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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주의보는 기상청의 예고대로 강풍경보로 바뀌어 있었다. 거기다 지역별 기습 폭설주의? 중대한 사항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강풍에 폭설이라니. 오는 길에 보았지만 며칠 전에 이쪽에 내린 첫눈도 완전히 다 녹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길은 깨끗하게 제설되어 있었지만 산기슭엔 얼어붙은 눈이 그대로인데 여기서 폭설까지 내린다면 돌아가는 길은 더 험난할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있으려나?”
적당히 둘러보고 갈 줄 알았건만 적극적으로 촬영에 관여하는 레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들던 혜담은 멈칫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인사 제대로 하기 어렵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어때요?”
“네? 뭐…… 뭐가 어떤…….”
“뭐든지요. 촬영은 마음에 드는지 또는 촬영장 분위기라든지…….”
방금까지 회의를 하고 있던 태원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촬영장은 처음 와 봐서 다 신기하네요.”
“그래요? 그럼. 촬영장 구경시켜 줄까요? 세트 바꾸려면 시간 좀 걸리거든요.”
“촬영이 많이 남았어요?”
“잘 아시겠지만 클라이언트가 많이 까다롭잖아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이런 식으로 지체되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요.”
멀리 있는 레오를 흘깃 보고 아주 중요한 비밀인 듯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행동에 혜담은 어깨를 움츠렸다.
싱그러운 들꽃 냄새가 순간 자신을 폭 감싸는 것 같았다. 늘 무겁고 말 없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는 너무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어쩜 그에게 딱 어울리는 향수를 고른 건지.
그것보다 레오가 까다로웠나? 성격이 특이한 건 이해한다만 그리 까다로웠던 것 같지는 않은데.
바로 앞에 최애를 두고 멀리 있는 레오를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던 혜담은 이어지는 태원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 힘들겠죠? 그럼.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에게 말 좀 잘해 주세요. 비서님 말씀이라면 잘 들어줄 것 같거든요.”
쟤가 내 말을 들어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내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누군가의 말을 들을 만한 분이 아닌 것도 아시겠네요.”
저보다 어린 우성 알파를 향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팬심은 드러내지도 못한 채 혜담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을 건넸다.
“아닐걸요. 그런데 우리 비서님 성함이…….”
“잠시만요.”
최애를 만나면 당황하고 놀라서 제대로 말도 못 할 줄 알았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하는 그를 계속 봐서 그런 것인지 생각보다 편안하게 말이 나왔다.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잘생겼고, 몸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늘 과묵하고 어두운 캐릭터만 연기해서 실제 성격도 그럴 줄 알았건만. 먼저 말도 걸어 주고 친근하게 대해 주는 그에게 혜담은 얼른 제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름이 이혜담이구나. 이름도 멋지시네요.”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고 멋지다는 말까지 해 주는 태원을 바라보던 혜담은 혀끝을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한태원을 직접 만나 이렇게 친밀하게 사적인 대화까지 나눈 걸 어떻게 준석에게 자랑하지? 그 새끼는 말해도 안 믿을 텐데, 어떻게 사진이라도 같이 찍어 갈까.
근무시간이긴 하지만 이런 작은 일탈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사진을 같이 찍자는 말을 할까 말까 계속 고민하며 주머니에 든 휴대전화를 만지던 혜담은 제 어깨를 턱 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같이 사진 찍을까요?”
응? 사진? 어. 그래. 나 좋은데, 내 휴대전화 내 주머니에 있는데 지금 당신이 들이미는 그 휴대전화는 누구…….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어깨를 감싸고는 높이 휴대전화를 드는 태원의 행동에 덩달아 고개를 드는 혜담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찍습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연예인에게 가서 찍어 달라고 하지 않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혜담은 이어 제게 휴대전화를 달라고 하더니 같은 포즈로 또 사진을 찍어 주는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한태원. 촬영 안 하고 여기서 뭐 해?”
다정하게 태원의 품 안에서 사진을 찍던 혜담은 제 어깨에 내려앉았던 묵직한 태원의 팔이 치워지고, 향긋하던 꽃내음이 사라지는 것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휴식 시간이잖아.”
“그 휴식 시간은 네가 딴짓하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의상, 메이크업 안 바꿔?”
