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와 있을 때면 마치 제가 오메가나 알파가 된 것 같았다.
상대의 페로몬을 느끼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니. 제가 특이 형질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지금껏 알파와 오메가를 만나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알파와 오메가셨다.
오메가라는 판정을 받고 태어났고, 기질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렇게 베타로 재판정받았고, 신검까지 통과해 만기 전역한 제가 특이 형질이라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진짜라면 군대 다녀온 건 억울해서 어떡해? 어쨌거나 레오에 한해서만 페로몬이나 향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레오는 알파냐는 질문에 모호한 대답만 내놨고, 베타인 자신을 선택했다는 걸 봐선 알파 같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밝히지 않는 한 알 방법이 없었다.
레오의 형질을 떠나서 이 나이에 후발현은 진짜 말이 안 되는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 병원에 가 봐야 하나. 오늘따라 유독 진하게 느껴지는 향에 혜담의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은 병원까지 찾고 있었다.
“티 좋아해요?”
“아, 네!”
레오의 말을 기다리며 병원을 떠올리고 어느 병원이 좋은지까지 생각하던 혜담은 뜬금없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커피는 싫어하고?”
“싫어한다기보다…….”
입을 떼는 것과 동시에 커피 향이 사라졌다. 언제 있었냐는 듯,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숨 쉴 때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향 대신 빵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커피.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유명하고 맛있다는 커피를 마셔도 이미 그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셔 본 것 같은 느낌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커피보다 티를 즐겨 마셨고, 자연스레 모두 제가 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것과 관련된 자료 좀 더 찾아요.”
결국 일 시킬 거면서 이상한 말 하기는. 혜담은 레오가 건네는 파일을 받으면서 그의 책상 위에 있는 빵에 시선을 뒀다. 누가 사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매일 다른 빵이 그의 책상 위에 있었다. 하지만 레오는 오늘도 빵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나갈 거니까 준비하고.”
나간다는 말에 혜담은 바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11시 24분. 곧 점심시간인데 어딜 가? 그리고 방금 그가 한 말에는 자신도 함께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혹시나 자신의 착각일까 싶어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레오의 눈썹이 꿈틀거리기에 천천히 손을 내렸다.
“팀장님께서는 점심 약속 있으신데, 그 전에 돌아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면 스케줄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아. 변경하라고 해요.”
“네, 오후 2시 회의는 그대로 진행하면 될까요?”
“그 전까지는 올 수 있겠지.”
곧 점심시간이건만 점심 약속까지 취소하고 이 시간에 어디를 간다는 건지. 거기다 자신도 동행한다는 사실에 혜담은 씁쓸함은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팀장실을 나서며 로버트에게 연락해 점심 약속 변경 및 외출 준비를 부탁한 혜담은 이어 스텔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점심 약속도 취소했다. 모처럼 예전 비서팀과 점심을 먹으려 했건만.
“지금 나가세요?”
어질러 놓은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하던 혜담은 저를 쳐다보는 유진의 눈빛에 콧등을 살짝 찌푸렸다가 바로 했다.
“네, 팀장님 외출하신다네요. 그리고 조금 전 콘티요. 제 의견은 B랑 D 섞는 겁니다.”
“지금 외출한다고요? 곧 점심시간인데?”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 비슷하구나. 레오의 말을 듣자마자 점심시간을 떠올린 자신처럼 유진 역시 점심시간을 말하기에 혜담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짜 혜담 씨는 팀원들과 이야기하면 안 되겠어요.”
책상 정리 후 코트를 챙긴 혜담은 유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이야기만 하면 매번 심부름이나 외근이잖아요.”
“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팀장실에서 레오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유진과의 대화가 끝난 혜담은 몇 걸음 앞장서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디에 무슨 용건으로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필요한 사항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매번 그렇게 확인하고 준비하는 걸 좋아해요?”
레오의 말에 혜담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은 그리 부지런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미리 알아보고 준비는 무슨 만사 귀찮구먼. 직업이니 그리하는 것이지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조금도 그러지 못했다.
“비서가 하는 일이니까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직업 탓할 겁니까?”
“도움이 필요하니 부탁을 하는 걸 테고, 마땅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탁이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레오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상한 기분이 든 혜담은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혜담은 반문의 의미를 담아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럼. 손 좀 줘 봐요.”
