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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색의 그와 자신의 재킷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흰색 셔츠엔 진한 얼룩이 생겨 있었다. 젖은 부위로 한기가 느껴지자 혜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화가 났어요?”
순순히 밀려나 준다 싶더니 앞을 막고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며 기죽은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레오를 보자 가슴을 가득 채운 갑갑함이 몇 곱절 커졌다. 옷을 낚아채려는 것인지 아니면 저를 잡으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게로 다가오는 손을 슬쩍 몸을 틀어 피했다.
“팀장님.”
“레오.”
그가 이렇게 취한 건 처음 보았다. 그의 눈꼬리는 왜 처져 보이고 늘 당당하게 펴고 있던 어깨도 굽은 것처럼 보일까. 시골 동네의 개들이 할머니 앞에서 혼날 때나 보이던 모습이 그에게서 겹쳐 보였다.
힘이나 본능으로 한다면 작고 힘없는 할머니들을 쉽게 제압해 버릴 수 있을 만큼 큰놈들이 혼날 때만큼은 얌전히 있었다. 뭐 때문에 혼나는지 알기는 하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커다란 눈만 끔벅거리며 화가 난 할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할머니가 버럭 할 때마다 낑낑거리며 나름 반성하는 것 같은 소리도 내었다.
잔소리가 길어지는 것 같으면 앞발로 슬쩍 할머니의 발끝을 건들면서 용서해 달라는 뜻도 전했다. 거기에 마음 약해진 할머니들이 한숨이나 헛웃음과 함께 혼내는 걸 멈추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기쁜 모습으로 꼬리를 흔들며 할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간혹 삐져서 구석에 처박혀 한동안 나오지 않는 놈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시금 평소의 똥꼬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똑같은 잘못을 하고 할머니 앞에 붙들려 앉혀졌다.
그런데 왜 그런 강아지 모습이 그와 겹쳐 보이냐고. 방금까지 제게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 어설프게 멈춰 있었다.
“팀장님!”
끝도 없이 막연한 답답함에 혜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 답답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해소할 방법도 없었다. 과거 끌어와서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어라고 말한들 뭐가 달라지냐고.
눈 맞고 배 맞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방향으로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몇 년 안에 레오는 진급이니 본사 발령이니 하는 이유로 영국으로 가 버리겠지. 역시나 자신은 두고 말이다. 그렇게 남는 건 자신이고 떠나는 이는 레오다.
자신은 또 몇 년을 그 순간이나 과거에 잡혀 뱅뱅 돌면서 지낼 테고, 레오는 지금과 다름없이 잘 살 것이다. 그러잖아도 복잡한데 방금 만난 그의 부모님까지 떠올리자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분의 오해는 또 어떻게 풀어 드리나. 아드님과는 엔조이일 뿐입니다. 뭐 이딴 말이라도 해야 하나?
“내 이름 레오 루이스잖아.”
“압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고주망태가 될 만큼 마셔 버릴걸. 지금의 레오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만큼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심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이름 안 불러 줘?”
“방금 팀장님이라고 불러 드렸습니다.”
“그건 호칭이고 이름. 이름 불러 줄 수 있잖아.”
“내가 왜?”
평소였다면 하지 않을 말투였다. 기억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네가 술 취해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면 끝이다. 대화 같지도 않은 말을 주고 으며 혜담은 그의 재킷을 손으로 탁탁 털어 보았다. 비싸고 좋은 소재의 옷이면 발수 기능도 있어야 되는 거 아냐?
“혜담아.”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잘생긴 미소년에서 잘난 알파가 되어 돌아왔다. 부드러웠던 선이 굵어지고, 키도, 체격도 눈빛도 모두 변했다. 가끔 그가 제가 알던 온달이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제 이름을 부르는 이는 온달이었다.
“이혜담.”
그냥 지금 같은 애증 관계 레오로 살자. 내가 기억 속에 잘 묻어 놓은 온달이 불러오지 말고.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왜.”
이미 스며들건 다 스며들었는지 물기가 배어 나오지도 털어지지도 않는 재킷을 그에게 쑥 내밀었다.
“내가 너한테 많이 잘못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처음 본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한데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어.”
내민 재킷을 받지도 않고 헛소리만 웅얼거리기에 혜담은 한 발 그에게 다가갔다. 술 취한 놈과 인생과 운명에 대해 논한들 머릿속에 남기라도 할까? 말을 말자. 대신 자신 때문에 감기에 걸렸니 어쨌니,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 그에게 재킷을 입히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온달인 거야. 멍청한 온달.”
