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39화 (3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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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라는 단어와 함께 그가 가까워지는 순간 혜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멈췄다. 레오의 입술이 가까워진 만큼 입술에서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지 않은 감각이 느껴져야 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참고 있던 숨결을 내보내는 순간 레오의 입술이 찾아들었다. 거칠지도 다그치지도 않고 이성을 날려 버릴 만한 열정을 가득 머금은 것도 아니었다. 도장이라도 찍는 듯 그의 입술이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조금 멀어졌지만 둘의 입술은 여전히 맞닿은 상태였다.

“왜 매번 혼자 있는 시간만 주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까?”

작은 한숨과 함께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중얼거리는 레오의 입술 때문에 맞붙어 있던 혜담의 입술이 덩달아 작게 움직였다.

“나 그렇게 인내심 깊지 않아요.”

다시금 혜담의 입술에 꾹 닿은 레오의 입술이 멀어지고 이번엔 그의 이마가 혜담의 이마에 닿았다.

“내가 어떡하면 돼요? 혜담 씨가 하라는 대로 할게.”

혜담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내리깔았다.

레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제게 왜 이러는지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레오 루이스가 저를 좋아한다고? 그 감정이 얼마나 갈 것 같아서?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어린 부자의 연애질에 소모할 만한 감정이나 체력 따위는 없었다. 어설프게 얽혔다가 이상하게 끝나 버린 후의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제 감정은 선을 넘어 버렸지만, 그걸 굳이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자신이고, 그렇게 회사 그만둔 이후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도 자신이며, 무엇보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 버림받는 일 따위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키스해도 되냐는 말에 그의 키스를 기다렸다. 여기서 난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똑똑똑.

둘의 말 없는 신경전을 끝낸 건 로버트의 노크였다.

* * *

크리스마스이브.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지금껏 혜담이 보낸 크리스마스 중 가장 화려하고 이벤트가 가득한, 그야말로 평생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것 같은 날이었다. 루이스 가의 파티에 제가 왜 참석해야 하냐는 질문에 로버트는 사람 좋은 미소만 지었다.

루나가 보내 준 카탈로그를 보고 제안받은 대로 파티룩을 챙겨 입었다. 처음엔 로버트의 곁에서 파티에 참석하는 이들을 안내하기도 하고, 인사도 곁들였지만 초대한 이들이 모두 참석하고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자 제가 할 일은 없었다.

경제면에서만 보던 이들과 연예인들, 로버트의 설명대로라면 평생 살면서 머리카락 한 올 보기 힘든 영국 귀족 가문의 사람들까지 보자 혜담은 제가 있는 곳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파티의 주최자인 만큼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레오를 지켜보는 것도 잠시 혜담은 홀로 파티를 즐겼다. 가끔 레오와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못 본 척 급히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자정쯤 돼서야 파티는 절정에 다다를 것이고 그 후, 돌아가는 사람들을 조금 챙기다 자신도 이곳을 떠나면 되지 않을까? 샴페인을 마시며 벽 쪽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던 혜담은 자신을 보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몸을 틀었다.

루나 씨도 왔구나. 그녀에게 어설프게 잡혔다가 레오와 마주하게 될까 봐 혜담은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겨 긴 복도로 빠져나왔다.

맛도 향도 괜찮아 몇 잔 마신 샴페인 때문인지 몸이 따뜻해지면서 긴장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늙은 건지 진짜 체력이 안 되는 건지 예전보다 주량도 줄고, 수면 시간도 부쩍 늘어났다. 초저녁부터 졸리지를 않나, 미적거리긴 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요즘은 겹겹이 알람을 쌓아 놓고 마지막 알람까지 다 듣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사람들로 가득한 홀과 다르게 한산한 복도를 거닐며 혜담은 가볍게 목을 풀고 어깨도 돌렸다. 지난 생일 때였나? 준석이 선물해 준 비타민이라도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착 가라앉는 기분과 몸을 풀려고 작게 움직이기도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묵직하게 찾아오는 잠기운도 날리려던 혜담의 입에서 기어이 하품이 나왔다.

“어우. 진짜 피곤하네. 내일이 휴일이니 망정이지.”