손은 왜? 레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담은 오른쪽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한 채 내밀었다. 그에게로 내민 오른손은 이내 그의 손에 잡혔다. 손등 아래로 그의 손바닥이 닿고 슬며시 손을 끈 레오는 손목에 그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눈을 보고 있던 눈을 천천히 감은 그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든 모습을 본 적도 있는데, 겨우 눈을 감은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내 손목에서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자 혜담은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내려 힘을 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 생소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던 혜담은 눈을 뜬 레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느릿하게 다시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마시는 레오의 행동에 불편해진 혜담은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과 다르게 쉽게 손을 놓아준 그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방금 위험했다. 그죠?”
레오의 낮고 작은 속삭임에 혜담은 방금까지 그의 숨결이 닿았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뭐가? 뭐가 위험한데. 갑자기 손 달라고 하고 손목에 코 대고 킁킁대는 네가 미친놈인 거지.
“이번에도 부탁하면 들어주려나?”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눈빛을 피하려 고개를 옆으로 튼 혜담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가 무얼 요구할지 모르니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인이었다면 단칼에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직장 상사였다.
난감한 상황에 놓인 혜담을 구해 준 것은 멈춘 엘리베이터였다. 자연스럽게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마주한 혜담은 그대로 좁은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레오와 도착한 곳은 근처의 유명한 브런치 카페였다. 예약하기도 힘든 곳의 유럽풍으로 꾸며진 룸에 레오와 마주하고 앉게 된 혜담은 메뉴판을 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하더니 온 곳이 브런치 카페라고. 그것도 자신과 단둘이 거기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첫 만남부터 그는 이상했다. 자신이 그렇게 뛰어난 비서도 아니고, 회사에서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연봉 인상에 보너스, 휴가까지 그렇게 주면서 자신을 개인 비서로 삼을 필요도 없었다.
딱히 시킬 일도 없으면서 아침마다 집으로 오게 해 매일 추가 수당을 지불하는 것도 이상했다.
“팀장님.”
“네.”
“여기는 왜?”
“점심 먹어야죠.”
“선약을 변경하면서까지 저와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심각한 표정으로 메뉴를 보는 레오를 응시하던 혜담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냈다.
“못 먹는 음식 있어요?”
“…….”
“먹고 싶은 건?”
대답을 하지 않자 레오는 슬쩍 눈썹을 움직이고는 이내 직원을 불러들였다.
“홍차?”
알아서 주문하던 그의 시선이 제게 닿자 혜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레오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룸엔 단둘만 남아 있었다.
“티 좋아한다며.”
“네?”
“티 좋아하는 거 아녔어?”
“좋아하죠.”
“여기 티가 괜찮다고 해서.”
손깍지를 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하는 말에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약속까지 취소하고 이곳으로 왔다고?
“그렇게 입술 무는 버릇 곤란해. 못생긴 보조개가 너무 도드라져 보이잖아.”
혜담이 피할 새도 없이 다가온 레오의 손끝이 턱을 톡 건드렸고, 이어져 그의 손이 닿은 곳은 자신의 보조개였다.
퍼뜩 몸을 움직여 레오의 손길에서 벗어난 혜담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하관을 가렸다. 눈도, 코도, 입고, 보조개까지 다 못생겼다고 하다니, 그의 미적 기준은 확고한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도 똑같이 저를 못생겼다고 하는 걸 보니.
“제 버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입술을 다물어 보조개를 보이는 행동 외 문제가 되는 행동이 있을까요?”
기분이 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혜담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했다.
“혜담 씨. 화났네요.”
레오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업무적인 대화는 간결했고, 편안했지만 조금이라도 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스무고개 같은 질문만 잔뜩 늘어졌다. 다른 교육은 다 잘 받았지만, 화법 교육은 받지 않은 것일까? 회의 때 보면 누구보다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레오를 떠올린 혜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저녁 시간 어떻게 돼요?”
방금까지는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였지만, 얼굴에 웃음기를 싹 빼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일 저녁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 혜담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저녁이고 모레 저녁이고, 약속도 없고 시간이 넘쳐흘러도 레오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