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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계속 제게 따라붙는 것 같던 커피 향도 사라지고, 긴 시간 쳐다보는 시선도 줄었다. 엉뚱하게 손을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허락 없이 제 몸을 건드리기는커녕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일과 관련 없는 대화 역시 일체 사라졌다.
둘만 있는 차 안을 힘겹게 채우고 있는 건 잔잔한 클래식 음악뿐이었다.
“강풍 때문에 드론을 띄울 수 없어 돌아오실 때도 차량을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기상청과 연락해 날씨에 변동이 있을 경우 더 편히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혜담은 몇 분 단위로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 그 지역의 기상 변화를 확인했다.
“혜담 씨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 믿습니다.”
덤덤한 레오의 말에 혜담은 곁눈질로 슬쩍 그를 훔쳐보았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 그렇지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의자를 편히 조절한 레오는 “이거 봤어요?”라는 말과 함께 최신 영화 리스트를 띄웠다.
“아니요.”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은은하게 끌렸던 클래식 음악 대신 화려한 액션이 가득한 영화가 공간을 채웠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빵 냄새가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서야 레오는 조수석 쪽을 바라보았다. 창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채, 잠든 혜담의 모습에 편히 잘 수 있도록 의자를 조절해 주곤 제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하고 있는 영화를 껐다.
편안한 표정으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혜담의 얼굴을 바라보는 레오의 표정은 심란함으로 가득했다. 작은 흠조차 잡기 힘들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 혜담의 무방비한 잠든 모습에 절로 손이 그에게로 향했다.
곱게 감긴 두 눈과 긴 속눈썹과 콧방울, 가끔 입을 꾹 다물거나 말을 할 때나 살짝씩 보일 뿐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보조개가 있는 자리에 시선이 머물다 마지막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혜담의 입술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갓 구운 빵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덜컹거리던 심장이었다. 빵을 좋아하기에 늘 빵과 함께했다. 집 안엔 늘 빵 구운 냄새가 가득했고, 담백한 빵과 커피는 제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한데 빵 내음을 가득 머금고 있는 혜담을 처음 본 순간 가장 먼저 요동친 건 음욕이었고, 다음으로 이어진 건 식욕이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과 함께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먹어 치우고 싶었다.
그런 식욕도 허기도 처음이었기에 손끝이 저릿해졌었다. 칼같이 거리를 두고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혜담의 입술에 결국 레오의 손끝이 닿았다. 그가 깨어 있다면 감히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저도 모르게 무심코 그의 입술을 건드린 적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의 입가엔 어떤 것도 묻어 있지 않았으니까. 턱을 검지로 받치고 느릿하게 엄지를 움직이자 도톰한 아랫입술이 손끝 아래에서 뭉그러졌다.
‘온달.’
살짝 내리뜬 눈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달뜬 혜담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는 순간 레오의 손이 그의 얼굴에서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깊게 잠든 혜담인데, 방금 제가 본 것은 달빛인지 조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옅은 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었다.
이 단정한 얼굴이 그렇게나 야할 수 있다고? 거기다 그 목소리는. 한껏 흐트러진 숨결 속에서 비음과 함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듯하자 레오의 몸이 혜담에게서 더 멀어졌다.
“온달…….”
잠시 혜담이 부른 이름을 중얼거리던 레오가 휴대전화를 꺼내 검색을 하려던 찰나 혜담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아! 네.”
잠든 혜담이 깰까 봐. 그의 전화를 대신 받으려고 움직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혜담은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뇨. 아뇨. 거의 다 왔습니다. 어. 그러니까 잠시만요. 10분. 네. 10분 정도 남았어요.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언제 잠들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통화를 끝내는 혜담을 지켜보던 레오는 슬쩍 눈을 감았다.
“언제 잠든 거야.”
제법 컸던 통화 소리와 다르게 혼자 웅얼거리는 게 귀여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애써 누른 레오는 작게 눈을 떴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이어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던 그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황급히 눈을 감았다.
“……자네.”
눈을 감고 있어 볼 수 없기에 레오의 청각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기계 조작음 같은 것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잘 때도 예쁘긴 했지. 아…… 날씨 왜 이래.”
