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죽을 사다 준 건 고맙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기에 혜담은 온갖 피곤한 척, 힘든 척은 다 하며 눈을 꾹 감고 슬금슬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준석이 더 먹으라고 말은 하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겠구나 했다.
“뭔 일 있었지?”
방금 먹은 것들을 치우고, 사 온 것을 정리하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준석의 말에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제는 추궁의 시간인가 보다.
“매번 이게 뭐냐. 그냥 회사를 때려치워. 네 경력에 어디든 못 가?”
다 정리했으면 그냥 가. 네가 사 놓은 것들만 일주일 넘도록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식량 걱정할 필요도 없고, 주말이니 이틀 푹 쉬고 출근하면 되거든.
혜담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머리 위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괴감에 이미 맨틀 뚫고 핵까지 파고들 것 같으니까 너까지 안 그래도 돼.
“걍 사귀어.”
이불 속에 머리까지 꼭꼭 숨기고 잠든 척하기는 개뿔. 확 파고드는 투박한 말투에 어느새 혜담은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뭐냐. 이 격한 반응은? 아…… 이미 사귀는 거였어?”
“……그냥 가라.”
“너 팀장 좋아하잖아. 그놈도 너 좋아하는 거 같고. 인생 뭐 있어? 걍 내키는 대로 살아. 혹시 나중에 ‘우리 아들과 헤어져요.’ 뭐 이런 말 들을까 봐? 그러기엔 너무 드라마 많이 본 거 아니냐? 요즘 그런 신파는 먹히지도 않아요. 이미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내외하는 것도 웃기잖아.”
냉장고 앞에 서서 죽을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준석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혜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눈치라고는 1도 없는 놈이 도대체 어디까지 뭘 알고 있는 거지? 옷매무새가 좀 흐트러져 있긴 하지만 그건 숙취로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급하게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더듬던 혜담은 단추가 사라져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명치에 시선을 두었다. 뭐가 울긋불긋한 게 보이는데, 슬쩍 눈동자를 굴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준석을 응시하며 혜담은 슬쩍 이불을 끌어 어깨까지 덮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우리 아들과 헤어져요.’ 같은 말 대신 ‘줘 패 버려요.’라는 말을 듣긴 했다. 아들 부려 먹고, 시켜 먹고, 말 안 들으면 쥐어박아도 된다는 개방적인 그의 부모님을 떠올리던 혜담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막말로. 내 아들과 헤어져. 이러면 너도 말해. 그 아들 내가 살려 줬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줬더니 먹튀했다. 그러니 돈이라도 달라! 돈도 많은 집이겠다. 죽을 때까지 먹고 놀 만큼 돈 받고 편히 살면 되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지금은 내키는 대로 연애든 뭐든 하고.”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가. 다음에 내가 곱창 살게.”
“야. 누가 곱창 사 달래!”
“1절만 해. 1절만. 우리 할머니도 안 한 잔소리를 왜 니가 해.”
냉장고에 다 정리해서 넣었는지 웅크리고 있던 커다란 몸을 일으킨 준석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혜담은 한 손을 흔들어 어서 나가 달라는 뜻을 전했다.
“이번엔 숙취해소제 안 주든?”
“간다, 새꺄.”라는 말까지 붙인 준석의 말에 혜담은 흔들고 있던 손으로 제 머리를 짚었다.
“숙취해소제.”
제가 못 알아듣는 듯하자 준석이 한 번 더 짚어 줬지만 혜담은 그가 하는 말의 정확한 뜻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뭔 숙취해소제.”
“지난번에 그놈이 그러데. 숙취해소제도 먹였다고. 그런 놈이 이번에는 안 줬어? 같이 마셨을 거 아냐.”
“지난번이 언젠데.”
레오와 술을 먹은 횟수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숙취해소제를 사 준 적은 없다. 로버트가 사 줬으면 사 줬지. 혹시나 제가 빼먹은 것이 있나 싶어 고민하는 혜담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생겼다.
“야야. 아픈 머리로 뭘 생각해. 그냥 자라. 자. 다음에 곱창 사는 거 잊지 말고.”
“어. 고맙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혜담은 커다란 곰 한 마리가 들어와 헤집고 나간 자신의 작은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소파까지는 그냥 굴러서도 갈 수 있고, 그 앞에 있는 TV까지는 두 걸음이면 됐다. 그 옆에 있는 부엌은 어떻고.
뭘 사고 꾸미는 것도 귀찮아 정말 필요한 것만 있는 공간에서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던 혜담은 긴 한숨과 함께 돌아누워 벽을 바라보았다. 숙취해소제는 무슨 숙취해소제. 아무리 생각해도 로버트 씨가 준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래도 저 미련한 곰 같은 놈이 착각한 것 같았다.