바보 온달.
레오의 손을 잡은 혜담은 소매 한쪽을 끼워 넣었다.
“너 아냐?”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알기에 혜담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얌전히 서 있는 레오에게 재킷을 다 입히고는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팀장님, 말놀이는 그만하고 갑시다. 12시에 앞쪽 정원에서 폭죽 터진다면서요. 거기 가서 같이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 이어 외치고 전 집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이혜담. 너잖아.”
“네. 네. 이혜담. 여기 있습니다.”
제 옷매무새를 확인한 혜담은 어설프긴 하지만 자신의 재킷에 생긴 얼룩이 어느 정도 가려지자 정갈하게 단추를 잘 채웠다. 이미 파티에 흥이 오른 사람들의 시선에 제 얼룩 따위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불뚝하게 못난 마음이 튀어나와 속에 있는 말을 다다다다 늘어놓는 것 대신 이성을 끌어와 그런 감정들을 꾹꾹 눌러 넣은 혜담은 한 손을 들어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쓱쓱 정리했다. 목석처럼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레오의 곁을 지나친 혜담은 그대로 앞쪽 정원으로 향했다. 따라오든지 그대로 있든지 마음대로 하라지.
그의 곁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려던 혜담의 뜻은 레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레오에게 손목이 잡힌 혜담은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자고.
네가 나 좋아하는 마음 모르는 거 아닌데, 난 받아 줄 수가 없다고.
나도 널 좋아하긴 하는데 모든 걸 놓고. 너도 좋아? 나도 좋아! 우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자. 이런 게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 걸 어떡하냐고.
방금 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내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어쩌라고.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섣불리 말할 수 없었고, 혼자 접어야지. 포기해야지 했다는 말뿐인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맛있다고 캐비어 먹으면 뒈져.
언제까지나 이렇게 어정쩡한 상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아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널 떠나 어딘가에서 이름도 흔적도 지운 채 살겠지. 그런데 그러면 뭐 하니. 그렇게 고생하고 살다 보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 후에 어떻게든 다시 재회하더라. 그리고 해피엔딩이겠지.
그런데 우린 그 우스운 일 이미 한 번 했어. 네가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어쨌거나 난 아이들 동화에서처럼 왕자와 공주는 다시 만나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는 엔딩을 믿지 못하는 어른일 뿐이야.
평생 행복하게 잘 살긴 뭘 잘 살아. 공주가 시집살이는 안 당했대? 그 공주 혹시 불임이거나 난임은 아니었니? 바로 왕자 잘 낳고 살았대? 서민 출신이 왕비 됐는데 백성들이 잘 따랐을 것 같아? 거기 대신들은 당파싸움 뭐 그런 거 안 했대? 더 아름답고 착한 귀족 가문의 여식이 첩으로 들어왔다가 그 공주 뒷방으로 밀어내고 실세가 되진 않았고? 현실은 그런 거라고.
“레오 루이스.”
“날 온달이라고 부른 사람 너잖아.”
혜담이 처음으로 그의 온전한 이름을 올리는 것과 레오의 말이 겹쳤다. 그리고 그들의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동시에 터진 요란한 폭죽 소리에 묻혀 버렸다.
혜담의 시선이 절로 하늘로 향했다. 제 미래 같은 까마득한 어둠이 가득하던 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끝없는 아름다움을 그려 냈다. 빛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또 다른 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처음엔 한 발로 시작된 불꽃이었지만 지금은 온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폭죽이 터지는 커다란 소리와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혜담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이게 다 얼마야.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도 잠시,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시끄러운 소리에 섞여 들리는 레오의 목소리에 혜담은 곁눈질로 슬쩍 그를 보았다가 “뭐래.” 하는 대답과 함께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TV를 통해서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폭죽이 터지는 건 처음 보았다. 평소 자신이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비싼 옷을 입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것도 처음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부모님을 실제로 만난 것도 처음이고, 지금만큼 기분이 엉망진창인 것도 처음이다.
울고 싶은지, 웃고 싶은지. 레오를 밀어내고 싶은지, 끌어당기고 싶은지. 제 감정이고 생각인데 무엇 하나 정확한 것이 없었다.
“같이 잘래?”
하늘이 아닌 레오를 바라보고 그의 눈을 응시한 채, 혜담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모호한 상황에서 이 감정만큼은 확실했다. 함께할 때면 늘 그와 닿고 싶고,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