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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와 레오가 나란히 걷는 것을 구경하며 혜담은 손에 들고 있던 뱅쇼를 조금 마셨다. 루나를 처음 봤던 날. 서슴없이 대하는 둘의 모습에 혼자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레오의 어린 시절을 알고, 그의 취향을 아는 루나는 물건들을 추천하는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레오는 루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단답 형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있었다.
볼일이 있으면 둘이서 처리할 것이지. 자신은 왜 끌고 와서, 아직 근무 시간이니 집에 가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던 혜담의 눈에 장식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바라보고 난 후에야 모래시계인 것을 알았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한 혜담은 위에 있던 모래들이 두서없이 떨어져 아래에 쌓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모래시계는 한 줄로 쭉 내려오는 것이 끝이었는데 다양한 색의 모래가 산을 만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한 편의 그림처럼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 냈다.
처음과 다른 모양으로 변한 모래시계를 보던 혜담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다시 흘러내린 모래들은 또 다른 모양을 만들어 냈다.
얇고 판판한 원형의 틀 안에는 기름과 색 모래, 그리고 약간의 공기가 들어 있었다. 반만 돌리던 완전히 돌리던 안에 있는 모래들은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계속해서 변했다. 구성은 변하지 않지만 매번 바뀌는 결과물에 혜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혜담 씨, 여기 잠시만요.”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던지도 깜박한 채 모래시계에 집중하고 있던 혜담은 루나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어느 색이 나아 보여요?”
검은색과 짙은 파란색을 두고 어느 것이 나아 보이냐는 루나의 질문에 혜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른 건가요. 빨강이나 버건디나 같은 빨간색 계열 아니던가요. 그러니 검은색이나 짙은 파란색이나 어두운 데서 보면 다 같은 어두운색인데 굳이 그 두 개를 구별해야 하나요?
색만 다른 건지 또 다른 것이 있는지 혜담은 한 손을 내밀어 촉감을 느껴 보았다. 촉감도 같은 것 같은데?
“같은 거 아니에요?”
“같은 시트죠. 색이 다른 거지.”
침대 시트라면 그 기능에 충실하게 몸에 닿는 촉감만 좋으면 됐지. 그 색이 뭐가 중요해? 아…… 너무 핑크핑크하거나 노랑노랑한 건 사절이었다. 무언가 묻었을 때 티도 많이 나고 말이지……. 둘다 어두운색이니 어떤 것으로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제가 쓸 것도 아니었으니까.
“소리가 덜 나는 것으로 해.”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두 개의 색 중 하나를 골라 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는 루나의 눈빛 안에 갇혀 있던 혜담을 구해 준 것은 레오였다.
“뭐?”
“바스락거리는 소리 적게 나고, 촉감 좋은 걸로.”
“그럼. 저쪽 건데?”
레오의 말에 루나가 지금껏 만지고 있던 시트를 두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혜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뱅쇼를 또 마셨다. 따뜻할 때 마셔야 한다더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이 조금 식은 뱅쇼는 처음보다 맛이 없었다.
“시끄러운 거 싫어하잖아요.”
옆으로 다가온 레오의 말에 혜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자는 데 시끄러운 건 별로긴 하지.
“시트가 거친 것도 싫고.”
이번에도 혜담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자는 동안 뭘 걸치고 있는 걸 싫어해, 평소에도 팬티 한 장 입고 자는 혜담이었다. 가끔 술 취해 뻗었을 때나 입고 있던 옷이 그대로지, 그랬기에 다른 생활용품들에는 무심해도 나름 이불에는 신경 쓰는 편이었다.
“이건 어때요?”
루나의 부름에 그녀에게로 다가간 혜담은 짙은 회색의 시트에 손을 살짝 올려놨다. 색도 어두운 것이 딱 마음에 드네. 그런데 가격이…… 슬쩍 눈동자만 굴려 태그를 확인한 후 시트에 올려놨던 손을 얼른 제자리로 했다.
침대 시트에 한 달 월급을 다 바칠 수는 없잖아.
“이걸로. 또 뭐 볼 게 있어?”
“소파. 아직 매장에 정식 DP 안 된 신상 따끈따끈한 것들이 1층 창고에 있대. 아니면 그건 DP 되고 나서 볼래?”
“온 김에 같이 봐.”
이렇게 둘러보고 고르는 게 재밌나? 그냥 인터넷으로 보고 가격 맞고 색 괜찮으면 사는 거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장서는 루나를 따라가며 혜담은 넓은 공간을 다시금 휙 둘러보았다.
