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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 수 있지만 잠으로 반 이상을 날려 버린 미묘한 휴가를 보내고 출근을 한 혜담을 기다리고 있는 건 눈코 뜰 새 없이 빡빡한 레오의 스케줄이었다. 연말인지라 행사도 많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도 많은 레오의 스케줄은 거의 10분 단위 컷으로 짜였다.
분명 바쁜 건 레오이고, 일 역시 로버트와 나눠서 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레오를 찾는 연락을 맡은 혜담의 업무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 댔다.
만남을 요청하는 전화를 끊은 혜담은 스케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무얼 미루고 끼워 넣어야 할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었다. 로버트에게 연락해 그가 잡아 놓은 개인 스케줄에서 시간을 조금 내어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에 이 많은 사람을 다 만나면 누구랑 어디서 뭘 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겠다.”
혜담은 마케팅팀 회의 시간을 줄일 요량으로 오른손 끝을 움직이며 왼손으로는 커피가 든 잔을 집었다. 팀원들의 항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급하지 않은 건 다 보고서로 올리라고, 그건 밤늦게 집에 가서라도 보겠지.
“으음…… 제발 커피 좀 마시자.”
커피를 홀짝거리며 겨우 시간을 만들어 넣은 혜담은 이어 울리는 전화에 급히 커피잔을 입에서 떼며 투덜거렸다.
“네. 레오 루이스 팀장…….”
― 혜담 씨!
전화 응대용 멘트를 다 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에 혜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전화를 받는 데 집중하려 바짝 세웠던 상체를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고는 내려놓았던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루나 씨.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 덕분에요. 저 어제도 거기 가서 곱창 먹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요즘 많이 바쁘죠? 그러니 간략하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언더웨어 사이즈 어떻게 되세요?
“네?”
― 언더웨어 사이즈요. 타이트하게 입거나 크게 입는 것 중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시간만 있으면 맞춤으로 했을 텐데 이번엔 기성으로 나가려고요. 다음 시즌부터는 같이 맞춤으로 들어갈 거예요.
뜬금없는 루나의 말에 혜담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레오의 언더웨어 사이즈를 내가 어떻게 알아? 준석이 옷이 대충 맞는 걸 보면 115쯤 되겠지. 겉옷 취향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비서라고 하지만 직장 상사의 속옷까지 관여하지는 않는데요.
“……115?”
― 네? 그렇게 큰 걸 어떻게 입어요?
대충 어림짐작해 준 말에 돌아온 루나의 되물음에 당황한 건 혜담이었다.
그렇게 큰 걸 어떻게 입냐니. 그놈이 입으려면 최소 그 정도 되야 하거든. 퍼스널 쇼퍼라며 대충 사람 보면 견적 딱 나오지 않나? 레오랑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다면서 그거 하나 모른다고?
“그 정도는 돼야 맞으실 텐데요.”
― 혜담 씨. 전 지금 혜담 씨 사이즈 묻는 거예요.
“제 사이즈요?”
― 지금 마지막으로 주문한 물건 체크하면서 사이즈 확인 중이거든요. 겉옷은 기성복 100 맞으시죠? 한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속옷은 취향이 들어가서 확실하게 체크하려고 연락드린 거예요. 그리고 신발 사이즈도 말해 주세요.
“토요일에 주문한 물건 말씀하시는 거죠?”
― 네. 레오 건 이미 준비 끝나서 배송 나갔고, 혜담 씨 물건들은 오늘 내로 정리해서 내일 댁으로 배송해 드릴 거예요.
다다다다 쉼 없이 쏟아지듯 나오는 루나의 말에 집중하는 혜담의 머리 위로 물음표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토요일 늦은 오후. 호텔 룸에서 일어났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갑자기 옷을 고르라고 했고, 못 고르고 있었더니 레오는 다 하겠다고 했다.
설마…….
“루나 씨. 그때 제가 선택하지 못해서 모두 구매하기로 했던 물품이 제 것이었나요?”
― 네.
“정확히 어떤 물품이었는지 말해 주실 수 있으세요?”
