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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람 혼란스럽게 하는 눈빛이다.
진짜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이가 되길 원하나?
혜담은 자신을 응시하는 레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팀장님.”
“호칭은…….”
“저 좋아하…….”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과 흔들리는 차체, 둔탁한 통증과 낯선 소음까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기에 혜담도 레오도 꺼냈던 말을 완전하게 잇지 못했다.
길지 않은 소란이 멈추고 본능적으로 움츠렸던 고개를 든 혜담은 레오가 자신을 완전히 감싸고 있음을 알아챘다.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며 상황 파악을 하던 혜담은 괜찮냐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죠?”
벽처럼 제 앞을 감싼 레오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천천히 밀어내고 제일 먼저 본 것은 금이 간 전면 창이었다.
안전성만큼은 최상이며 완벽한 자율주행으로 어떤 위험에서도 완벽한 대비를 한다는 광고는 과대광고임이 분명했다. 레오와 이야기를 하느라 전방을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길을 달리는 차는 이 차뿐이었다.
마주 오는 차도 앞서가는 차도 뒤따르는 차도 없는 곳에서 사고가 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충돌 충격으로 인한 것인지 차도가 아닌 갓길 쪽으로 밀려나 멈춰 서 있는 차에서 먼저 내린 건 레오였다.
차 문이 열리고, 깨진 창 너머로 서서 앞을 살피는 그를 보다 덩달아 차에서 내린 혜담은 어깨가 뻐근한 것 같아 천천히 돌리며 레오의 곁으로 다가갔다.
“……멧돼지 새끼들 그때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전면부와 금이 간 창에 묻어 있는 피를 보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로드킬을 여기서 이렇게 당할 줄이야. 차에 무지한 자신이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기에 천천히 주위를 살피던 혜담은 차도 건너편에 누워 있는 거대한 것을 보곤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동물은 멧돼지가 확실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차를 살피는 레오를 보던 혜담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디가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비서가 상사를 보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안전성만큼은 확실하다고 자부하는 차에 탄 만큼 둘 다 안전벨트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다.
“이마 말고 다른 다친 곳이 있습니까?”
정확히 이마 위쪽인지 이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손을 뻗자 이내 레오는 혜담은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 직접 상처 부위를 눌렀다.
“전 괜찮은데, 혜담 씨는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다시 돌아온 말투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며 혜담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일단 보험사를 부르고, 로버트 씨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 후에 차에 들어가서 운행이 가능한지 보고…….
발로 부서진 범퍼 쪽을 건드리며 보험사에 전화를 걸던 혜담은 차에 오르는 레오에게 잠깐 시선을 뒀지만 이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풍경보라더니 점차 거세지는 바람도 바람이지만 이제 겨우 4시가 넘었건만 산속엔 이른 밤이 찾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험사라고 별수 있나, 최대한 빨리 출동한다는 말을 듣고 로버트에게도 연락했지만 그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몇 시간이 걸리든 차 안에서 보험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차를 본 혜담은 잠시 차에 탑승했다 내리는 레오를 쳐다보았다.
“전원이 완전히 나가서 작동되는 게 없네요. 임시 전원도 안 먹히고, 그러니 히터도 사용 불가.”
“보험사 측에서 현재 이곳 위치 확인했고, 곧 출동하겠답니다. 한데 여기가 워낙 외져서 도착 시간은 정확히 명시하지 않네요. 로버트 씨께도 현 상황 보고했습니다. 드론을 띄울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는데 현 상황 제일 나은 것은 차 안에서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비상 전원도 들어오지 않고, 난방도 되지 않는다지만 밖에 이렇게 서서 찬 바람을 고대로 맞고 있는 것보다는 차 안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에 손을 올린 혜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왜 안 열려? 다급한 마음에 다시 문손잡이를 덜컹거리자 방금 차에서 내렸던 레오도 문을 열려는 것이 보였다.
― 외부 무단 침입 시도 감지. 지금부터 보안 모드 작동합니다.
이건 또 뭐야. 레오나 혜담이나 차에서 내리면서 문을 닫은 참이었다. 다시 문을 열려는 순간 들리는 짧은 경보음과 멘트에 둘의 얼굴에 당황이 스몄다.
“뭐?”
