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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력과 권력, 유명세까지 모두 갖춘 집안에서 태어난 건 축복이면서도 저주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가 그랬다. 파파라치에 쫓기던 부모님의 교통사고 탓에 그는 예정일보다 빨리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제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엔 지긋지긋한 파파라치가 항상 있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외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아팠고, 크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제 관심을 끌려는 듯 소리치는 사람들이 싫어 부모님의 품에 파고들었다. 마음 편히 친구들과 어울려 논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에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이들 때문에 레오는 모두의 만류에도 중·고등학교는 기숙학교로 들어갔다. 학교 안에 있는 동안엔 파파라치나 기자들이 얼씬거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안전하다고 여겼던 학교에서 일어난 납치미수 사건은 레오의 목에 지울 수 없는 상처까지 만들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자 건강이나 취미가 아닌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의 이유로 체력을 키우고 운동을 배워야 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구설은 절로 생겨났기에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절로 사람들이 많은 곳이 아닌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았고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안 소유의 산이나 들에서 사냥과 낚시, 캠핑 같은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파파라치나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한국에선 이런저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영국에서 학업을 마쳤기에 한국에선 홀로 다녀도 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스무 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사라졌고,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됐으니까.
그 사건으로 지갑도 휴대전화도 부모님이 대학 입학 선물로 사 주신 고급 시계도 모두 잃어버렸다. 머리에 있는 작은 상처 외에 외상이나 내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다행이라 여겼다.
처음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한데.
레오는 제 품에서 잠든 혜담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울어서 붉어진 눈가에 레오의 손끝이 닿았다. 손길이 어설프게 잠을 깨웠는지 혜담이 몸을 뒤척이며 매끄러운 피부가 제 몸을 스치자 레오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먹어도 먹어도 먹고 싶다. 처음 그를 보는 순간 동했던 식욕과 음욕. 한번 맛보면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건 제 착각이었다.
어스름하게 들어오는 빛에 혜담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진짜 왜 이렇게 못생겼어. 사람 미치게.
꼭 감긴 눈을 보다 손끝으로 긴 속눈썹을 건드렸다. 부드러운 속눈썹에 레오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둥근 코끝에도 손끝이 내려앉았고, 깊은 잠에 빠져 편안하게 이완되어 있는 입술에도 손을 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된 자극으로 평소보다 더 붉고 도톰해진 입술을 탐했다간 멈출 자신이 없는 탓이었다.
짙은 파란색의 침구 위에서 제 품에 안겨 한껏 흐트러진 혜담. 귓가에 맴도는 신음과 저를 가득 품고 쾌락에 겨워 우는 모습까지.
처음인데 처음이 아닌 것 같고, 낯선 곳이 낯설지 않다. 갑자기 이러다 죽겠다고 도망가려는 그를 제 위에 앉혔을 때 활처럼 휘던 허리와 낭창하게 흔들리던 상체는…….
좁은 침대 위에서 둘이 자기엔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서 혜담을 제 몸 위에 올려놓고 재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이 반응하자 레오는 저를 억누르려 마른세수를 했다.
물을 때마다 혜담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입을 빌려 제 머릿속의 일들에 관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잃어버린 시간 동안 혜담과 같이 있었다면?
기억을 더듬던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제가 발견된 곳은 이 근처에 있는 읍내 한가운데였다. 그쯤 동양적인 정취에 흠뻑 빠졌었고, 오지 산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름 모를 작은 암자라든가 산세가 좋다는 곳. 또는 그렇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려 했다. 그랬으니 외딴 산골 읍내에서 제가 발견된 건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앞의 기억은 전혀 없다. 익숙한 검은 차가 앞에 서고 로버트가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반가운 마음에 끌어안았고, 로버트는 늘 그렇듯 자신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찾아서 다행이라고 말했고, 부모님이 걱정하시니 어서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그가 차 문을 열어 주자 차에 올랐다.
