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48화 (48/86)

48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던 혜담은 자신을 따라 내리는 레오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그와의 거리를 만들자 다시금 따라오는 그의 모습에 “왜 따라와요?”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가려고.”

“집 앞인데요.”

“알아.”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 굳이 따라오려는 그를 바라보는 혜담의 눈빛은 그리 곱지 않았다.

“기사님 기다리시잖아요.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요.”

“이렇게 실랑이하는 사이에 같이 집으로 올라가면 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슬그머니 다가오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은 고개를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앓느니 죽지. 레오가 이상한 것을 우기면 그걸 이겨 낼 재량이 없는 혜담은 집 현관문 앞에 서서 다시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집 앞까지 왔잖아. 가.

입은 열지 않았지만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으로 뜻을 전한 혜담은 얼른 문이나 열라는 뜻을 담은 레오의 턱짓에 빠르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

여섯 자리의 숫자를 누르고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려야 할 문에선 알 수 없는 경고음이 들렸다.

하.

짧게 한숨을 쉰 혜담은 익숙한 숫자를 다시금 눌렀다.

띠띠띠.

다시 번호를 누르는 혜담의 손길이 처음보다 느려졌다. 하나하나 또박또박 누르고,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부드럽게 열려 할 문에선 경고음만이 돌아왔다.

“뭐지?”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혜담의 손끝이 다시금 움직였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침에 문이 잠기지 않아 실랑이했던 것을 떠올린 혜담은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잠기는 것만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도 고장 난 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레오의 손이 움직였고, 그 사이 집 번호를 외운 것인지 레오가 정확히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고장 난 문은 한결같은 경고음만 낼 뿐이었다.

문이 안 열려? 그럼. 헤라라도 불러 보자. 집 전체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니 방법을 알지 않을까.

쾅!

“헤라.”

문을 발로 찬 혜담은 문에 딱 붙어선 채, 헤라를 불렀다.

― 네.

“헤라, 문 열어 줘!”

문 너머로 작게 헤라의 소리가 들리자 혜담은 문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 알 수 없는 문제로 현재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뭐? 야! 고쳐. 너 그러라고 내가 정기 결제한 거야.”

―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니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 도어락 수리 업체에 연락할까요?

“문을 열라고!”

― 알 수 없는 문제로 도어락이 고장 난 상태입니다.

문에 붙어선 채, 헤라와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나누던 혜담은 뒤에서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천천히 뒤돌아섰다.

“웃지 마시죠.”

“가요.”

“어딜요.”

“우리 집.”

“제가요?”

“네, 혜담 씨. 가요.”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낀 채로 턱을 만지는 레오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침에 고장 난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만 않았어도 이놈이 무슨 수를 썼을 거라고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괜찮습니다. 준석이 집에 가면 돼요.”

현관문에 기대선 혜담이 손끝으로 문을 톡톡 두드리며 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레오는 여전히 턱을 만지면서 눈썹을 슬쩍 올리는 것으로 모든 의사를 표현했다.

“근처에 하룻밤 적당히 묵을 만한 숙소도 있고요.”

이번엔 레오의 고개가 아래위로 조금 움직였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갈래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 하시죠.”

“아, 들켰네.”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담은 문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이러니 하룻밤만 신세 지겠습니다.”

“평생도 괜찮아요.”

마음이 어떻고 기분이 어떻고 제 감정 하나하나 다 따지기엔 너무 머리가 복잡했다. 딱히 한 일도 없는데 한없이 가라앉는 몸이 갈구하는 편안한 휴식을 떠올린 혜담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피곤해요?”

“괜찮습니다.”

“이리 와요. 안아 줄 테니까.”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제멋대로 말하고 저를 끌어안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마스 그날 이후, 오늘 처음 만났건만 그의 이상함이 두어 배는 더 증폭된 것 같았다.

