긴다면 자신이 주로 이용하는 호텔 룸으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를 하고 영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혜담은 지금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제가 내어 준 자신의 잠옷을 입고, 제가 있는데도 숙면을 취하는 모습에 절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그에게 한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 참을성을 가지고 그가 제게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그가 원하는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기엔 제 성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을 보는 것이 불편할까 봐 루나와 하루를 보내도록 그의 일정을 조절해 놓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간 것도 자신이었다.
일정이 꼬이든, 일이 넘쳐나든 그런 일들은 모두 미뤄 놓고 온종일 그와 붙어 지냈다. 자신의 물건들을 산다는 핑계로 그의 취향을 알아보려 했고,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모조리 사들였다.
그를 향한 자신의 감각들은 혜담의 작은 손짓, 미묘하게 변하는 숨결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적당히 예의를 갖춰 거리를 두고 지내다간 영영 그와의 틈을 좁힐 수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그를 대했다. 한마디 한마디 꺼내 놓을 때마다 다급한 몸짓으로 제 입을 막으려 했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던 혜담이었다.
매번 도망가려는 그와 이 정도로 친해진 것만 해도 놀랍다고 해야 하나? 눈으로만 지켜보다 자리를 피해 주려 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레오의 손끝이 혜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올곧은 눈썹을 문지르자 눈썹이 꿈틀거렸고, 코끝을 건들자 슬쩍 고개를 돌려 이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괜히 건드렸나? 느긋하게 감상하던 혜담의 얼굴이 반쯤 가려지자 아쉬움에 레오의 손끝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진짜 손끝도 안 대려고 했는데, 이건 절대 내 잘못이 아니라. 네가 너무 못생긴 탓이야. 어떻게 이렇게 못생길 수가 있어.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게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못난이 혜담이 책임.”
언제 머뭇거리고 망설였냐는 듯 싱긋 웃으며 모든 것을 혜담의 탓으로 돌린 레오는 목 끝까지 꼭꼭 여며 덮고 있는 그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춰 냈다. 자신의 잠옷을 입고 잠든 혜담을 안아 들고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 그를 끌어안고 누운 레오의 입에서 소리를 죽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지만, 그래도 너무 태평하게 잠든 거 아닌가? 그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되고 나름의 기대도 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혜담이 먼저 자신의 침실로 찾아와 주는 망상까지 했던 이의 끝은 처참했다.
척하니 몸 위에 팔과 다리를 걸쳐 놓고, 잠든 혜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품 안에 그를 안고 있으면서도 초조하고 불안한 자신과 다르게 도대체 얼마나 행복한 꿈을 꾸기에 보쌈하듯 데리고 와도 잘 자는지.
미치도록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빵 냄새가 이렇게나 야속한 적은 처음이었다.
“자요?”
낮게 웅얼거리며 레오는 혜담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진짜 자냐구요.”
혜담의 어깨에 팔을 둘러 더 꼭 끌어안으며 투정을 부려도 돌아오는 건 잠을 깨우지 말라는 듯 뒤척거리는 미약한 몸짓이었다.
“오늘 내가 무노동 고임금도 제안하고, 같이 살자고도 말했는데, 잠이 와요? 다 알아들으면서 모른 척하면 다냐고요. 그래놓고 내 품에서 이렇게 편히 자는 건 또 뭐야.”
투덜거리던 레오는 갑자기 자신의 입을 턱 막는 손짓에 흠칫 몸을 굳혔다.
“온달, 조용히 좀 해.”
꽉 잠긴 목소리로 닥치라는 말을 곱게 풀어서 말한 혜담이 작게 하품을 하는 동안 레오는 혹여나 그를 깨울까 봐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품을 하고 안겨 있는 게 불편했는지 뒤척거리는 그의 어깨를 슬그머니 놓아주자 방금까지 자신의 몸에 반쯤 걸쳐져 있던 그의 몸이 사라졌다.
여전히 자신의 팔을 베고 있긴 하지만 저를 등지고 모로 눕더니 이불을 둘둘 말아 척하니 다리 사이에 낀 혜담의 숨결이 차분히 가라앉고서야 레오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방금까지 혜담이 안겨 있던 품이 허전해 레오는 몸을 틀어 그를 뒤에서 느슨하게 끌어안았다. 가는 혜담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잘 자요.”
나지막한 레오의 굿나잇 인사가 혜담에게 온전히 전해졌을지 허공에서 흩어지는 빈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소한 빵 내음을 솔솔 풍기는 짝을 끌어안은 레오의 숨결이 혜담의 숨결과 섞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