감독이랑 촬영 이야기나 더 할 것이지 갑자기 튀어나온 레오는 혜담을 최애와 떼어 놓고는 옆에서 진한 커피 향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세트 바꾸려면 시간 제법 걸리잖아. 오늘 처음 촬영장 와 보셨다는 혜담 씨 여기 구경시켜 주려고 했지.”
저보다 훨씬 큰 두 사람 사이에 껴 있게 된 혜담은 머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슬쩍 한걸음 물러나 거리를 뒀다.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에나 집중하자. 혜담 씨, 잠깐 저 좀 봅시다.”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손을 잡고 이끄는 레오를 따라 움직인 혜담은 세트장 한쪽 구석으로 가서야 손을 놓아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친구가 아니야? 싱글거리며 편하게 말하는 태원을 봤을 땐 친구 같은데, 날이 선 레오를 봤을 땐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라이벌 같은 관계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도대체 뭘 가지고 경쟁을 해?
어쨌거나 한동안 가까이 오지도 않다가 갑자기 제 손을 꽉 잡던 뜨거운 온기가 사라진 것이 허전하게 느껴진 혜담은 다른 손으로 잡혔던 손을 겹쳐 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삐딱하게 서서는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레오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불렀으면 말을 하지 짐짓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기에 머뭇거리던 혜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기상청에서 오늘 늦은 오후부터 국지적으로 눈발이 날릴 수 있다는 예보가 떴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도 드론을 띄울 수 없게 되어서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려면 한 시간 뒤쯤엔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다음 촬영 컷까지 보고 가는 걸로 합시다.”
짧은 한숨과 함께 제 양쪽 어깨를 두어 번 툭툭 털어 낸 레오의 말에 혜담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말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죠.”
처음보다는 표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기에 혜담은 촬영장 한쪽에 있는 간식 코너를 바라보았다.
긴 시간 이어지는 촬영이기에 스태프들을 위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커피 준비할까요?”
이곳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카페가 있었으니 잠시 나가서 그를 위한 에스프레소와 빵을 사 오기엔 시간도 충분했다.
“됐어요.”
시큰둥한 말을 남기고 먼저 세트장으로 향하는 레오의 뒷모습을 보며 혜담은 슬쩍 주먹을 쥐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태원과 이야기를 더 나눠 보는 건데, 갑자기 나타나서 산통을 깨고 말이야.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커피 사다 준대도 싫다고 하고. 진짜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불만을 가득 담아 혀를 차던 혜담의 순식간에 바뀐 세트장의 분위기에 절로 새로 준비된 세트로 시선을 돌렸다.
“…….”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던 혜담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고 옅은 미소와 함께 보조개가 쏙 드러났다.
콘티 어떻게 됐냐고 유진에게 물었을 때, 끝내주게 나왔다는 말만 했다. 궁금하면 나중에 보라고.
그런데…….
단추를 채우지 않은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태원은 셔츠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복근과 아슬아슬하게 장골을 드러낸 태원은 앞에 있는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지.”
벅차오르는 가슴에 환한 미소를 지은 혜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볼 것도 없이 이번 CF는 무조건 성공이었다.
AI 가상 인간이 나오면 뭘 해. 실존하는 인물들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데, 아무리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이 분위기까지는 다 살릴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청바지를 조금 더 내려도 될 것 같지만 그래서는 진짜 심의 걸릴 것 같으니, 혼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혜담은 물결치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근육에 집중했다.
“…….”
사람 마음 다 똑같은지 삼삼오오 모여 촬영을 지켜보는 스태프들의 입에서 찬사가 흘러나왔다. 제 최애가 이렇게 잘났습니다. 혼자 기쁜 마음에 우쭐거리던 혜담은 무언가가 눈앞을 슥 스치자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
이어 한 번 더 스치는 것에 멈칫한 혜담은 소리소문없이 또 제 옆에 와있는 레오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래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좋아요?”
“네.”
“……좋다고요?”
본심대로 좋다고 말했다가 오히려 좋냐고 묻는 레오의 말에 혜담은 천천히 태원에게서 시선을 떼 그를 바라보았다.
“CF 이슈몰이 확실히 할 수 있잖아요. 홍보 효과 기대 이상일 것 같고요.”
사심은 쏙 뺀 진실을 말한 혜담은 그만 돌아가자는 레오의 말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혼자 남아서 끝까지 보고 싶지만 일은 일이니까. 그리고 이상하게 오늘따라 레오는 계속 저기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