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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33화 (3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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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같은 토요일. 느긋하게 늦잠 자고 일어나 근사한 한정식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아이 쇼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억대의 차를 샀다. 이어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호텔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까지 마시게 되자 혜담은 생각만 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차 괜찮죠?”

“제가 계약 조건으로 내건 차 때문에 일부러 토요일 시간을 빼서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오늘 이 일들이 목요일 날 말씀드린 것과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실수?”

“네.”

혜담은 향긋한 페퍼민트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실수로 하고 싶어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푹신한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머금더니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레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말한 대로 해 준다는 것인가. 실수로 우연히 일어난 일.

지금 그의 대답은 회사 상사와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제 말을 들어준다는 의미였다.

“다음 일정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이런 애프터눈 티 같은 건 같이할 이유가 없었다. 목적이 있을 때만 같이하는 사이니까.

“30분 뒤에 퍼스널 쇼퍼를 만날 겁니다. 크리스마스 연말 파티 준비 중이라는 건 알고 있죠?”

“네.”

“선물도 체크하고 의상 선정할 겁니다. 끝나고 저녁도 먹고.”

“그 저녁에 저도 동행해야 합니까?”

“늘 느끼지만 혜담 씨는 저와 같이하는 일들을 부담스러워하는군요.”

“솔직히 지금 이 상황도 사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너무 많은 생각은 좋지 않다니까. 다음 약속 시간까지 말 걸지 않을 테니 편히 쉬어요.”

먼저 대화를 끝내고는 창밖 먼 곳으로 시선을 두는 레오의 모습에 혜담은 제 앞에 놓인 페퍼민트 차를 조금 입에 머금었다. 상황이 어떻든 편안한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에서 탁 트인 전망을 보고 있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레오를 의식하며 긴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미약하게 남아 있는 둔통에 점차 자세가 흐트러졌다. 결국 소파의 안락함을 이기지 못한 혜담의 몸은 일인용 소파에 푹 파묻혔다.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곁에 있던 레오의 존재는 점차 잊혔고, 나른함에 혜담은 가물거리던 눈도 감고야 말았다.

* * *

“예쁘지?”

“진짜 못생겼네.”

“그 말버릇 좀 고쳐. 마음에 들기만 하면 죄다 못생겼대.”

“볼이 포동포동한 게 못생겼잖아.”

“솔직하게 예쁘다. 귀엽다. 하면 되지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부정 타.”

“누가 들으면 진짜 한국인인 줄.”

“반쪽은 한국인이야.”

레오는 화면 속에서 배시시 웃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현재는 퍼스널 쇼퍼인 루나를 불렀더니 기껏 와서 한다는 일이 아이 자랑이었다. 한마디 했더니 구시렁거리면서도 옆에 꼭 붙어 앉아 다양한 영상과 사진을 강제로 보여 주는 루나의 얼굴에는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이제 혼자 설 수 있다느니 어제는 엄마라고 불렀다느니 꼬마에 대한 설명이 절로 따라붙었다.

“내 딸이지만 너무 귀여워!”

“못생겼다니까.”

루나의 아이 사진과 동영상을 구경하던 것을 멈춘 레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거실에 준비되어 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몇 가지 물건을 툭툭 건드리는 것으로 의사 표시를 한 레오의 발걸음이 행거 앞에 멈췄다.

“그 사이즈는 왜 챙겨 오라고 한 거야?”

“여기 어울릴 만한 커프스랑 시계는?”

루나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혜담에게 어울릴 것 같은 군청색 정장을 꺼낸 레오는 장신구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군청색이랑 어울리는 건 여기 있어. 시계도 금장보다는 은장으로. 그런데 넌 언제까지 솔로로 그렇게 지낼 거야?”

“여자든 오메가든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무심하게 대답한 레오는 깔끔한 은장 시계를 집어 들었다.

“설마 너 그 사건 때문에 아직도 그래?”

“쓸데없는 소리. 겉옷은 이게 다?”

정장에 시계를 고른 레오는 코트가 걸려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건 걔가 미친 거였고, 안 그런 사람이 훨씬 많거든. 남의 애도 예쁜데 내 애는 얼마나 이쁜지 알아? 나도 조카 볼 때는 이 정도 기분은 아니었다고. 그쪽은 네 사이즈고, 평균 사이즈는 이쪽.”

