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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레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에 미적거리거나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 혜담은 차 문에 기대선 채 있는 레오를 보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뭐 먹었어요?”
무언가를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혜담은 굳이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 주는 레오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팀장님.”
“네.”
“오늘 토요일인데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고, 갑작스럽게 레오를 맞이하고 정신없이 씻고 나오느라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던 혜담은 멀뚱하게 말을 꺼냈다.
“어서 타죠.”
“무슨 일인지 먼저 말씀을 해 주셔야…….”
“밥 먹으러 갑시다.”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어서 타라고 재촉하는 레오의 말에 의문스러움이 더 증폭되었다.
“급한 일정이라도 있습니까?”
“……네. 급한 건이니 조금 서두르죠.”
도대체 얼마나 급하길래 자는 사람까지 깨워서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얼결에 조수석에 오른 혜담은 어디론가 통화를 하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내비게이션이 켜져 있지도 않아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불어로 통화를 하는지라 슬쩍 엿듣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 상황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목요일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 깨고 잘 수가 있지? 꿈도 꾸지 않고 안락한 숙면을 취했다. 레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더 즐길 수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거의 이틀을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잠만 잤다.
긴 시간을 잤다는 것을 떠올리고서나 출출함이 느껴지는 배를 만지면서 혜담은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 중인 레오를 바라보았다. 몸정이 마음정 되면 안 되는데. 어차피 매달린 건 자신이고. 레오는 그에 응했을 뿐이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자신의 말에 레오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햇빛을 받아 금발로 보이는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이 아닌 밝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높은 콧대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옆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하지. 정말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던 그는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집요했고, 거칠었다. 자신만큼이나 자제력을 잃은 것 같으면서도 레오는 자신의 상태를 계속해서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쾌락과 향락 속에서 터뜨린 울음을 보는 그의 눈빛은 지금도 선명히 떠올랐다.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뜨거운 밤을 보낸 것 같았다. 계속해서 부정했지만 제가 그에게 품은 복잡한 감정들 이면에는 그를 향한 애정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편한 몸으로 눈을 떴을 때도 제가 있던 곳은 그의 몸 위였다. 어린아이를 가슴에 올려놓고 재우는 부모처럼 레오는 자신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랬기에 미처 어떤 행동을 할 새도 없이 또다시 그의 품에 안기게 됐지만 그런 일련의 것들을 떠올리면 계속해서 한 가지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걱정이라든가 흐트러진 집과 자신 그리고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침대까지 본 후 드러난 안도 같은 것 말이다.
배를 문지르며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던 혜담은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퍼뜩 흐트러진 몸을 고쳐 앉았다.
“정말 잠만 잔 거예요?”
차 안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데다 통화까지 하고 있던 그였기에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하는 말에 혜담은 얼른 배에서 손을 뗐다.
“네?”
“아무것도 안 먹고 잠만 잤냐고요.”
“네.”
전화 통화를 잠시 멈추고는 의미 없는 대화를 건네던 레오는 이내 통화를 끝내고는 자신을 향해 몸을 틀어 앉았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 말씀해 주시면, 일정 체크해서…….”
그의 얼굴을 너무 뜯어본 적 같아 무색해진 혜담은 주머니에 손을 넣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늘 지니고 다니던 태블릿이 없다. 태블릿은 깜박했고, 급하게 챙긴다고 챙긴 휴대전화는 방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정을 체크해. 당장 로버트에서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앞으로 뭐 할지가 그렇게 궁금해요?”
제 난감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오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호를 그리면서 올라갔다. 커다란 손이 움직이기에 혜담의 시선이 절로 그리 향했다. 순간적으로 커피 향이 짙어졌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만 좇던 혜담은 그 손이 제 턱에 닿는 순간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내가 엉뚱한 걸 하자고 할까 봐 긴장돼요?”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하는 레오의 손끝이 움직였고, 혜담의 입가에 엄지가 닿았다. 레오의 손끝은 입가에서 아랫입술로 움직여 뭉근하게 입술을 짓누르고 나서야 사라졌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손이 멀어지고 나서야 혜담은 뒤로 몸을 빼곤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일단 밥부터 먹고 쇼핑할 거예요. 사야 할 것들이 있어서.”
“퍼스널 쇼퍼와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
여전히 입가를 가린 채, 웅얼거리는 혜담의 시선은 레오가 아닌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혜담 씨.”
담백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도 혜담은 선뜻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요? 가끔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누군가가 하자는 대로 해 봐요. 그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니까.”
“제 일인데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그에게 휩쓸려선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다잡고서야 혜담은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친밀한 감정이 흘렀지만 제가 선을 그어서 그런 것일까? 저를 동요하게 만들었던 커피 향이 사라졌고, 은은한 미소가 서렸던 그의 얼굴의 덤덤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다 왔네요. 로버트가 일이 있어서 혜담 씨에게 동행 부탁드리는 거니 크게 불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가 멈추고, 차 문을 여는 레오를 보고서야 혜담은 하관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는 차에서 내렸다.
예약이 되어 있는 조용한 한정식집에서 담백한 식사를 끝낸 혜담이 다음으로 간 곳은 자동차 전시장이었다.
“이건 어때요?”
전시장에 있는 차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며 셀러의 설명을 듣던 레오의 질문에 혜담은 눈만 깜박였다. 며칠 전 그렇게 차를 부숴 먹었으니 새 차를 사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니 나설 일도 없고 그저 레오와 셀러의 곁에서 선 채 형식적으로 설명을 듣고 있던 혜담은 그의 질문에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네가 타는 차를 왜 나한테 물어.
거기다 차는 외형 말고는 모른다고.
“팀장님이 타시기엔 차체가 조금 낮지 않을까요?”
워낙 체격이 좋으니 어느 차를 타든 차가 작아 보이는 마법을 부리는 자이지만, 지금 그가 보는 차보다 옆의 차가 더 나아 보이기에 혜담은 짧은 소견을 건넸다.
“탈 일이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 차는 너무 크지 않나?”
별생각 없이 제가 보던 차에 눈길을 준 그가 하는 말에 혜담은 잠시 그가 한 말의 뜻을 찾으려 침묵했다.
“아! 선물하시는 건가요? 팀장님 차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혜담 씨 차 보고 있는 겁니다.”
낮고 간결한 레오의 말에 혜담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소화가 잘되는 한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워서 그런가? 길게 이어지는 셀러의 설명에 조금 졸리다 싶었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혜담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작성한 고용계약서에 원하는 차량은 보고한다고 했는데 여태 보고하지 않아서 직접 나온 거니 혜담 씨가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해요. 개인적으로 여기 이게 좋아 보이긴 한데 어때요?”
레오의 말을 들은 혜담의 눈동자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자동차의 가격표였다. 지금껏 제삼자의 입장에서 ‘마음껏 보고 즐기고 고르세요.’라는 심정으로 뒤에 서 있었지만 제 차를 사는 것이라면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실제로 계약서에 차량 지원이라는 항목이 들어갔고, 제가 원하는 차량을 제시한다고는 했지만 하루하루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부분을 깜박하고 있었다.
“…….”
차를 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험료와 각종 세금과 마지막으로 주차할 공간까지 떠올린 혜담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비싸고 좋은 차 누가 타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게 맞는 차는 중소형 차였다.
“여기 셋 중 하나 고르고 색상이나 옵션 부분 보죠.”
내 의견은?
레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띠고 안쪽 상담실로 안내하는 셀러를 보는 순간 혜담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