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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담! 아직 자? 속 쓰려 뒤질 것 같아.”
준석은 비밀번호를 거침없이 누르고 혜담의 집 안으로 들어서며 울렁거리는 배를 문질렀다. 같이 간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정신없이 노는 사이 혜담과 일행은 사라지고 없었다.
혜담의 입에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뽑아내던 상사 놈은 생각 이상으로 잘난 놈이었다. 첫인상으로만 사람의 점수를 매긴다면 단연 100점 만점에 최소 90점 이상을 받을 것 같았다. 이미 혜담에게 저질러 온 만행을 알기에 –100점에서 시작했다지만 정중한 태도와 예를 지킬 줄 아는 모습에 오히려 놀란 건 준석이었다.
꽤 괜찮은 상사같던데, 왜 그리 싫어하는지.
어쨌거나 지끈거리는 두통에 울렁거리는 위장과 사투를 벌이며 침대로 다가간 준석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세상일 아무도 모른다지만.
별일 없었다며? 옛날엔 먹튀했고, 지금은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이상한 놈이라며.
그런데 왜 둘이 그 좁은 침대에 뒤엉켜 자고 있는 거냐?
같이 있던 여자분은 택시를 태워 보내고, 상사 놈은 술 안 마셔서 알아서 가든지 기사인지 뭔지 부른다고 하지 않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쉽게 잇지 못한 준석은 여전히 불편한 배를 문지르며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거의 몸 전체를 상사 위에 걸쳐 놓은 채, 잠든 혜담만 건드려서 깨울 만한 방법을 찾던 준석은 저를 응시하고 있는 녹안과 마주치는 순간 아주 잠시 숨을 멈췄다.
한 손으로는 잠든 혜담의 등을 약하게 토닥이면서 다른 손으로는 제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는 이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나 놀라움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저를 귀찮은 파리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 정도로 보는 눈빛이었다.
오히려 숙취에 해롱해롱하고 있을 친구와 어제 한 약속대로 해장을 하기 위해 찾아온 준석이 마치 연인의 아침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고, 알지 말아야 할 것을 강제로 알아 버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얼떨결에 뒤로 물러선 준석은 혜담의 등을 토닥이다 못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이마와 머리쯤을, 하여튼 혜담의 대가리에 입까지 맞추는 그의 직장 상사의 만행을 고스란히 보고야 말았다.
그런 그놈도 문제이지만 방금까지는 깊게 잠든 것 같던 혜담 역시 깨어난 듯 슬쩍 고개를 들고는 눈도 떴다. 이어 분명 제게 그런 짓을 하는 놈을 봤음에도 혜담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사이 상사 놈은 침대에서 내려와 뒤척거리다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재차 잠을 청하는 혜담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 상사 놈도 혜담도 어느 정도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인가……. 아닌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가 과부화에 걸려 버벅거리는 사이 상사 놈은 벗고 있던 상의를 챙겨 입었고, 재킷을 챙겨 나가며 제게 따라 나오라는 손짓까지 했다.
“……제대로 못 잤으니 조금 더 자게 두세요. 숙취해소제도 먹였고, 평소보다 적게 마셨으니 그리 힘들어하진 않을 겁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뇌로 인해, 집 밖 복도로 따라 나간 준석은 마른세수를 하며 상황을 설명하는 상사 놈을 쳐다보았다. 잘난 놈은 자고 일어나도 잘난 놈인가. 어제와 다르게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조금 떠 있고, 분명 세수도 안 했는데 왜…….
“네?”
낮게 잠긴 목소리인지라 완전히 다 알아듣지 못한 준석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튀어 나갔다.
“제가 있던 거 모를 겁니다. 그러니 오늘 이렇게 우리가 만난 거 말하지 말아 달라고요. 묻지도 않겠지만.”
아니 같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방금 깨어나서 너희 둘, 눈도 맞췄잖아.
“직장 상사 아닙니까?”
“방금 그걸 보고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친구 집에서 뭐 하는 거냐고. 당장 꺼지라고 소리쳐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오히려 여유 넘치는 얼굴로 피식 웃기까지 하는 상대의 모습에 준석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금 혜담이 베타라고는 하지만 어릴 적엔 오메가였고, 특이 형질일 수도 있다. 베타인 제가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놈은 알파일 것이 분명했다.
“…….”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땅에 메다꽂았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혹여 제가 모르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석이 할 수 있는 건 주먹을 꽉 쥐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단 이놈의 말을 믿어 주되, 오늘 이 일이 혜담에게 불쾌한 일이라면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서 제대로 한 방 먹여도 되는 일이니 말이다.
“우리 못난이 오늘 하루 잘 부탁해요.”
