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35화 (35/86)

35

“맛있어요?”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곱창을 잘 보고 있다가 노릇해진 것을 먼저 레오의 접시에 두곤 제 것 하나를 집어 먹던 혜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에 들어온 이후 레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잘 구워진 곱창과 곱창전골만 먹을 뿐이었다.

“궁금하죠? 작은 걸로 하나 드셔 보세요. 고기랑은 완전 다른 맛이니까.”

“고기 먹고 소주?”

반절쯤 찬 소주잔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곱창을 집는 루나의 모습에 혜담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싹싹하고 붙임성도 있으며 잘 웃고 대화도 잘 통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레오는 소주 몇 잔과 함께 한쪽으로 제쳐 두었다.

“오! 오?”

곱창 하나를 입어 넣고 꼭꼭 씹던 루나는 이내 소주잔에 차 있는 소주를 홀랑 비웠다. 그녀의 눈이 커지고 또 해사한 미소를 짓자 혜담은 냉큼 잘 구워진 곱창 하나를 그녀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징짜 마싰다.”

음식물이 입에 든 채로 중얼거리느라 발음이 뭉개졌지만, 루나는 한 손으로 입으로 가리고 웃더니 냉큼 곱창을 집어 먹었다.

“이모! 여기 곱창 3인분 더 주세요. 소주도 1병 주시고요.”

곱창 맛을 알았는데 갈빗살이 웬 말이냐. 말은 없지만 레오 역시 갈빗살이 아닌 곱창만 먹고 있었기에 혜담은 손을 번쩍 들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안 마셔?”

“생각 없어.”

루나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던 혜담은 어느새 제가 들고 있던 집게와 가위를 가져가 곱창을 굽고 있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두고 루나와의 이야기가 재밌어서 잠시 그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분명 제가 구워서 루나와 레오에게 주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일을 레오가 하고 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곱창이 제 앞 접시에 놓이는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 데려다주려고?”

쯧…….

저처럼 루나 역시 레오가 주는 곱창을 먹으며 하는 대화를 들으며 혜담은 물끄러미 레오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 난 너처럼 기사님 없어.”

“택시 있잖아.”

“이 밤에 위험하게 택시 타고 가라고?”

“한국 치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으니 걱정 말고.”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가 직장 상사인 만큼 루나와 그의 관계처럼 편해질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직장 동료들처럼 날씨를 두고 넋두리도 하고, 요즘 이슈가 되는 것들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물며 방금 루나와 나눈 대화처럼 서로 다른 어린 시절의 추억들로 빈틈을 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다 되는 일들이 이상하게 레오와는 되지 않았다.

잠시 레오가 곁에 있다는 걸 잊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그를 밀어내고 싶어 오히려 루나와의 대화에 더 집중했다.

그리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알딸딸한 기분으로 레오를 보고 있자 불편한 감정들이 왈칵 솟구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제게 플러팅을 하는 것 같은데, 지금 같은 경우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 친한 것도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 이러다 회사를 그만두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그런 사이처럼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의 방. 그 좁은 침대에서 같이 밤을 보낸 사람이 맞는지도 의문이었다. 모두 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닌지. 제가 자격지심이 있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레오와 자신을 나란히 두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제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졸려요?”

흐릿해진 초점으로 멍하니 레오를 보고 있던 혜담은 귓가에 맴도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집에 데려다줘요?”

방금까지 불판과 루나를 보면서 고기를 굽고 대화를 하며 옆모습을 보여 주던 레오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슬쩍 눈을 내리깔아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 혜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앞에 있는 소주잔에 손을 댔다. 이상한 망상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취하긴 취한 것 같았다. 남은 잔을 비우고 루나를 택시 태워 보내고, 레오야 알아서 잘 갈 테니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야지.

제가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술잔을 비웠다.

“다들 적당히 드신 것 같으면 그만 일어날까요? 루나 씨 댁이 어느 방향이세요. 콜 부를게요.”

휴대전화를 꺼낸 혜담은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휴대전화 충전을 한다는 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레오 휴대전화를 빌려서 콜을 불러야 할지 루나의 휴대전화를 빌려야 할지 난감해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이던 혜담은 제 어깨를 꽉 잡는 손길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야. 언제 왔냐? 여기 왔음 말을 하지. 안녕하세요. 이혜담 친구 최준석입니다.”

