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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잘 도착하셨습니다.”
레오는 비서의 보고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파티 중간중간 눈길로 혜담을 좇았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 딱 붙여 놓고 싶었지만, 잠시 제 옆에 선 채 마주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을 본 이후로는 그럴 수도 없었다.
편하게 쉬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홀로 넓은 파티장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준비된 음식을 야무지게 챙겨 먹는 것도 보았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제가 본 혜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혼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시간이 꽤 지나도 파티장에 나타나지 않는 혜담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파티도 파티지만 자정에 시작되는 불꽃놀이만큼은 꼭 같이 즐기고 싶었다. 예상대로 정원에 홀로 있는 그를 보자 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참석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이 자리에 둔 건 아닌지.
은은한 정원의 조명과 달빛만으로는 그의 표정을 온전히 볼 수가 없었다.
취기와 함께 결코 제게 다정하지 않은 혜담의 태도에 못난 마음에 자라났다.
밖에 나올 거면 옷이라도 제대로 챙겨 입든지, 타인은 잘 배려하고 챙기면서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뭐든 둔감했다. 거기다 자존감도 높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뭐든 스스로 하려는 성향도 강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성격일 테다. 그래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가끔 제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침묵이 이어진다면 그건 내키지 않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그는 늘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밖에 있었는지 온기보다 냉기가 가득한 몸을 끌어안고 있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을 극도의 흥분으로 날뛰게 만들기도 하고 이토록 차분하게 안정시켜 주는 이면적인 혜담의 페로몬을 맡으며 레오는 그 순간을 만끽했다.
꼬박꼬박 존대를 하면서 팀장님이라 부르고, 어떻게든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스락거리며 적당한 말로 저를 구슬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는 혜담의 마음을 모두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혜담이 원한다면 끝까지 모른 척해 주고 싶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대할 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었다. 혜담이 저를 따뜻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만큼 저 역시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요즘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야외에 오래 두어 좋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둘만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던 자신의 눈에 달빛에 비친 달이 보인 건 우연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단어가 입에서 흘러나갔다. 대번에 온달이 아니라 보름달이라고 수정해 주는 냉랭한 혜담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취기 때문인지 혜담의 페로몬에 취해서 그런 것인지 생소한 것이 떠올랐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혜담이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선명한 보조개를 보인 채 크게 웃으면서 ‘온달’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온달’이라고 종알거렸다.
잠시 당황한 사이 품에서 벗어난 혜담은 제가 아는 혜담이 맞았다. 무표정으로 옷을 정리하는 그의 페로몬에 뾰족한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마치 말을 안 듣는 동생이나 후배를 혼내는 듯한 말투로 딱딱하게 저를 “팀장님”이라 부르는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듣고 싶었다.
끝까지 제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불편함을 숨기지도 않은 그의 행동과 한 사람의 모습이 계속 겹쳐 보였다. 지금의 혜담보다 어리고 더 잘 웃는다.
혜담은 저를 ‘온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날 온달이라고 부른 사람.
온달은 온전한 달이라고 설명한 사람. 모두 혜담 같았다.
얼마 전 다녀온 그의 할머니 댁 평상에서 고기도 먹고 함께 밤하늘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느낀 기시감이. 그의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그를 보던 순간부터 느꼈던 그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과 휑한 마당과 낡은 평상을 알고 있다. 조금만 방심해도 머리를 박았던 낮은 문틀까지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영에 속이 울렁거렸다.
바로 앞에 있던 혜담이 사라질까 두려워 그의 손목부터 움켜쥐었다.
자신이 기억이 맞음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이는 혜담 뿐이었다. 아마도 제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때일 것이다. 스무 살 철없던 그 시절. 제게 일어난 일이 버겁고 짜증 나서 모두를 뿌리치고 홀로 여행을 떠난 그때.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이 정말 혜담일까? 아니면 그 기억 속에 혜담이 있기를 바라는 내 억지 주장이 만들어 낸 환영일까?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는 혜담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밀려오는 두통과 뒤엉킨 생각 속에 선명히 보이는 건 혜담의 얼굴뿐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것과 다르게 지금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함께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하늘을 밝히는 불꽃은 그의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시끄럽고 번쩍거리기만 한 파티의 하이라이트에 적당히 넣은 불꽃놀이보다 제가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혜담이 너무 예쁘다. 불꽃을 좇는 눈동자가 자신만 올곧게 바라보길 원한다. ‘우와’라는 탄성과 함께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에 제 입술이 닿기를 바란다.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는 혜담을 보는 레오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같이 잘래?”
