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소주를 다 먹고 마셔 버리고 싶지만 취했다 말실수하는 것이 두려운 혜담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에 침대는 저쪽 방에 하나밖에 없거든요. 팀장님은 거기서 주무시면 돼요.”
“내가 그 침대를 쓰면 혜담 씨는 어떡하려고요?”
“이 집이 내 집인데 어디서든 못 잘까. 갈아입을 옷 챙겨 드릴 테니, 저쪽 욕실 쓰시면 되고…….”
“옷?”
“왜요? 없을까 봐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기에 혜담의 말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문하는 그 짧은 단어에 레오의 복잡한 감정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내 옷 아니니 사이즈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맥주캔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친구 거.”
“전에 말한 친구?”
거칠어졌던 커피 향은 사라졌지만, 레오의 말투엔 가시가 있는 것 같았다.
질투라도 하는 거야 뭐야.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옷장에서 준석의 옷을 꺼낸 혜담은 그의 곁에 옷을 내려놓았다. 지난번에도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훑어보더니 이번에도 똑같이 그러는 것이다. 그때처럼 친구라고 대답해 줬더니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친구 이야기를 한 적이…… 아 전에 술 마신 거요?”
나름 그와 함께 일하는 첫날인데 준석과 술 먹고 뻗었다가 그의 집에서 깨어나 부리나케 출근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작게 웃어 버렸다. 그의 앞에서 흠이 잡힐만한 일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알코올의 힘인지 괜히 웃음이 나고 단단히 다잡았던 마음이 해이해졌다.
“친구…….”
친구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옷을 보는 레오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에 혜담은 두 손을 들어 볼을 감쌌다. 나름 자제해서 두 병만 마셨는데, 레오가 귀여워 보인다니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술버릇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레오와 얽혀 있다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이 자리를 파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기에 혜담은 제 옷을 챙겨 들고 작은 욕실로 향했다.
혜담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레오는 작은 테이블에 있는 레토르트 음식들을 말없이 응시했다. 손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맥주캔에 남은 맥주를 단번에 비워 내고는 새 맥주캔을 땄다.
혜담이 향한 곳을 바라보다 다시금 찬찬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귀에 거슬리는 녹슨 문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쁜 정원도 아니고 대문과 집 사이에 있는 공간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네모난 평상 때문에 조금 돌아가야 하는 구조였다.
담은 제 키보다 낮고,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없는 오래된 집이건만 선뜻 혜담을 따를 수가 없었다. 문이 열려 있는 작은 집에서 나오는 불빛에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낮은 천장과 기성품들이긴 하지만 제겐 작게만 느껴지는 살림살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싱크대 위에 난잡하게 쌓여 있는 각종 레토르트 식품들과 그 옆에 있는 오래된 전자레인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늘 경계하고 날이 서 있던 혜담도 그의 공간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부드러웠고 작게 소리 내 웃는 것까지 보자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평소보다 발그스레한 볼로 이야기할 때마다 숨어 있던 보조개가 쏙쏙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달달한 빵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그러는 건 반칙이지. 코맘처럼 히든 오메가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 때문에 부모님도 그리 고생했다더니, 저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몇 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오르는 것인지 물소리와 함께 짙게 느껴지는 빵 냄새에 집중하던 레오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친구라. 같이 술도 마시고, 집도 편히 오가고 말도 편히 하겠지. 이렇게 시골집에 옷을 둘 정도면…….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튀자 레오는 한숨을 쉬며 몸을 바로 했다.
혜담이 씻는 틈을 타 먹은 것들을 정리한 후 욕실로 들어가던 레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왜 알고 있는 거지?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는 법도 방금 먹은 것들을 정리할 때도 욕실 문을 열고 온 지금도 자신은 망설이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처음 들어오는 욕실인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샤워를 했는지 모르겠다. 팔과 다리가 조금 짧긴 하지만 몸에 맞는 옷을 입을 때도 레오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봐요. 그 옷 팀장님께 맞죠? 침대가 좁긴 해도, 혼자 자는 데는 문제 없을 거예요.”
짙은 파란색. 순간 떠오른 잔상에 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제 예상대로 작은 싱글 침대의 커버는 짙은 파란색이었고, 침대 옆 창의 커튼은 파란 체크무늬였다.
