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방금 빵 냄새라고 하셨어요?”
침묵을 깬 건 레오였다.
에반과 시우는 특이 형질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골든 알파가 에반이었고, 시우는 긴 시간 평범한 베타로 살아왔다.
그런 에반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페로몬이 히든 오메가인 시우의 페로몬이었다. 에반과 만나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시우의 히든 오메가 형질이 드러나고 온전한 오메가가 된 시우는 오로지 에반의 페로몬만 느낄 수 있었다.
골든 알파와 히든 오메가의 자식인 레오 역시 특이 형질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성 알파 기질을 보였지만 태어난 이후 그가 받은 판정은 베타였다.
하지만 시우는 처음부터 레오의 페로몬을 알았고, 에반 역시 그의 페로몬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공식적으로 레오를 베타로 남겨 두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많은 현상 속에 살아온 둘에겐 이런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살아가는 데 형질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어쨌거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전혀 맡지 못하는 에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에반과 레오의 페로몬 외 다른 이의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시우가 지금 레오에게서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느끼고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네 커피 향을 다 가려 버렸어.”
“베타라고 했어요. 공식적 기록도 그렇고.”
“공식적으로 나도 베타였어. 에바니 안 만났으면 쭉 베타로 살았을 거고. 평생 에바니 페로몬만 맡고 살 줄 알았는데 별일이네.”
“특이 형질이 흔한 것도 아니잖아요.”
레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혜담이 특이 형질이라, 알파일 수도 있고 오메가일 수도 있다. 히든 오메가인 코맘이 페로몬을 안다 치면 히든 알파인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자 레오는 입을 꾹 다물고 얕은 움직임만 보이는 낚시찌를 바라보았다.
“레오, 늘 말했잖아. 이 세상은 의학과 기술로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네 느낌이 말하는 걸 믿어. 눈에 보이고 명확하게 드러난 것보다 항상 숨겨진 것이 더 많거든.”
“골든 알파인 대디가 히든 오메가인 코맘을 찾아냈고, 각인까지 해서 페어까지 됐다고요? 찾을 확률이 극악한데 그렇게 됐다. 또 그 이야기 하려고요?”
“아이, 쫌. 시야 가린다니까 그리고 나 지금 레오랑 말하잖아.”
“감기 걸려서 또 고생해. 이야기 길어질 것 같으면 다 들어가고.”
레오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시우에게 입히고는 모자를 쓰니 마니로 아옹다옹하는 에반을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쉿. 나 이야기 좀 하자. 그리고 레오, 난 알파, 오메가 같은 형질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세상엔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다는 거지.”
“코코, 그건 우리만 아는 이야기잖아.”
“알겠어. 그건 그거고 혹시 알아? 쟤도 특이 형질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굴 블라인드 했을지? 아니면 각인이라도. 일반적인 알파와 오메가라면 각인을 해도 타인의 페로몬은 다 맡을 수 있잖아.”
“블라인드도 각인도 다 쉽지 않아.”
“와. 에반 루이스. 너 지금 내 말에 토 달아? 블라인드가 또 책에만 있는 거라고 말하려고? 히든 오메가인 나도 책에만 있거든?”
“아…… 두 분 또 싸우지 말고요. 또 그러면 저 그냥 갑니다.”
“레오가 특이 형질의 알파이긴 하지만 쟤가 뭐가 아쉬워서 누군가를 블라인드 해. 굳이 오메가를 블라인드 해서 형질을 베타처럼 보이게 가려 놓을 이유도 없고.”
“난 뭐든 다 가능하다는 말을 한 거야. 한 번만 더 토 달면 오늘 침대에 못 들어올 줄 알아. 그래서 우리 아들은 그 빵 냄새 가득한 분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삐걱거리고 대화는 수시로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셋의 대화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 * *
두 번의 노크 후 잠시 기다렸다가 팀장실의 문을 연 혜담은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멈춰 섰다. 늘 들락거리던 팀장실에 온 것인지 새로 차린 빵집에 온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긴 테이블 위로 빵들이 종류별로 두어 개씩 예쁜 트레이에 담겨 있었다. 평소에도 책상 위에 빵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늘 은은하게 깔려 있던 커피 향 대신 빵 냄새를 가득 맡게 된 혜담의 시선이 황급히 레오를 찾았다.
제과와 관련 있는 회사라면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지만 이곳은 식음료와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창가에 서 있는 레오를 찾은 혜담은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슬쩍 테이블 쪽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차? 라테?”
“커피 준비해 올까요?”
음료를 찾기에 혜담은 일정을 보고하려 들고 있던 태블릿을 고쳐 들었다.