언제 나타난 건지 평소와 다름없는 서글서글한 말투로 준석은 알아서 제 소개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루나의 목소리와 침묵이 준석을 향했다. 이 와중에 준석의 큰 손은 혜담의 어깨를 몇 번 꾹꾹 누르더니 목덜미 뒤쪽을 시원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팀장님, 전에 말한 제 친구…… 야, 왔으면 가서 먹기나 해. 갑자기 인사하고 난리야.”

어설프게 덩달아 준석을 소개한 혜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로 옆에 있는 준석의 배를 꾹 밀어 제가 설 자리를 만들었다.

“나야 반가워서 그러지. 너 술 좀 마셨나 보다.”

“어. 어. 제발 간단하게 상황 수습하고 네 일행한테나 가.”

시끌벅적한 식당 안에서 혜담은 최대한 낮게 웅얼거리며 준석을 더 밀어내려 했지만 레오만큼이나 커다란 놈을 힘으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 노력과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준석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혜담은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벌써 다 드신 것 같네요.”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쪽 테이블에 관심이 많은지 계속해서 루나와 레오에게 말을 걸려는 놈의 가슴을 툭 치며 혜담은 어서 꺼지라는 뜻을 전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럼. 전 계산하고 콜 부르겠습니다.”

여기서 계산하고 뒷정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기에 혜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꿈쩍도 하지 않으려는 준석을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쿡쿡 찌르며 밀어내려 애썼다.

“최준석 씨?”

왜. 그러냐고 저를 보고 입을 벙긋거리는 준석을 한껏 노려보며 표정으로 꺼지라는 뜻을 전하던 혜담은 갑자기 제 옆으로 커다란 나무가 쑥 자라는 느낌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놈 둘이 제 앞과 옆을 가로막아 버리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취기는 오르지, 운신은 자유롭지 못하지, 답답함에 혜담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안녕하세요. 혜담이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팀장님 맞으시죠?”

“혜담 씨가 제 이야기도 하나 보군요.”

“직장인이 친구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는 이야기야 다 뻔하지. 콜 몇 개 불러?”

위에서 오가는 대화에 바짝 긴장하던 혜담은 제 등을 받치며 저를 보는 준석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웠는데 평소처럼 놈이 든든하게 받쳐 주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루나 씨랑 나. 팀장님은 술 안 드셔서, 아니면 로버트 씨 부르면 되니까 두 대만 불러 줘. 나 배터리 없다.”

준석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던 혜담은 제 손목을 슬쩍 잡아당기는 힘에 훅 몸이 끌려갔다. 평소였다면 몸을 제대로 가눴겠지만 비틀거린 혜담은 레오의 어깨에 얼굴을 쿡 박고 말았다.

“제가 여기 정리할 테니 혜담 씨 친구분은 동행한 분들과 함께하시죠. 다들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얼떨결에 레오의 어깨에 얼굴 박고 안기는 꼴이 되어 버린 혜담은 한 손으로는 제 코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레오의 몸을 짚어 균형을 바로잡았다.

여기가 자신의 단골집이기도 하지만 준석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거기다 준석이 운동하는 곳이 이 근처이니 운동 후 자주 들르는 곳이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굳이 아는 척하는 것까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머리가 아픈 혜담은 얼른 손짓으로 준석에게 가라는 뜻을 전했다.

“아, 죄송합니다. 약속도 없이 여기서 혜담이를 보니 반가워서 제가 실례가 많았군요. 이혜담, 내일 해장국 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레오와 몇 마디 나누는 것 같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곤 제 어깨를 다시금 꾹 잡았다가 놓은 준석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혜담은 코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라…… 루나 씨 댁이 어느 방향이라고 하셨죠?”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고 루나가 탄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본 혜담은 제 몸을 스치는 싸늘한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고는 옆에 서 있는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팀장님도 그만 가 보셔야죠.”

“원래 그렇습니까?”

“네? 어떤 걸 말하는지…….”

“원래 그렇게 잘 웃고, 말도 잘하고, 누구한테든 친절하냐고요.”

뭘 굳이 잘 웃고, 말 잘하고, 친절해. 이게 다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 어느 부분에서 뭐가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한 혜담은 저를 내려다보는 레오만 쳐다보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얼른 꺼져 버려. 나도 택시 타고 집에 가게.

“나한테는 왜 안 그러는데?”

뜬금없는 레오의 말에 꾹 다물고 있던 혜담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