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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죠?”
“제가 힘들 게 뭐 있나요. 확인하고 물건 개수 체크하는 일밖에 안 한걸요.”
“그게 힘든 거예요.”
루나의 말에 혜담은 웃어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정말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그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후에도 힘낼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이거 외근이니까 식사비도 다 청구할 거거든요.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전 버섯 리조또면 됩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피자, 스파게티, 스테이크도 당연히 시켜야죠. 시원하게 맥주도 마시고 싶지만 그건 참고 음료도 고르세요. 막 세 개, 네 개 골라도 된다니까요.”
“그걸 누가 다 먹어요.”
“누가 다 먹긴요. 우리가 다 먹어야지. 혜담 씨, 그 정도 먹을 수 있잖아요.”
“제가 10대였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좀 힘든데요.”
철도 씹어 먹을 나이 때야 라면 두 개에 공깃밥까지 꼭 말아 먹었지만, 이젠 라면 한 개에 밥 조금이면 됐다. 거기다 루나의 성격상 식사가 끝났다고 해서 식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제가 보아 온 많은 여성들은 식후에 꼭 음료나 그런 것들을 먹었으니까.
“약한 소리. 스테이크 미듐? 미듐 레어?”
“미듐 레어.”
“스파게티 매운 거? 아! 매운 거 잘 드시죠? 그럼. 스파게티는 매운 걸로 먹어요.”
몇 가지를 제게 묻는 듯하더니 직원을 불러 직원이 당황할 만큼 많은 음식을 주문한 루나는 무척이나 자신의 주문에 만족한 것 같았다.
“레오랑 일하는 건 어떠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루나는 그 조용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장인들 일이야. 다 그렇죠. 루나 씨가 팀장님과 일하는 것이나 제가 일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건 없을 겁니다.”
“혜담 씨. 이러면 재미없어요. 나랑 같이 직장 상사 험담해 줘야죠! 그런 식으로 쏙 빠져나갈 거예요?”
“알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다 맞춰 드릴게요.”
“아니 글쎄. 걔가 요 이쁜 아이를 못생겼다는 거예요. 봐 봐요. 진짜 못생겼어요?”
루나가 불쑥 내민 휴대전화 화면에 뜬 아기 얼굴을 마주하게 된 혜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머무는 것도 잠시 어느새 혜담은 그녀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고 있었다.
“진짜 귀여운데요.”
“그쵸? 귀엽죠. 이제 마마. 파파도 하는데 정말 어제는 너무 귀여워서 볼 깨물었다가 혼났잖아요.”
“루나 씨 닮아서 눈도 크고 정말 인형같이 생겼어요.”
“역시 혜담 씨 보는 눈 있으시다.”
하얗고 통통한 파란 눈의 아이를 보는 혜담의 입꼬리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절로 올라갔다.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아이의 동영상을 보면서 어찌 화를 낼 수 있을까. 주위에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아이를 본 기억도 거의 없는 혜담에게 아이는 신비의 존재였다.
“아이가 얼마나 예쁜데. 레오는 왜 싫어하는지 진짜 모르겠다니까요.”
“싫어해요?”
“네, 진짜 싫어해요. 사진 보여 주면 대충 보기는 하는데 혜담 씨처럼 그러지는 않는다니까요. 몇 번 휘적휘적 보다가 덮어 놓고 일 이야기나 꺼내고 말이에요.”
“팀장님 성격이 무던하시죠.”
“생각을 해 보세요. 레오 2세면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 집안 자체가 이미 우월한 유전자는 다 가지고 있는데, 제가 얼른 결혼해라. 이모가 잘해 줄 수 있다 그런 말 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하잖아요. 연애에 결혼은 몰라도 애는 절대 싫다나?”
음식이 세팅되느라 잠시 이야기가 끊기긴 했지만 루나는 계속해서 말을 했고, 혜담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히 대답을 해 주었다.
“참. 레오. 진짜 좋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못났다고 말하는 거 아세요?”
“네?”
“우리 아기 보고도 매번 못생겼다 그러거든요. 꼭 그렇게 반대로 말해요.”
“설마요.”
“레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못생겼다 일 걸요? 어릴 때 외할머니라고 했던가? 하여튼 레오가 하도 예쁘게 생겨서 사람들이 외모 보고 그렇게 입을 댔나 봐요. 그랬더니 할머님이 부정 탄다고 못난이라고 불렀대요. 그걸 듣고 가족들이 레오에게 모두 못난이라 불렀다나? 그때 들어 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레오가 ‘못생겼다.’라는 표현을 쓰는 물건이나 대상이 있으면 진짜 마음에 들고 좋다는 거예요. 비서시니까 혹시 그런 거 들으면 참고해 두세요. 꽤 괜찮은 팁이죠?”