제게 마음이 있는 것같이 행동하면서도 나름 예의를 차리거나 거리를 두는 것 같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종일 제게 하는 말의 폭격에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피곤하고 지치는 건 맞다. 그가 그런 제 상태를 어떻게 이렇게 귀신같이 알아채고 처신하는지 그 모든 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안건을 입에 올렸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또 들을 것 같은 혜담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봉제 인형을 안는 듯 저를 꼭 끌어안은 레오가 등을 토닥이자 살짝 굳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 손길에 이 체온에 이 기분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곁에만 있으면 단단히 둘렀던 방어 기제가 모두 허망하게 해제되어 버렸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밀어내려는 이유조차 모호해졌다. 자신과 분명히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던 것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레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만났을 때, 저를 보던 낯선 시선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피곤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것도 모를까 봐요?”

“아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혜담 씨도 알잖아요. 내 기분이 어떤지, 어떤 상태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지자 혜담은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 둘 사이의 거리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사람 헷갈리는 짓만 하는데, 지금까지 모호했다면 오늘 유독 적극적인 것 같지만 레오의 속마음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앞서 걸은 혜담은 뒷좌석 문을 열고, 그가 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이런 귀여운 짓 그만하고, 어서 차에 타요.”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온 레오의 손이 차 문을 잡고 있던 혜담의 손을 감싸 쥐더니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졸지에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에 오르게 된 혜담은 제 옆자리에 타는 그를 등지고 의자에 편하게 기대 누웠다.

“이사할래요?”

자신의 집에서 그의 집까지 가는 길. 내내 조용하던 레오가 꺼낸 말에 혜담은 작은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아 버렸다. 불빛으로 화려한 거리를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못 들은 척, 잠든 척하는 것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해서도 빈틈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면서도 오늘따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것 때문에 그를 더 멀리하려고 했던 것도 있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지금까지는 일하는 중간중간 그가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을 그럭저럭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장단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뜬금없이 이사를 하라고? 차에, 옷에, 이번엔 집도 주게? 하긴 조금 전 무노동 고임금을 말하던 것까지 떠오르자 혜담은 눈을 더 꼭 감았다.

“아니면 같이 살래요?”

마음대로 떠드세요. 난 지금 숙면을 취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이번 주말에 부동산업자랑 집 둘러보기로 약속도 해 놨어. 네가 뭐라고 하든 내 인생은 내 인생대로 나름 잘 굴러가고 있단다.

“집에 남는 방도 많고, 저랑 같이 움직이는 게 일하는 데도 편하잖아요.”

자는 사람 상대로 헛소리하지 말고, 너도 쉬기나 해. 그리고 같이 움직이면 퍽이나 편하겠다. 24시간 붙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하려고?

“뭐 하나 쉽게 대답해 주는 게 없다니까.”

응. 너 지금 벽 보고 이야기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대답 못 들어. 혼자 떠들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대화를 끝내는 것 같은 말을 하기에 혜담은 꼭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다. 빠르게 달리는 중이라 바깥의 불빛들이 번져 보였다.

“이사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팀장님.”

이대로 뒀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 갔는데 모든 짐이 사라져 있는 상황을 맞이할까 봐 두려워진 혜담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오.”

“그래, 레오 루이스.”

이 상황에 호칭까지 정정하고 싶냐. 혜담은 그의 풀네임을 불렀다.

“응.”

자신이 불러 주길 기다렸던 강아지처럼 눈에 빛을 내며 냉큼 편안한 대답을 하는 레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혜담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방심했어도 그를 따라 웃을 뻔했다.

“맞을래?”

얼른 표정도 감정도 수습한 혜담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안 들으면 줘 패도 된다던데, 지금 내가 딱 그러고 싶거든.”

“나 때리고 싶어요? 그래도 되긴 한데 아플 텐데. 어디 때릴래요? 어떻게 때려야 혜담 씨가 덜 아프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태연하게 제 손을 잡더니 주먹을 쥐게 만드는 레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주먹 쥔 자신의 손을 제 몸 여기저기에 대 보는 그를 쳐다보던 혜담은 제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부터 다른 손으로 툭 쳐 냈다.

“이사 안 해. 절대. 알겠어?”

“아, 왜! 원하는 만큼 맞아 줄 테니까, 이사하면 안 돼?”

혜담은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저보다 세 살 어린 커다란 덩치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