이어지는 의심에 확신의 못을 박는 말을 하고 떠나는 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준석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놈은 어떨지 모르지만 혜담은 진심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담이 그와 관련된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거 내 첫 키스였는데, 좁은 침대에서 그러고 잔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와 끌어안고 잔다는 거 생각보다 기분 좋더라. 사람 품이 그렇게 따뜻한지 난 몰랐지.]
그 전과 뒤의 말은 온통 상사 놈을 욕하는 것이었지만, 테이블에 머리를 박기 전 주절주절 늘어놓던 혜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일방통행은 아닌가? 그런데 소리 죽여 떠나는 저놈은 뭐며, 혜담이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말은 또 뭐란 말인가.
복잡한 심경으로 혜담의 집으로 다시 돌아간 준석이 마주한 건 게으른 고양이처럼 침대 위에서 몸을 길게 늘어뜨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 혜담이었다.
“어우. 좋다. 어째 하루하루가 다르냐. 이번에 월급 들어오면 홍삼이라도 사 먹어야지. 죽겠다. 죽겠어.”
준석은 남의 속도 모르고 뜨끈한 내장탕 국물을 먹으며 앓는 소리를 늘어놓고는 이내 해장 소주 먹고 싶다고 입맛을 다시는 혜담의 모습에 착잡함을 느꼈다. 그런 제 기분을 감추려 커다란 깍두기를 입 안에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홍삼은 무슨……. 술이나 끊어. 새꺄. 필름 끊긴 게 자랑이냐?”
“참나. 니 새끼도 자주 끊긴다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세요. 끊겨도 집에 잘 들어와서 잔 거 보면 귀소 본능은 아직 잘 살아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네발로 기어갔는지 남의 등에 업혀서 들어갔는지 알 게 뭐야.”
“네발로 기어갔거든. 안 좋은 일 있어? 아침부터 인상 왜 그래?”
“니 새끼 상사 마음에 안 들어서.”
제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면서도 내장탕을 잘 먹는 혜담을 지켜보다 준석은 슬쩍 그놈을 입에 올렸다.
“아. 그걸 까먹었네. 야. 너는 어제 곱창 처먹으러 왔으면 같이 온 사람들이랑 곱게 먹다 갈 것이지. 와서 인사는 왜 해. 완전 당황했네.”
“나한테 온다는 말도 없이 와서 처먹고 있어서 궁금해서 그랬다. 맨날 너 잡아먹지를 못해 괴롭히는 게 취미인 상사 새끼 잘난 면상도 보고.”
“내가 곱창집 갈 때마다 너한테 보고해야 되냐? 글고 그놈 얼굴 봐서 뭣하게.”
“존나게 잘생겼더라.”
제 속은 뒤집히는데 잘만 처먹는 혜담의 모습에 억울해진 준석은 내장탕을 퍽퍽 퍼먹다가 슬쩍 떠봤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다.”
“그 정도 면상이면 뜯어먹고 살 만하지. 돈도 많지. 능력 있지.”
“성격이 지랄이라고.”
“어제 내가 그렇게 끼어들어도 젠틀하게 받아 주고, 인사하고 사람 괜찮드만.”
우리보다 세 살 어리다고 했던가? 하. 아침에 그 면상…… 그거 한 대 쳐 줬어야 하는데. 어린놈의 새끼가 분명 존댓말 하는데 기분 더러웠단 말이지.
준석은 속에 있는 마음과 달리 적당히 꿀 발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놈이 주말에 불러내서 일 시키냐? 아씨. 그 새끼 말하니 또 술 땡기네.”
“넌 술 좀 끊어야 돼. 새꺄. 뭔 일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하여튼 주말에 일하면 수당 더 챙겨 준다며!”
“……주긴 주지. 내가 진짜 통장 보고 일한다.”
다 먹었는지 수저를 내려놓고는 의자에 기대앉아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혜담을 보자 입맛이 떨어진 준석 역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더 안 먹어? 남았잖아.”
“입맛 없어. 새꺄.”
“오늘 지구 멸망의 날이냐? 니놈이 입맛 없게.”
더 먹으라며 숟가락을 제 손에 쥐여 주기에 준석은 마지못해 몇 수저 더 먹었다.
“그 새끼 알파지?”
“어.”
“넌 병원 갈 때 안 됐어?”
“안 그래도 종합검진 받을 때 정밀 검진 받아 보려고.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별 게 다 신경 쓰이게 해.”
“오메가면 좋겠어?”
“어서 처드시기나 하세요. 커피 마시러 가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준석은 태연하게 휘파람이나 불며 제가 다 먹기를 기다리는 혜담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로 잠결에 얼핏 눈을 뜬 혜담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지은 미소가 떠오르자 입 안이 썼다. 수십 년 친구로 지낸 제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준석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제부터 다시 커피 마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