그의 한마디에 정신을 놨더랬지. 그래서는 안 됐는데, 후회하기엔 엎질러진 물이었다.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혜담을 받아 주다 마지막 자제심까지 무너지고 말았다. 강제로 노팅당하는 것도 모른 채,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우는 그를 끌어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절하듯 잠든 혜담을 끌어안고 밤새 고민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짓이 모두 쓰레기보다 못한 짓이라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깨어나면 당장 무릎부터 꿇어야 할지 아니면 변명으로 가득 찰 것이 분명한 편지 같은 것이라도 써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혜담이 깨어났다.
얼떨결에 잠든 척을 했고, 제 눈앞에서 몇 번이나 손을 흔들며 제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는 그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했다.
도망치듯 방을 나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각이기에 집의 모든 불을 끄게 했다.
혹여나 몰래 나가던 그가 누군가를 만나 당황하지 않도록 일하는 사람들 모두 그 근처는 가지도 말라고 했다.
먼 거리를 걸어야 할 그를 위해 카트를 집 입구로 옮겨 놓으라 했고, 혜담이 차를 타고 집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미행도 붙였다.
일단 그가 집에 무사히 들어간 건 확인했는데.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밥은 제때 챙겨 먹는지 궁금하지만 먹을 것을 보낼 만한 핑곗거리가 없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을 확률이 높고, 찾아간다고 해도 만나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일이라는 핑계로 그를 끌어낼 순 없다. 넓은 정원에 밤새 이어졌던 파티의 흔적들을 치우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던 레오는 긴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가를 주지 말걸.
크리스마스 파티를 끼고 3일이나 휴가를 줬는데. 지금 레오가 하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후회뿐이었다.
* * *
“곧 죽을 것 같더니, 아직 안 죽었네? 감기?”
“죽은?”
“전복죽, 삼계죽, 치즈야채죽, 호박죽, 불낙죽. 이건 내가 먹을 차돌된장비빔 곱빼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로 파고들어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혜담은 여전히 제 몸을 짓누르는 몸살기에 결국 준석을 부르고 말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든데, 배달 음식 주문하고 문 앞까지 가서 그걸 가져와 차리는 그 모든 행동이 까마득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헤라에게 시켜서 전화를 걸었으니 망정이니 헤라마저 없었다면 그대로 쫄쫄 굶으면서 누워 있을 뻔했다.
“삼계죽.”
“팀장네 크리스마스 파티 간다더니 웬 술병?”
“이것저것. 야. 나 힘들다. 여기로 좀 가져와.”
“이럴 거면 병원을 가.”
구시렁거리면서도 누워서 흐느적거리는 제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침대에 기대 앉혀 주고는 미니 테이블에 죽과 수저, 물을 올려 주는 준석의 행동에 혜담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병원은 무슨.”
“요즘 계속 골골거렸잖아. 고장 났으면 고쳐야지. 버틴다고 될 일이냐?”
“됐고, 이제 가.”
“다 죽어 간대서 죽 사 들고 와서 수발드는 친구한테 이제 꺼지라고?”
“어.”
길게 말할 힘도 없어 웅얼거리며 숟가락을 들던 혜담은 태어나 처음으로 느낌 숟가락의 무게에 혀를 찼다. 어설프게 조금 떴던 죽이 테이블 위를 더럽히고 있었다.
숟가락을 제대로 들 힘도 없다고? 숟가락 들 힘도 없으면 진짜 뒈져야지. 이게 무슨.
“지랄도 풍년이지. 이래 놓고 가라고?”
침대에 걸터앉은 준석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혜담은 얌전히 입을 벌렸다. 일단 먹어야 힘이 나고, 그래야 병원을 가든지 뭘 하든지 할 거 아닌가.
“더 먹어. 새꺄.”
“됐어.”
“새 모이 먹냐? 입이나 벌려. 세 숟가락만 더 먹어.”
내가 애냐? 밥 먹기 싫다는 애한테 엄마들이 늘 세 숟가락만 더 먹으라고 한다던데.
혜담은 대답 대신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입가로 다가오는 숟가락을 보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옷은 그게 또 뭐고.”
준석의 말에 고개를 숙여 제 옷을 본 혜담은 눈을 감은 채, 침대 헤드에 푹 기대 버렸다. 준석의 말대로 지랄도 풍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