“그런 말을 쓸 만한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잘 기억하시라는 거죠.”
혜담은 계속 말을 하는 루나의 앞으로 스테이크를 밀어 주었다. 뜬금없이 못생겼다고 중얼거리는 레오였다. 제 눈을 빤히 보고, 입가엔 옅은 미소까지 띤 채 매번 자신의 못생김을 걱정해 주던 그였다.
‘못생겼다’ 대신 ‘좋아’라는 단어를 넣던 혜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가슴이 일렁거리고, 기분이 묘해졌다. 바보 온달다운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루나의 말이 맞다면 레오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제게 좋은(?) 말을 이상하게 하고 있었다.
반쯤 먹은 버섯 리조또를 스푼으로 조금 떠 입 안에 머금은 혜담은 갑작스럽게 루나의 뒤로 나타나는 이를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루나까지 일어났고, 이 사달을 만든 레오는 태연하게 걸어와 혜담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 먹고 있었어요?”
오늘은 레오를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한데 난데없이 나타나 제가 먹던 리조또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이 환상처럼 여겨졌다.
“스테이크도 먹지 그랬어요? 리조또로 괜찮아요?”
“스테이크도 시켰거든.”
“못생긴 혜담 씨. 그날 집엔 잘 갔어요?”
쿨럭.
레오의 말에 리조또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떡 삼키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혜담은 갑작스러운 기침에 급히 티슈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리조또는 놀라기 전에 삼켰기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한번 시작된 기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요?”
등을 토닥이고 물컵을 건네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일단 기침은 멈춰야 했기에 그의 손길을 받으며 물을 조금 머금고 진정을 시킨 혜담은 여전히 제 등에 붙어 있는 그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네, 괜찮습니다. 갑자기 사레가 걸려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한 말 하니까 혜담 씨가 놀라지. 왜 왔어?”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메뉴판을 보는 레오를 살피고 나서야 혜담은 제 자리에 앉았다.
“바쁜 사람이 우리랑 밥 먹을 시간도 다 있어?”
“오후에 일정 뭐야?”
“로버트 씨가 집 소품이랑 침구류 좀 바꿔 달라고 하셔서, 그거 보러 갈랬지.”
“혜담 씨랑 같이 가려고?”
“응.”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루나와 레오의 옆에서 혜담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지나가던 길에 들를 수도 있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엔 같이 술도 마신 사이니까.
“스테이크 먹을래요?”
처음부터 그리 허기가 진 것도 아니고 입맛이 도는 것도 아니었기에 담백한 버섯 리조또를 선택했었다. 레오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입맛이 모두 가셔 버려 음료나 마시고 있던 혜담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거운 거 싫어요? 그럼. 스테이크 샐러드 먹어요.”
이번에는 제안이 아닌 명령조로 말한 레오는 음식을 주문했고, 혜담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레오와 루나를 살펴보았다. 제게 ‘못생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레오는 그 뒤로 제가 당황스러울 만한 말을 하지 않았고, 분명 그전까지 그가 말하는 ‘못생긴’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던 루나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분명히 그녀도 들었을 텐데, 어떤 동요도 없는 모습에 혜담은 저 혼자 긴장해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슬쩍 문질렀다. 뭐든 그랬다. 의식하는 사람들이야 알아채지만 어떤 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혜담 씨는 뭘 좋아해요?”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 빠져 있던 혜담은 루나의 질문에 긴장을 풀고 있던 몸을 바로 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말해 주셔야…… 음식?”
“음식도 괜찮은데, 물건이라든지 뭐 선물 받고 싶은 거 그런 거 있으세요?”
“저와 제 친구들은 선물을 주고받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서요. 생일이라도 딱히 선물 같은 걸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같이 모여서 술 한잔하는 정도라서 선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생일 아니라도 크리스마스도 있잖아요.”
“생일에도 주고받지 않는 선물을 크리스마스에 주고받겠어요?”
“하긴 그러네요.”
“혜담.”
루나와 선물과 관련된 대화를 하던 혜담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입가로 다가온 것을 얼떨결에 받아먹었다.
“식사 끝나고 같이 한 바퀴 돌지. 어차피 내가 쓸 것들 고른다면서.”
막 나온 스테이크는 따듯했고 부드러웠다. 거기다 상큼한 오렌지 베이스의 샐러드까지 같이 입에 들어왔기에 혜담은 일방적인 레오의 말을 들으면서도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일단 입 안에 있는 음식부터 먹어야…….
한참을 씹어 스테이크를 먹은 혜담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레오와 동행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불편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위치가 아니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