근교에 이런 멀티 공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하긴 알았다고 해도 제가 방문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앞장서는 루나를 따라간 혜담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루나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물건들이 다 거기서 거기고 비슷한 성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면 별 차이 없으리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혜담의 기본 생각들이 오늘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닐을 벗기지도 않은 소파 다섯 개에 연이어 앉은 혜담의 시선이 먼저 앉았던 소파들로 향했다.
비닐을 벗기지도 않았는데 이런 차이들이 있다고? 앉는 순간 온몸이 푹 파묻히는 스타일부터 시트의 단단함 정도, 앉는 부분의 깊이 소파의 기본 높이까지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소파를 사용하는 사람은 레오일 텐데, 루나는 계속해서 제게 묻고 있었다.
“팀장님이 고르시는 게…….”
“물론 선택은 레오가 하죠. 그래도 같이 둘러보는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전 개인적으로 지금 혜담 씨가 앉아 있는 소파가 괜찮을 것 같은데. 색이야 얼마든지 주문하면 되거든요. 그러니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의 느낌만 생각하면 돼요.”
“이 소파가 제일 푹신하긴 해요. 파묻히는 느낌도 나고, 앉는 부분도 깊어서 누워도 편할 것 같아요.”
“그럼 그걸로 픽. 대신 소파 높이는 좀 더 높여 달라고 할게. 앉는 부분도 더 깊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고. 혜담 씨, 푹신함 정도는 마음에 든다는 거죠?”
“아, 네.”
레오에게 마지막 컨펌을 받는 듯 말하다가 다시금 루나의 시선이 제게 오자 소파에서 일어나며 혜담은 얼른 대답했다.
“커튼이랑 소품들은 나중에 내가 한 번 더 둘러보면서 리스트 정리해 볼게. 연말이랑 연초 기준으로 새 물건 많이 들어온다더니 창고에 보니까 박스도 안 푼 상품들이 많더라고. 여기 이 소파 비닐 좀 벗겨 주세요.”
“다 마셨어요?”
직원들이 와서 소파 비닐을 벗기는 것을 보던 혜담은 레오의 말에 조금 남은 음료를 홀랑 마셨다.
“맛있죠?”
“네, 맛있네요.”
“또 달라고 해야겠네.”
“네?”
“아니에요. 몸은 괜찮고?”
비닐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상황에 갑자기 제 허리 뒤에 손을 올리며 묻는 레오의 질문에 혜담은 얼른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걱정했는데, 괜찮은 것 같네요.”
“팀장님께서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튼튼할 겁니다.”
잔병치레 같은 거 안 한다고, 감기도 1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하구만 걱정은.
“그래놓고 아프다고 울었어요?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그렇게 울면 내가 얼마나 곤란할지도 모르고?”
애써 거리를 만들어 놨더니 금세 따라붙은 레오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혜담은 얼른 손을 들어 무시무시한 말을 늘어놓는 그의 입을 막았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제가 하관을 가려 버렸기에 눈에 보이는 건 평소보다 조금 커진 그의 눈동자였다. 이내 곱게 휘었고, 눈웃음만 보고도 절로 따라 웃을 뻔한 혜담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고 싶은 말 하는 건데 그것도 안 돼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아! 사람들 없으면 되는구나. 다들 자리 비켜 달라고 할까요?”
“아뇨,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알겠어요. 또 화내지는 말고,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커다란 4인용 소파와 1인용 카우치가 연결된 디자인의 소파의 두꺼운 비닐을 벗기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저녁?”
계속 이어지는 비닐 소리에 레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혜담은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은 한 단어를 다시 꺼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도 안 먹고 가려고?”
“여기까지 온 것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은 없죠.”
이상한 놈이 더 이상해졌습니다. 오늘 레오의 스케줄은 전체가 개인 스케줄로 잡혀 있었기에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많은 약속들로 늘 시간을 쪼개서 쓰는 것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점심 먹는 중에 나타나지를 않나. 지금은 한가하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거기다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바비큐 괜찮게 하는 곳 알거든요. 생맥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자니 냉큼 꺼내는 메뉴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제가 이렇게 본능적인 사람이었을까? 수면욕이 좀 있는 건 알았지만 제가 식욕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거기다…… 육욕도.
바비큐 폭립에 생맥주를 떠올리다 말고 뜬금없이 레오의 선명한 복근과 두툼한 가슴근육이 같이 떠오르자 혜담은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섰다. 그는 그저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고, 돌아가는 것까지 시간을 생각해서 저녁을 먹고 가자는 말을 했을 뿐인데, 육욕에 눈이 먼 제 뇌는 엉뚱한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