두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려 잠을 쫓던 혜담은 어느새 저택 뒤쪽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자 손을 들어 머리를 슥 빗어 넘기는 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실내만큼이나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끝없이 이어졌다. 홀로 정원을 돌아다니는 혜담이 돌아서자 화려한 불빛에 감싸인 집이 보였다. 레오는 이렇게나 크고 멋진 집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의 시선을 받고 그들을 거느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여유롭게 와인을 즐기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영어, 불어, 한국어에 독어까지 얼핏 그의 근처에서 들은 언어만 해도 4개 국어였다. 거기다 실제로 뵌 그의 부모님까지 떠오르자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퍼졌다.

“달라도 적당히 달라야 뭘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 하지. 시작할 마음조차 안 나네.”

한참을 돌아다닌 혜담의 발이 닿은 곳은 강가 앞에 있는 벤치였다. 이렇게 오래 밖에 있을 줄 알았으면 코트라도 챙겨 입었을 텐데. 다시 돌아가서 코트를 챙겨 오는 것보다 조금 추운 게 나을 것 같아 혜담은 벤치에 앉았다.

멀리서 들리는 음악 소리와 불빛에 의지한 채, 몸에 힘을 뺀 혜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달이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었다. 바보 온달을 따서 온달이라 이름 지어 놓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온전한 달은 무슨 온전한 달. 막 갖다 붙인 거지.

가슴이 묵직하기에 깊은 한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 나갔다. 고개를 젖히고 있는 것도 잠시 몸을 바로 하고 앉자 강에 보름달이 일렁이고 있었다.

“파티가 재미없어요?”

멍하니 흐르는 강 위에서 유일하게 흘러가지 않는 보름달을 바라보던 혜담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아! 아니. 안녕하세요.”

머그컵 두 개를 든 채, 벤치 옆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던 혜담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나랑 이것 좀 같이 마셔 줘요.”

들고 있던 두 개의 머그컵 중 하나를 내밀기에 혜담은 얼른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아 들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사람은 벤치에 앉아 들고 온 음료를 마시며 옆자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괜…… 괜찮습니다.”

“에반이나 레오나 둘 다 커서 매번 올려다보는데, 그거 별로 기분 좋은 일 아니더라고.”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꺼낸 말을 알아듣는 것과 동시에 혜담은 얼른 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파티 주인이신 분이 왜 여기 나온 건지. 아니. 경호원은 안 데리고 다니시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곳에 있는 건 그와 자신 단둘뿐이었다.

직장 상사의 부모님이라거나 엄청난 귀족가의 일원인 것만 해도 바짝 긴장할 상황인데, 그의 아들을 향해 불순한 마음까지 품고 있는 혜담으로서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과 다름없었다.

“레오와는 같이 일할 만해요? 잘 키우고 싶었는데, 자식 일만큼은 진짜 내 맘대로 안되더라고요. 어쨌거나 루이스가의 알파들이 좀 그래. 그래도 심성이 나쁜 건 아니니까 적당히 잘 구슬려서 부려 먹고 살랬는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서. 그 피 어디 가나? 레오도 제 아빠랑 빼다 박아서 혜담 씨 버겁게 할 것 같아 걱정이에요.”

“네?”

“밖에 오래 있어서 추울 텐데, 따뜻할 때 마셔요. 루이스가 전통으로 내려오는 뱅쇼 레시피 그대로 만들면 진짜 맛있어요. 몸에도 좋고.”

갑자기 나타나서 루이스 가문의 알파 이야기를 꺼내더니 이어 얼른 차를 마시라는 말에 혜담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음료를 마셨다. 아직 온기가 다 가시지 않은 차가 입 안을 적셨고,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것 같았다.

“정말 맛있네요. 따뜻하고.”

“파티 어색하죠?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고, 어디 어울리지도 못하겠고 이상한 세계에 나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 같고.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아. 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에게 어떻게 예를 갖춰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혜담은 어색한 미소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참. 레오가 혜담 씨 마음도 몰라주고 제멋대로 하려고 하면 줘 패 버려요. 체격도 좋고 맷집도 좋으니까 웬만큼 때려도 티 안 나. 혜담 씨보다 어리다니까 기어오르면 쥐어박고, 그래도 돼.”

“저기. 회장…… 아니 사모…… 음…….”

회장님도 아니고 사모님도 아닌 것 같고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한 혜담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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