“내가 물었잖아요.”
“아, 전 출근길에 사 와서.”
슬쩍 손을 들어 자신의 자리 쪽을 가리킨 혜담은 방금까지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레오의 표정이 어두워짐에 어색하게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오늘 일정 브리핑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혜담은 이미 그의 일정을 외우고 있음에도 괜히 태블릿을 켜고는 일정표에 시선을 두고는 그의 스케줄을 죽 읽어 내려갔다.
“오늘 오후 7시 30분 모임은 그대로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아, 혜담 씨는 동행하지 않아도 되니 정시 퇴근하면 됩니다. 그것보다 혜담 씨는 빵 안 좋아해요?”
“빵은 팀장님께서 좋아하신다고…… 그런데 이 빵들은 왜 여기 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로버트 씨께도 특별히 전달받은 사항이 없어서요.”
“아침은요?”
“전 아침엔 음료…….”
“그럼 좋아하는 게 뭐예요?”
“어떤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차나 라테 말고.”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습니다.”
“나가 봐요.”
수수께끼 같은 대화의 끝에 레오가 손짓과 함께 나가도 됨을 알리자 혜담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팀장실을 벗어났다.
자리에 돌아온 혜담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테이크 아웃 음료 잔을 말없이 응시했다. 천천히 손을 뻗었고,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잔을 들어 조금 입에 머금었다. 오랜만에 먹는 아메리카노는 생각보다 쌉싸름하고 맛있었다.
첫날은 빵이더니, 다음 날은 과일이었다.
첫날의 빵은 그날 마케팅팀 간식으로 활용되었고 남은 빵들 역시 퇴근길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음 날에는 각종 과일이 먹기 좋게 준비되어 있었다. 편히 먹어도 된다는 말에 혜담은 귤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날 회의 간식은 과일이 되었고, 역시나 퇴근길 직원들이 손에는 과일이 들려 있었다.
그 후로 팀장실에서 긴 테이블과 과한 빵이나 과일들을 마주할 순 없었지만 레오의 책상 위엔 빵 대신 과일들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근 후 첫 일과로 팀장실에 들어가 일정을 브리핑한 혜담은 가끔 귤이나 바나나를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 * *
“드론 택시를 이용하지 않으시고, 차로 가시겠다고요?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요.”
혜담은 태블릿으로 회사에서 촬영장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오전 일정을 말할 때까지만 해도 별말이 없더니 갑자기 CF 촬영장에 직접 가 보겠다는 레오의 말에 혜담은 로버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급하게 일정을 수정 중이었다.
“그렇긴 한데 촬영장 쪽에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다더군요.”
“그럼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상 촬영장에서 바로 퇴근하실 테니, 가능하다면 돌아오는 편도라도 드론을 준비하는 건 어떨까요?”
“그 부분과 오늘 오후 일정은 혜담 씨가 처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연말이 되면서 레오의 개인적인 스케줄이 많아 옮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끼워 맞출 생각을 하던 혜담은 로버트의 말에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일정 조절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잘못 들었나?
“네?”
“전 연말 파티 준비 때문에…….”
온화한 미소를 보이는 로버트를 보던 혜담의 눈이 커졌다.
“로버트 씨는 동행하지 않으신다고요?”
“네, 혜담 씨가 그쪽 길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촬영장이 할머니 댁 근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근처를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근 10년째 1년에 몇 번 방문하지도 않는 곳은 어찌 다 안단 말인가.
빠르게 변하는 도시와 다르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과 이 일은 별개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혜담은 레오와 단둘이 촬영장을 다녀와야 했다. 그때의 그 어색한 점심 식사 이후로 5분 이상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없는데.
혜담의 시선은 블라인드가 내려진 팀장실로 향했다.
금방 날아가는 드론 택시를 이용하자. 그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겠니? 강풍주의보쯤이야. 요즘 기술 좋잖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상청과 연락을 취한 혜담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오전엔 강풍주의보지만 오후엔 강풍경보란다. 우울해하는 것도 잠시, 바쁘게 그의 일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눈앞에 레오가 있었다. 최신형 전기차 앞에 선 혜담은 자연스레 운전석으로 향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팀장님?”
자율주행차에 자리가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래도 상사를 모시는 입장에서 운전석을 그에게 넘겨줄 순 없었다.
“네.”
“여기…….”
열린 뒷문 앞에 선 혜담은 얼른 뒷좌석에 타라는 뜻을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전했다.
“시야 가리는 게 싫어서요. 혜담 씨가 거기 타요.”
운전석에 오르며 말하는 레오를 지켜본 혜담은 조용히 뒷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