혜담보다 레오의 행동이 더 빨랐다. 스마트센서에 얼굴을 대어 보고, 지문을 대어 보고, 휴대전화를 꺼내 원격시동까지.
잠긴 차를 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하는 동안 혜담은 근처 몸을 피할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카페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지? 그래도 여기가 산속인데 암자라든가 별장이라든가 그런 거.
“……젠장.”
깊은 한숨과 함께 레오의 낮은 욕설을 들은 혜담 역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근처에 갈 만한 곳 있어요?”
머리를 쓸어넘기며 차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꺼낸 레오의 말에 혜담은 방금 제가 확인한 사항을 말했다.
“처음 검색했던 가까운 카페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다리 괜찮아요?”
“전 다친 곳 없습니다. 그보다 팀장님 이마 상처는…….”
“피는 멎었어요. 부딪히면서 살짝 찢어진 것 같은데 큰 부상은 아닌 것 같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걸어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움직이죠.”
고민과 선택, 그리고 실행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걷기 시작한 둘 사이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을 걷던 혜담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숙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웃음 참기에 실패한 혜담은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엉망진창이어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일 수가 있나?
뭐랄까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만 되면 그런 상황을 깨듯 엉뚱한 일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만 아니었다면 그에게 저를 좋아하냐고 물을 뻔했다.
말도 안 되는 그 질문을 막은 게 멧돼지라니.
그렇게 그가 총을 찾고 말을 찾으면서 사냥하고 싶어 했던 멧돼지가 여기서 어이없게 튀어나온 것이다.
“왜 웃어요?”
“웃겨서요.”
“뭐가 웃겨요?”
“그냥 이 상황 전체가요.”
웃느라 발걸음을 멈췄던 혜담은 제 앞에 선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보다 푸른색을 더 많이 품은 하늘이 그의 뒤로 펼쳐져 있었다. 거기다 짙은 구름이 듬성듬성 있는 것이 감성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울 수 없으니 웃는다?”
“그냥 순수하게 웃긴 거요.”
앞을 막아선 그의 이마로 손을 뻗자 고개를 숙여주기에 혜담은 조심스럽게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헤집었다.
붉은 핏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상처 옆으로 완전히 아문 상처가 보였다. 하필 다쳐도 왜 비슷한 곳을 다쳐서. 예전에 보았던 자리의 상처에서 시선을 뗀 혜담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좀 전에 하려던 말, 뭐예요?”
나란히 발맞춰 걷던 혜담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팀장님, 나랑 친해지고 싶어요?”
“네.”
질문과 동시에 답이 돌아오자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호칭 같은 거 버리고 편하게 이름 부르는 그런 거요?”
“아마도.”
“회사에서는 호칭 붙이고 밖에서는 이름 부르고?”
“…….”
“이제 이해했어요?”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바로 알아듣겠지. 처음 걷기 시작할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같이 발맞춰 걸으면서 누린 평화는 그리 길지 못했다.
“여기 맞아요?”
“네.”
3km 전부터 카페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도 보고 내비게이션도 확인하면서 추운 산길을 걸어 도착한 카페 앞 계단에 혜담은 털썩 주저앉았다.
걸어오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어둠을 밝힐 만한 불빛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에 설마설마하면서 걸어왔다.
워낙 어두우니 불빛이 잘 보이지 않겠지, 이 추위를 막기 위해 카페 창에 커튼이 있을 거라는 억지 합리화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입구 문에 걸려 있는 라는 안내판이 혜담의 작은 희망마저 모두 꺼 버린 것이다.
“아…… 씨바.”
속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는 말을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본 혜담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만큼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오의 머리 위로 하얀 것들이 팔랑팔랑 날리고 있었다.
어.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낀 레오가 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 위로 하얀 쓰레기가 내려앉았다.
따뜻한 실내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뻐했겠지. 축하했겠지. 즐거워했겠지.
첫눈을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볼 줄이야.
따뜻한 차를 타고 움직이는데 방한용품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거기다 일하다가 바로 출발한 둘의 차림새는 정장에 코트, 구두. 완벽한 출근룩이었다.
그래도 카페에서 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열심히 걸어왔건만, 카페는 문을 닫았고 산발적 눈은 하필 이곳에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