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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34화 (3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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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물을 마시며 남아 있는 잠기운을 날리던 혜담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자괴감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아침잠이 많긴 했지만, 낮잠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주말에 할 일이 없어도 빈둥거리면서 영화를 보면 봤지, 낮잠을 자지는 않는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자고 일어난 마당에 또 몇 시간이 지났다고 잠이 들었단 말인가. 거기다 레오를 지척에 두고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더 어이가 없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룸까지 어떻게 옮겨졌는지 같은 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설프게 눈인사는 했지만 퍼스널 쇼퍼와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상황이었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레오가 건네준 물을 마시며 분위기를 살피던 혜담은 루나가 다가오자 얼른 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루나 스튜어트예요. 직업은 퍼스널 쇼퍼로 레오는 제 친구이자 클라이언트. 이혜담 씨 되시죠? 만나서 반가워요.”

“저 역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나 스튜어트 씨. 초면부터 실례를 범한 것 같네요.”

제게 먼저 악수를 권하는 루나의 손을 잡으며 혜담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피곤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가 오너라면 더 피곤하고 힘들 테고요. 거기다 오늘은 토요일이잖아요. 토요일까지 불러내서 일 시키는 상사 진짜 아닌데, 그놈의 돈이 뭔지. 어쨌거나 우리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잘 부탁드립니다.”

환한 미소를 짓고 활발하게 말하는 루나를 보는 혜담의 얼굴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꾹 눌러 참고 있는 말들을 그녀는 거침없이 늘어놓는 탓이었다.

“제가 더 부탁드려야죠.”

두 손을 꼭 잡은 채, 덕담과 좋은 기운을 주고받던 혜담은 제 손목을 슬쩍 잡는 손길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것부터.”

루나와의 화기애애한 소개를 뚝 끊어 버린 레오의 손에 이끌려 수많은 옷이 걸려 있는 행거 앞에 서게 된 혜담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 어떡하라고? 이제 막 자고 일어나서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 되는데.

옷? 뭐 네 옷 내가 골라야 해? 나 이런 거 몰라. 패션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서 매장에서 살 때는 직원이 골라 주는 대로, 인터넷으로 살 때는 모델이 입고 있는 것으로 사는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고가의 브랜드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 이상 숨겨진 브랜드 같은 것도 모르고 올해 유행이 뭔지는 더더욱 모른다. 시계나 커프스 같은 것들은 지금껏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간단한 턱짓으로 레오가 제 의견을 전하는 듯했지만, 업무 중일 때는 빠르게 그의 의도를 파악하던 혜담은 지금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네?”

“골라야죠.”

“그건 쇼퍼님 전문…….”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급히 뒤쪽에 서 있는 루나를 바라본 혜담은 얼른 눈빛으로 그녀에게 SOS 요청을 보냈다.

“루나가 괜찮은 것들로 가져왔으니 이 중에서 선택하는 건 혜담 씨 몫이죠.”

분명 시선이 마주쳤지만 들고 있는 태블릿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회피하는 루나와 어서 고르라는 레오의 사이에서 난감해진 혜담은 천천히 레오를 훑어보았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매 아니던가? 이런 놈에겐 거적때기를 걸쳐 놔도 독특한 패션으로 승급시킬 것이 뻔하다는 결론을 내린 혜담은 다시금 행거로 시선을 돌렸다.

연말 파티. 정장 고르고 셔츠 고르고, 시계랑 커프스 고르고 행커치프와 구두. 그게 기본이겠지? 아. 넥타이, 스카프 같은 소품도 설마 내가 다 골라야 해? 비슷한 색상과 비슷한 디자인, 정장이 다 거기서 거기지 옷깃 조금 다르고 주머니 위치나 모양 좀 다른 걸로 뭐 어떡하라고!

“못 고르겠어요?”

손끝으로는 옷을 만지고 눈으로는 디자인을 보고 있지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혜담은 레오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고는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떤 스타일은 좋아하시는지라도…….”

“못 고르겠으면 다 할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망설임 없이 혜담은 얼른 대답했다. 네 돈으로 네가 사는 걸 내가 왜 말려. 다 사. 그리고 네가 그날 알아서 골라서 입어. 여기 계신 쇼퍼님을 불러서 골라 달라고 하든 로버트에게 말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다행이네요.”

“또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행거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도 잠시 굳이 고를 것도 없이 루나가 준비해 온 것들을 다 산다는 말로 그 앞을 벗어난 혜담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이제 해도 졌는데, 그만 집에 보내 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루나와 레오를 번갈아 보며 혜담은 제 뜻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밥이나 먹죠.”