― 기본 정장으로 다섯 벌, 파티용으로 두 벌, 각 옷에 맞는 셔츠를 기본으로 커프스와 시계, 행커치프가 있어요. 구두는 다섯 켤레고요. 기본 정장 다섯 벌은 출퇴근 때나 컨퍼런스에 동행하실 때 입으시면 돼요. 파티용은 말 그대로 파티용. 조합해서 입으시기 편하게 카탈로그도 같이 보내 드릴게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루나와 스무고개 같은 통화를 하던 혜담은 길게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이마를 매만졌다. 지금 제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말들은 루나와 할 것이 아니라 레오와 나눠야 할 대화였다.
“루나 씨, 제가 오늘 내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급하게 통화를 끝낸 혜담은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팀장실과 레오의 스케줄을 번갈아 보았다. 점심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20분. 이동시간까지 고려해서 10분 안에 결판을 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혜담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났고, 10초 후 팀장실에 서 있었다.
자신이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보고 있는 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레오를 보자 저도 모르게 곧게 서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하고 선 혜담의 눈에 살짝 움직이는 그의 손이 들어왔다.
지금 보고 있는 거 다 봐 가니까, 잠시 기다리라고? 들끓는 충동에 무작정 들어오긴 했지만 얼떨결에 시간이 생겨 버린 혜담의 머릿속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급한 일 있어요?”
“…….”
멀끔한 얼굴이 보이고 온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혜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토요일에 구매한 물건들과 관련하여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앞으로 필요할 테니 회사 차원에서 제공하는 겁니다.”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고, 사실을 알자마자 저를 이 방으로 뛰어 들어오게 만든 일이 회사 차원에서 제공하는 것이라는 한마디에 해결되어 버렸다. 루나의 말대로 앞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나 모임에 동행하는 경우가 왕왕 생길 것이다. 그리고 제겐 그런 격식 있는 곳에서 입을 만한 고급스러운 옷이 없다.
그런데 왜 난 흥분했고, 앞뒤 가릴 것 없이 이곳으로 뛰어 들어왔을까.
“문제 있습니까?”
어떤 표정도 읽히지 않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금 묻는 레오의 말에 혜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 제시한 말도 안 되는 연봉에 다른 직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차, 패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제가 봐도 고가로 보이는 옷과 장신구까지. 그 모든 것이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제게 보이는 관심의 대가 같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지? 그런 걸 왜 내게 사 주냐고? 받지 않겠다고? 우린 회사 상사와 부하 사이일 뿐인데 과하다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나?
레오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제 착각임을 깨달았다. 저 혼자 의미를 만들고 프레임을 씌우고 오해하고 놀라고…… 그리고 지금은……. 울컥하는 기분과 누군가가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에 혜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저 혼자 난리였다. 같이 보낸 밤에 의미를 두지 말자면서 먼저 선을 그은 것도 자신이다. 레오는 처음부터 그런 건 생각지도 않은 원나잇일 뿐일 텐데.
“문제없습니다. 점심 약속에 늦지 않도록 차 준비하겠습니다.”
물고 있던 입술을 놓은 혜담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돌아섰다. 이곳에 들어온 핑곗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느릿하게 세 걸음을 걸어 문 앞에 선 혜담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래로 내렸고, 문이 조금 열리려는 순간 다시금 문이 닫혔다.
문 위쪽을 짚고 있는 손과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 이제는 익숙한 커피 향에 혜담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들어와서 이런 표정으로 나가요?”
“오전부터 내린 진눈깨비 때문에 교통이 혼잡해서 평소보다 5분 정도 빨리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나가 뭐라고 했어요?”
“회사 업무상 필요한 물품이고, 제게 제공되는 물건들이다 보니 사이즈 확인 때문에 연락을 했더군요. 제가 사용할 것이라고 명확한 통보를 받지 못한 상황이라 확인 후 다시 연락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말했다면, 혜담 씨는 거절했을 테니까요.”
저보다 키도 체격도 큰 레오에게 완전히 감싸지는 느낌에 혜담은 느릿하게 몸을 틀었다. 그의 얼굴이 아닌 어깨와 목선에 시선이 닿았다. 제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려 한다면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웠다.
그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혜담은 고개를 들었다. 목선에서 각진 턱이 보이고 단호하게 다물려 있는 입술이 보였다. 높은 코끝에서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눈을 살짝 치켜뜨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녹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복잡한 감정을 가득 품고 있는 녹안을 피하지 않으며 혜담은 입을 열었다.
“아니요.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팀장님이 제게 개인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회사 차원에서 업무상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
“키스해도 돼요?”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읊조린 레오의 목소리가 혜담의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