물건들을 보며 하나씩 고르는 와중에도 둘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너의 집안 핏줄을 그렇게 매정하게 끊지 말아 줘. 네 성격엔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외모만큼은 완벽하잖아. 내가 태교할 때 네 사진 보고 했는데. 그러니 네 2세는 정말 더 완벽할 거야. 기대해도 되지?”

“…….”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대는 루나의 입을 막으려 레오는 코트 두 벌을 골라 그녀에게 안겼다.

“너 닮은 아기 원하지 않아?”

“싫어.”

“싫다고?”

자신을 닮은 2세라니.

파파라치들과의 전쟁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떠올리면 우울했고 방금 루나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일까지 생각하면 말 그대로 지옥과 다름없었다. 부모님이 그러셨듯 저 역시도 아이를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모든 사건 사고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연애도 2세도 관심 밖이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제게 혜담은 참으로 새로운 존재였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개인적인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한 것도 사소한 손짓과 행동으로 자신을 집중시키는 것도 혜담이 처음이었다.

그를 배려해 휴가를 줘 놓고는 보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만들어 내려 했다. 로버트를 닦달했고, 아직까지 그가 원하는 차종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휴대전화는 꺼져 있지, 벨은 고장 났는지 아무리 눌러도 울리지 않지. 결국 선택한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주친 얼굴이 몽롱한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그를 끌어안고 입 맞추고 탐하고 싶다는 생각이 휘몰아치자 다급하게 그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

급히 로버트에게 연락해 빈속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달라 부탁했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혜담에게 밥을 먹였다. 고용계약서 이행이라는 핑곗거리로 차도 사 줬다.

바쁘다는 루나를 불러냈고 시간을 끌기 위해 애프터눈 티도 마셨다. 그렇게 자고도 피곤했는지 돌아다니던 중에도 몰래몰래 하품을 하던 혜담은 은은한 햇살을 받으며 잠들어 버렸다.

덕분에 잠든 모습을 마음껏 감상했고, 곤히 잠든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호텔룸으로 들어왔다. 제 물건을 고르는 것보다 혜담의 물건을 고르는 것에 더 신경 썼다.

그런데 루나는 몇 단어를 가지고 혜담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들었다.

혜담을 닮은 아기라면? 그를 닮은 커다란 눈에 보조개까지 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레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런 아기 얼굴에서 저를 닮은 부분까지 있다면?

“확실하게 대답해 진짜 싫어?”

“최악이지.”

잠시 혜담을 닮은 2세에 흔들리긴 했지만, 레오는 루나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엇보다 오메가 남성의 임신과 출산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모든 건 제가 아닌 혜담이 부담해야 할 몫이었다.

* * *

호텔 라운지에서 레오와 애프터눈 티를 마시던 중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알게 된 혜담은 구르듯이 침대를 벗어났다. 어둑한 곳을 둘러보던 혜담은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와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낯선 여성의 목소리와 레오의 목소리. 둘은 격식 없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정확히 모든 말이 다 들리는 건 아니지만 띄엄띄엄 들리는 대화로 이것저것 알아낼 수 있었다.

옷이나 시계, 커프스와 관련된 말에서 여자의 직업이 퍼스널 쇼퍼라는 걸 알았고, 이곳은 호텔 룸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잠든 척을 할 수 없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며 머리를 손으로 빗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혜담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떻게 아이가 싫을 수 있어?”

“싫은 건 싫은…….”

문을 열고 한 걸음 나가는 것과 동시에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어요?”

넓은 호텔 룸 거실엔 수많은 행거와 물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레오와 그의 곁에 딱 붙어 있는 여자를 본 혜담은 머리부터 살짝 숙였다.

환한 미소를 짓고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며 혜담은 머쓱한 표정으로 괜히 제 머리를 한 번 더 쓸어넘겼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뭘 하면 될까요?”

“안 일어나면 조금 있다가 깨우려고 했어요. 혜담 씨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해 줘야 할 게 있으니 그 전에 뭐라도 좀 먹을래요?”

누군가에게 뭘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이렇게 먹이려 드는 건지. 제 등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어딘가로 이끄는 레오의 행동에 혜담은 얼른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제가! 제가 찾아 먹겠습니다.”

“여기 앉아 있어요. 물이 괜찮겠죠?”

다급하게 제 일은 제가 하겠다고 했지만 거실에 있는 소파에 혜담을 앉힌 레오는 직접 바로 가서 생수병을 가져왔다.

“전 괜찮…….”

레오가 어깨를 누르는 바람에 소파에 푹 앉긴 했지만 이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혜담은 직접 열어 주는 생수병을 어색하게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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