왜 여기 있냐고. 어떻게 여길 왔냐고. 그리고 가방은 어디 갔냐고. 빠르게 이어지는 질문에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빵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은 늘 빵을 좋아했기에 그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제가 잃어버린 시간에 혜담이 있다면. 저를 홀린 빵은 순수한 빵이 아닌 혜담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빵을 먹어도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빵 내음이 좋았다.
다시금 빵을 맛있다고 느낀 건…… 혜담이 구워 준 베이글이었다.
혜담이 뒤척거리자 이불을 끌어와 그의 등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다시금 그의 등을 토닥이던 레오의 눈빛엔 어둠이 가득했다. 그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제가 풀어야 할 문제다.
돌아가는 대로 이 동네와 읍내를 중심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찾아…… 생각을 정리하려던 레오의 입에서 다시금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얌전히 자 주면 안 될까? 애써 참고 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서 자극을 주면 본능적인 반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불편한 것인지 혜담이 몸을 작게 뒤척이다 작게 한숨까지 쉬기에 레오는 슬쩍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귀찮은 것인지 힘없는 손길이 제 손을 치워 내려 하기에 쉽게 물러나 주려던 레오는 멈칫하는 혜담의 움직임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꼭 붙어 있으니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았다. 미세한 이런 움직임이나 감정 변화까지 피부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니까.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진심을 담은 사과였지만, 상대에겐 그렇지 못한가 보다. 표현 그대로 짧은 시간 혜담이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성격을 떠올리자면 어떻게든 발을 뺄 것 같은데, 어떻게든 서로 닿는 것을 줄이려는 듯 움직이던 혜담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얌전해졌다.
“왜요?”
“……어. 저…… 크흠.”
낮고 잠긴 그러면서 갈라진 목소리까지 좋으면 어쩌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걱정했겠지만 그 이유를 알아서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기에 오히려 기분 좋아진 레오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이거 좀 어떻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건 너도 알잖아.”
“양심이 있으면!”
늘 격식 차리고 멀리하려더니 편하게 말하는 혜담이 고개를 번쩍 들고 항의하는 모습에 레오는 몸을 굴려 그를 제 아래 두었다.
“그런 거 없어.”
많이 참았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인내심 따위는 제겐 없는 것 같았다.
샤워를 끝낸 혜담은 둔통이 있는 허리를 두드리며 수건을 찾다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러곤 욕실에 있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인간의 피부색은 원래 흰색. 흰색이 아니라 살구색. 인종이나 타고난 것에 따라 갈색 계열일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다.
태어나길 동양인으로 그리고 살색에서 조금 까무잡잡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제 피부는 붉은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붉은 얼룩이 가득한 점박이라고나 할까? 샤워볼이 스치기만 해도 아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가슴이나 다리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저번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시나 제대로 미친 놈. 힘들다고, 그만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들어 처먹지를 못하는 건 어떡하란 말인가. 모질게 쳐내지 못하고 그가 주는 쾌락에 빠져 헐떡거린 제 죄도 있기에 마음껏 그를 원망하지도 못하는 혜담의 입에서 후회와 탄식이 가득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본능에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쩌자고. 거기다 제가 먼저 입술 갖다 댔으니 그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도 없다.
언제까지 욕실에 숨어 있을 수도 없기에 미적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나온 혜담은 집 안을 가득 채운 맛있는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아주 바보가 아니긴 하지. 있는 레토르트 식품으로 상을 차려 놓은 레오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은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건만 이놈은 때깔이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자…… 크흠. 잘 먹겠습니다.”
목을 가다듬고 물을 마시고서야 혜담은 제대로 된 인간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 역시 심한 독감에 걸려 다 죽어 갈 때나 내는 소리 같지만 말이다. 곧바로 식탁으로 가는 대신 방으로 들어간 혜담은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로버트는 언제쯤 오려나? 오전에 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뭐 했다고 벌써 오전 11시……. 뭐 하긴 뭘 해. 또 붙어먹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
현재 시각을 보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도 잠시 익숙하지는 않지만 들어 본 적 있는 쿵 소리에 혜담은 얼른 문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