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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 친절에서 모두 예외냐고.”
혜담이 당황스러워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레오의 말이 이어졌다. 왜 그 친절에서 예외냐고? 넌 정말 예외적인 인간이니까.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눈 맞추고 입 맞추고 배도 맞췄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단 말인가. 그를 보면 참 잘난 놈이라는 생각보다 만지고 싶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옷매무새를 보면 손부터 먼저 나가려고 해서 멈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연 이 행동을 해도 되는가 해서는 안 될 것인가까지 생각한 후에나 그의 옷깃을 만져 줄 수 있었다.
무심하게 태블릿을 하거나 펜을 들고 서명을 하거나 하다못해 젓가락질하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눈가가 가늘어진 채 불만을 잔뜩 담은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혜담의 손이 움직였다. 아래로 축 처져 있는 손을 천천히 끌어 올려 제 얼굴 옆을 지나 조금 더 높은 곳. 추운 길거리에서 온기를 품고 있는 레오의 볼에 손끝이 닿았다.
여전히 의심과 불만이 가득한 얼굴에서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손끝을 볼에 대었던 혜담이 조금 더 움직이자 이내 손바닥 전체로 레오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똑같이 해 줘?”
네가 정말 원한다면 다른 사람처럼 널 생각해 볼게. 다시 만난 이후 모르는 사람처럼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일로 엮인 상사와 부하처럼 지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버거운데, 그 역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니 지금까지의 제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네가 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사심 없이 널 직장 상사로만 대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것과 달리 혜담의 엄지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레오의 얼굴을 만지고 어두운 청록색을 띠는 그의 눈을 보고 있는 지금이 좋았다. 따뜻한 음식점에 있다가 추운 길거리로 나오면 술이 깨기 마련인데, 머리가 맑아지기는커녕 더 어지러워졌다.
정신이 확 들 만큼 따뜻하고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혜담은 어떻게 하면 그 커피를 맛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제가 발뒤꿈치를 들어 키를 높인다면, 그가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인다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댈 수 있을 것이다.
뜨겁고 부드러우며 말랑한 그 입술에 혀끝을 대고, 그 입술과 제 입술이 겹쳐지고 혀와 혀가 엉키면 커피 향이 제 몸을 가득 채웠다. 세상 무엇보다도 맛있고 진하며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씨발. 누가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 하래요.”
혜담은 직장 상사로 대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레오의 얼굴을 더듬고 그의 입가를 건드리던 엄지가 멈췄다. 멍하니 환상에 빠져 있던 혜담의 손등 위로도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를 악물고 웅얼거리듯 읊조린 그의 말뜻을 되새기던 혜담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진짜 어려운 거 알아요?”
무방비하게 있던 손이 잡히고, 제 손목에 얼굴을 대고 말하는 레오의 숨결이 손목을 간지럽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다가가려고 하면 도망가고, 철벽치고. 그래서 여유를 주고 지켜보려 하면 이렇게 도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릴까? 나 그래도 돼?”
제 의견은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명령이자 통보 같았다. 이제부터 제 마음대로 할 것이라는……. 몽롱한 술기운도 슬슬 밀려오는 잠기운 속에서도 그 의미를 확실히 짚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 바람에 잠이 깰 만도 한데 남은 술이 아깝다며 반 컵쯤 되는 소주를 단번에 마신 것이 화근인지 혜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제 의지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저기…… 팀장님. 택시…….”
저를 홀려 버린 눈동자에 사로잡힌 채 웅얼거린 혜담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봐. 또 도망갈 궁리만 하지?”
레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가늘어졌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말투는 사나운데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웃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못생기래.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이러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혜담아, 집에 가고 싶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그리도 고파하던 커피 향이 나른하게 몸을 감쌌다. 그리고 방금까지 저를 혼내는 것 같은 말투가 봄바람이라도 머금은 듯 부드럽게 풀려 사르르 귓가에 감겨들자 혜담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집에 가고 싶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들고 싶었다.
“나랑 같이?”
이번엔 혜담의 입에서는 “아니.”라는 단어가 나왔다.
“마음대로 갖고 놀아요. 이러든 저러든 우리 못난이 손에 든 장난감인데 어쩌겠어. 어떻게 갖고 놀든 상관없는데 아무 곳에나 버리지만 말아요. 그러면 진짜 화날 거 같거든.”
졸리는지 반쯤 감긴 눈을 끔벅거리는 혜담을 슬쩍 끌어당기자 쉽게 그의 몸이 달려 왔다. 은근슬쩍 그에게로 페로몬을 더 흘리며 한 팔로 감싸 안자 얌전히 안긴 채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집에 가요. 데려다줄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레오는 혜담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평소에는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침대에서만큼은 사근사근 제게 알아서 감겨 오는 그를 꼭 끌어안고 자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레오는 제 욕심대로 제가 원하는 대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혜담에게 미움이라도 받는다면? 쏙 들어가는 그 보조개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땐 대디와 코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이자 부부였고, 영원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각인까지 한 사이였다. 동등한 입장이지만 형질의 차이, 체격의 차이 등 많은 부분에서 대디가 우위에 있었다. 그랬기에 그 관계를 이끌어 가는 건 대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코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가끔 코맘의 “안 돼.”, “하지 마.”, “싫어.” 이 말에 토 하나 달지 않고 코맘이 원하는 대로 하는 대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데 이제는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품에 얌전히 안겨 서 있는 혜담이 “택시…….”라고 웅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레오는 “택시 잡았어요.”라는 거짓말을 했다.
로버트 대신 다른 기사가 몰아 온 제 차 뒷좌석에 축축 처지는 혜담을 태우고 옆자리에 앉은 레오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자요?”
“……응.”
길게 한숨을 쉬고 창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두 눈을 꼭 감은 혜담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레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루나와 격식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가슴이 갑갑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커다란 체격의 친구를 보자마자 그의 집에서 입었던 옷의 주인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제게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지 비속어가 섞인 말을 편하게 주고받는 것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루나는 그저 일로 만난 사람이고, 덩치 큰 친구는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허물없는 사이일 것이다. 그러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을 테지. 머리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저만 봐주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발음이 어눌해져서도 끝까지 상황을 책임지고 정리하려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제게 기대면 되는데, 제게 시키면 되는데. 졸리면 자고 쉬고 싶으면 쉬면 되는데 혜담은 기를 쓰고 모두 스스로 하려고 했다.
루나가 탄 택시의 번호와 콜을 불렀을 때 전송된 차 번호가 맞는지까지 확인하고서야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기는 혜담에게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야 말았다.
어이없어하는 그 표정이란……. 부정의 말을 하는 것과 다르게 혜담의 눈빛과 무미건조했던 빵 내음은 순식간에 음란해져 있었다. 타인과 같은 친절함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깊고 진한 절대적인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이지.
혜담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을 채운 건 은은한 빵 내음과 거기에 곁들이기 좋을 만한 커피 향이었다. 깊게 잠든 혜담을 안아 들고 그의 지문을 이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레오는 친절하게 그를 그의 침대에 잘 눕혀 주었다.
“잘 자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춘 레오는 달빛에 비친 잠든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맛있는 것도 먹였고, 그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사 주고 싶은 것들도 잔뜩 샀다.
인사도 했고, 이제 이 집을 나가는 일만 남았는데 잠든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레오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고, 혹여나 추울까 어깨까지 잘 여며 주었던 이불을 들췄다.
커다란 몸을 구겨 작은 침대에 겨우 모로 누웠을 때 그의 품엔 혜담이 안겨 있었다. 불편한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났지만 이내 그의 숨결이 편안해지기에 레오 역시 두 눈을 감고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마음껏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