하.
문가에 선 채, 레오는 이마를 짚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없다고? 정말 없다고?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심장이 뛰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 시선은 늘 혜담을 좇았다. 빵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동했고, 자신을 보고 동그래지는 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확신했다.
잠든 혜담의 얼굴에서 그의 달뜬 얼굴을 보았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난감하거나 불편한 질문에는 침묵을 고수하는 혜담은 참 수다스러웠다. 시시각각 변하는 빵 냄새에 고스란히 스며있는 그의 감정이 재밌어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막 오븐에서 나온 듯 따끈따끈 평온한 빵 내음은 자신을 보는 순간 삐죽빼죽해졌고 불안과 짜증과 노여움까지 스며 있었다. 사무적이며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그의 모습과 다르게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것이 눈에 보여 일부러 그를 압박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조건으로 그의 발목을 잡아 제 옆에 묶어 뒀다.
이불을 정리하다 말고 제가 등장하자마자 움찔하고는 또 어디론가 도망가려 하는 혜담의 앞으로 다가갔다.
“혼자?”
“네, 전 옆방에서 자면 되거든요. 그리고 방금 로버트 씨와 통화했는데, 내일 오전 중으로 이곳으로 픽업 오겠답니다. 보험사 역시 갓길에 세워져 있는 차를 발견해서 견인 중이라니 사고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혼. 자. 자라고?”
혜담이 제게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싶다. 왜 그렇게 시시각각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는지, 끝까지 숨기려 하는 게 뭔지. 그리고 지금 제 머릿속에 복잡하고 난잡하게 펼쳐지는 정사는 자신의 환상인지 실제 하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제가 잃어버린 기억과 혜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럼. 혼자 자지. 둘이 자요?”
“혼자 못 자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코웃음 치는 그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혜담은 딱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평소에는 잘 케어되던 자신의 페로몬은 혜담과 있을 때는 늘 제멋대로 날뛰었다. 가끔은 그대로 두기도 했지만, 페로몬으로 그를 압박할 생각은 없기에 조절하려고 노력해 왔다.
“혼자 안 자고 싶어서.”
지금껏 누르고 있던 페로몬을 놓아 버리는 순간 혜담의 표정이 변했다. 도톰한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귀여운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글동글하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가고 눈썹에도 힘이 들어갔다.
“지금 팀장님 말 제 마음대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랑말랑하던 말투가 다시금 딱딱하게 돌아가 있었다.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 주면…….”
혜담과 그의 뒤에 있는 벽까지 거리를 가늠하며 한 걸음 더 다가가던 레오의 말이 혜담의 입술에 먹혀 버렸다.
레오의 말을 먹어 버린 혜담은 자신의 기습적인 행동에도 큰 반응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머뭇거리며 몸을 떼었다.
눈바람을 맞으며 길을 헤맸고, 꽁꽁 언 몸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며 한잔했고, 실수하지 않으려 적당한 선에서 술잔도 꺾었다.
작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맞으며 서 있자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레오에게서 느껴지는 커피 향에 목이 탔다. 좋아하는 술을 마셨는데 왜 술이 아니라 커피가 고픈 것인지.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몸을 추슬러 옷을 챙겨입고 나온 혜담의 눈동자가 황급히 집 안을 훑었다. 대충 치워졌다고는 하지만 둘이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앉은뱅이 식탁 앞에 레오가 없었다.
갑자기 사라졌던 그날처럼 같은 자리에 그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커피 향과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듣고서야 경직되어 있던 혜담의 어깨가 풀렸다.
나름 뒷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남아 있는 흔적들을 치우고, 제 방으로 들어간 혜담은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방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굳이 변화를 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보존하려 한 것도 아니다.
시간을 흘렀고, 그도 자신도 변했는데 이 집만큼은 그때 그대로인 것 같았다. 인기척에 뒤돌아봤고, 준석의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터는 그를 보는 순간 목이 메어 왔다.
그래도 태연하게 대하려 했는데, 진심인지 짓궂은 장난인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면서 다가오는 그가 온달처럼 보였다. 그래서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