“밥?”

“너도 같이 가든지. 둘 다 일부러 토요일에 시간 낸 건데 그 정도 보상은 해야지.”

밥이라는 한 단어에 루나가 먼저 반응하기에 타이밍을 놓친 혜담의 시선은 여전히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어감 상당히 이상한데? 너도? 마치 동행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예의상 한번 물어본다는 식으로 들린다?”

“물건 보는 눈만 좋은 건 아니었네.”

“뭔지 몰라도 나도 먹을래.”

“왜?”

“맛있는 거 먹을 거잖아.”

티격태격하는 것이 분명한데 둘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깔려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한 번의 실수로는 쉽게 깨어지지 않을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이었다.

“넌 그냥 가라.”

“싫어. 나도 먹을 거야. 네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웬만한 걸로 맛있다는 말조차 하지 않잖아. 그런 네가 가는 곳이라면 아주 허름하더라도 맛집이라는 건데 그 정보를 내가 왜 놓쳐?”

“로버트한테 식당 리스트라도 달라고 하든지.”

“아니지. 그런 건 혜담 씨가 더 잘 아는 거 아냐? 유럽도 아니고 로버트가 한국 음식점까지 완전히 꿰고 있는 건 아니잖아.”

“웬만한 곳은 다 알아.”

“지금 우리 셋 먹으러 가자며.”

“그런데.”

“혜담 씨, 자주 가는 식당 있어요?”

빠르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눈과 손은 일을 하고 있었다. 루나는 방금 레오가 선택한 물건들을 확인하고, 체크하고 있었고. 레오는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자신은 없는 듯 각자의 일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던 둘의 시선이 한 번에 제게 쏠리자 혜담의 입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와. 혜담 씨. 보조개 있었어요? 진짜 귀엽고 예쁘네요.”

“자주 가는 곳 어디예요?”

참 잘생긴 놈과 시원시원한 외모에 활발한 성격의 여성은 역시나 각자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딱히 자주 가는 곳은 없습니다. 루나 씨.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렇게 입술 꾹 다물 때만 생기는 거예요?”

“그래도 좋아하는 음식은 있을 거잖아요.”

조금 전 둘이 대화할 때가 나았다. 두 사람의 과한 시선을 받으며 도망갈 궁리를 하던 혜담은 한 시간 뒤. 준석과 자주 가던 허름한 곱창집에 있었다.

“……이게 뭐라고요?”

“곱창이요. 루나 씨 고기는 옆에 새로 세팅해 주실 거예요.”

“부위가…….”

“소 내장입니다.”

혜담은 제가 나온 대학교 앞 곱창집 양철 둥그런 테이블에 어설픈 자세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두리번거리면서 질문을 하는 루나와 다르게 레오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하긴 깔끔하고 깨끗하고 최고급인 최상의 레스토랑이나 음식점만 다녔을 레오의 기준에 이곳은 당장 없어져야 할 곳일지도 몰랐다. 그러게 왜 나보고 식당 정하라고 난리 쳐서는.

“……내장?”

“위, 소장, 대장”

한국말을 잘하긴 했어도 평소 잘 쓰는 단어가 아닌지라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루나에게 조금 더 상세히 말하는 순간 전골냄비로 향하던 젓가락이 사라졌다.

“…….”

“거기다 매워요. 루나 씨 매운 거 잘 먹어요?”

“아뇨.”

구워 먹는 것도 일품이지만 소주와 곁들이려면 전골이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전골 옆으로 구워 먹을 고기 판이 준비되자 혜담은 집게부터 집어 들었다.

“루나 씨 앞쪽으로 고기 구워 드릴 테니, 이쪽 것만 드세요. 팀장님은 곱창 잘 드시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레토르트 곱창도 잘 먹던 레오였기에 혜담은 그가 아닌 루나만을 챙겼다. 혜담은 주문한 갈빗살은 루나 앞으로 곱창들은 레오 앞 불판으로 올리고는 막 나온 계란찜도 그녀 앞으로 밀어 주었다.

“루나 씨 다음에 이런 곳에 오면 소주랑 꼭 같이 드셔 보세요. 와인이나 양주도 좋지만 한국 음식엔 소주죠. 치킨엔 맥주지만.”

“우리도 마시면 되죠. 일 끝났잖아요.”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벨을 누른 루나의 미소에 혜담은 같이 웃어 버렸다. 오늘 한 일들이 업무의 연장이냐고 묻는다면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곱창에 소주가 빠지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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