말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제가 잠든 것이라 여기는 혜담은 혼자 종알종알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눈을 뜨고 있을 걸 그랬나? 얼떨결에 잠든 척을 했기에 쭉 눈을 감고 있던 레오는 이마에 닿는 무언가에 흠칫 몸을 굳혔다.
스친 것인지 닿은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마에 무언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팀장님.”
“…….”
“팀장님.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감정을 담지 않은 혜담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태블릿에 시선을 둔 혜담은 다시금 저를 불렀다.
“팀장님.”
“네.”
이마를 만지며 대답을 한 레오가 다음으로 마주한 것은 어딘가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 혜담의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미 제법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내린 혜담은 두툼한 패딩을 걸치고 나와 있는 이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와씨. 눈물 나. 최애가 나한테 인사…… 목소리…….
오묘한 빛을 띠는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 커다란 손이 제 앞으로 내밀어지자 터져 나오는 내적 비명을 삼키며 손바닥을 슬쩍 허벅지에 문질렀다.
연예계와 조금의 인연도 없는 혜담에겐 이 모든 것이 신기했다. 아무리 사측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촬영 중인 배우가 직접 나와서 인사를 하는 경우가 흔한가?
거기다 한태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 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일이나 제대로 해. 왜 나와? 촬영 시간 길어지게.”
두근두근 폭주하는 심장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한태원이 먼저 제안한 악수를 하려던 찰나 시큰둥한 목소리가 옆을 툭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분명 제 앞에 있던 태원의 손을 맞잡은 누군가가 그를 홱 잡아채 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그게 할 소리야?”
“친구는 무슨”
“뜬금없이 전화해서 모델 되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애원해서 들어줬더니.”
“말은 바로 하자. 다른 곳보다 우리 측이 제시한 조건이 좋았겠지.”
“손이나 놔. 난 이 아름다운 분과 인사를 해야겠으니까. 안녕하세요. 배우 한태원입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시트콤 같은 대화에 넋을 놓고 있던 혜담은 다시금 제 앞으로 쑥 나오는 손을 멍하니 보았다.
조금의 격식도 찾아볼 수 없는 정말 찐친들 사이에서나 오가는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이는 자신의 상사인 레오와 최애 태원이었다.
둘이 친구야?
“네가 왜 내 비서랑 인사를 해.”
“아. 레오 비서셨어요? 그거 극한 직업…….”
“삼촌이 왜 여기 계세요?”
태원은 두 번이나 제게 악수를 권했지만 두 번 모두 그의 손을 낚아챈 레오는 그를 이끌고 세트장으로 가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이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며 레오의 뒤를 따른 혜담의 손엔 어느새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었다.
세트장 한쪽에 마련된 간이의자에 앉은 혜담은 복잡하게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구나. 20~30초짜리 광고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줄은 전혀 몰랐다. 부모님이 연예계와 관련 있어서 그런 것인지 레오는 세트장을 마치 제 공간처럼 누비고 다녔다.
촬영 감독이 레오의 부모님과 함께 보이 그룹 멤버로 활동했던 이찬이라니. 거기다 한태원이 정말 친한 친구라고? 한태원과 레오의 접점이 있는지 떠올리던 혜담은 한숨을 쉬곤 태블릿을 들었다.
그사세네. 그사세. 이곳 자체가 그사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참을 촬영장을 응시하던 혜담은 화려한 조명 속에 있는 태원보다 더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키도 더 큰 것 같고, 체격도 더 좋아진 데다 선까지 굵어진 레오는 예전보다 더 멋있었다. 제법 떨어진 곳에 있어도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감상하던 혜담은 슬쩍 눈매가 가늘어지기에 피식 웃었다.
역시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인지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이내 촬영을 중지시키고는 태원을 불러들였다. 이미 찍어 놓은 화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마음껏 감상하는 것도 잠시 흘러가는 시간에 초조해진 혜담은 태블릿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지체되면 오늘 안에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차로 가는 것이야 늦은 시각도 상관없겠지만 드론을 타는 건 다른 일이었다.
“제발. 제발…….”
혼자 중얼거리며 변화하는 기상예보를 확인하던 혜담의 어깨가 아래로 푹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