별 시답잖은 말을 해서 왜 고민하게 만들어. 머리도 아파 죽겠구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간결하게 답을 내린 혜담은 눈을 감았다. 일단 자자.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고 또 잠이 오지?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시답잖은 생각도 잠시 혜담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진짜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뇨. 딱 2분 23초 기다렸어요. 이 정도는 기다린 것도 아니죠.”
“늦은 죄로 가는 길에 커피라도 살까요?”
“샷 추가해도 되죠?”
“샷에 휘핑에 원하시는 건 뭐든 다 추가해서 드셔도 됩니다. 조각 케이크 원해요?”
“혜담 씨. 뭘 좀 아시는데요?”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출근해서 레오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같은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그냥 평소처럼 얼굴에 철판 깔고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차에 걸려 온 로버트의 전화에 혜담의 일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개인 비서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정말 이런 것도 해야 돼? 라는 의문이 들 만큼 다양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아침 구두를 수거해 구둣방에 맡기는 것 같은 사소한 일이 그의 일정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매일 닦아 광이 나는데도 조금의 티끌도 묻지 않은 것 같은 구두를 보다 엉망인 제 구두도 덩달아 닦기도 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레오가 아닌 루나와 손발을 맞춰서 일을 해야 했다. 파티가 끝났으니 이번엔 새해 선물 준비라나 뭐라나. 회사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10시에 루나가 직접 자신을 픽업 왔건만 도어락이 고장이 났는지 잘 닫히지 않아 그 앞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일단 잠기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나오긴 했는데, 돌아와서는 도어락 기사를 불러 수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백화점에 주문한 물건들 픽업하구요, 간단하게 점심 먹고 오후엔 좀 돌아다녀야 해요. 한군데만 맡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선물 받는 분들 취향을 고려해서 구매하다 보면 늘 그렇죠.”
드라이브 스루에서 구매한 음료를 마시는 동안에도 루나는 태블릿을 계속 보고 있었다.
“어느 직업이나 쉬운 게 없네요.”
“그쵸? 그래도 전 워낙 물건 보고 사고 이러는 걸 좋아해서 마음껏 즐기고 있답니다. 내 돈이었으면 절대 못 사는 물건들 사는 재미가 얼마나 짜릿한데요.”
루나를 따라 주문하다 보니 얼떨결에 저 역시 샷이 추가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게 된 혜담은 커피 향만 느끼며 제가 할 일을 찾았다.
“도와드릴 건 없어요?”
“그럼 이거 오늘 받을 물건 리스트 뽑아 놓은 건데 한번 훑어봐 주세요. 하나씩 다 확인하면서 받긴 하는데 나중에 물건 막 쌓이기 시작하면 정신없거든요.”
그녀가 건네는 파일을 받은 혜담은 그 두툼함에 잠시 멈칫거렸다.
“몇 개나 되죠?”
“꼭 한 분에게 하나의 선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여기서 구매해서 영국으로 보내는 것들도 많거든요.”
커피를 내려놓고 샌드위치를 먹는 루나를 보던 혜담은 옆에 있던 티슈를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혜담 씨. 진짜 친절하시네요. 레오한테 너무 아까운데!”
친절하긴 뭐가 친절해. 샌드위치 먹을 때 티슈 필요 없는 사람도 있어? 그저 제 손 닿는 곳에 티슈가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여기서 레오는 왜 나와.
“이만큼 편하고 대우받는 곳도 잘 없으니 어쩔 수 없죠.”
“하긴 그래요. 레오 걔가 냉정하고 무뚝뚝하고, 성격도 그다지 좋지는 않은데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또 잘 챙기거든요. 원래 그렇게까지 성격이 엉망은 아니었는데 다 사람이 문제지. 안 그래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젤 어렵죠.”
한참을 향만 맡고 있던 커피를 조금 입에 머금은 혜담은 그 씁쓸함에 피식 웃었다. 평소보다 더 진한 맛과 향에 쓴맛도 늘어난 만큼 특유의 감칠맛까지 늘어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저 쓰기만 한 거라면 먹지 않을 텐데, 그 쓴맛을 참고 마시게 만드는 다른 맛들이 문제였다. 딱 레오 같았다. 바보 온달 주제에. 가끔 보여 주는 그 미소와 호감과 친절 사이를 오가는 그 모호함이 계속해서 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매번 선을 그어야 한다, 딱 잘라 정리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와 가까워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생각에 잠겨 읽으면서도 정확히 뭘 말하는지도 모르는 물품 리스트를 읽는 것도 잠시, 백화점에 들어선 혜담은 밀려오는 일에 치여 어떠한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