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안녕하세요.”
“아침 식사 끝나셨으면 출근할까요?”
“점심 선약 있다던데? 누구야?”
의자에 걸쳐 줬던 자신의 코트를 챙기던 혜담은 레오의 시선이 로버트가 아닌 자신을 향한 것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점심 약속은 개인 스케줄이기에 로버트가 안다고. 마치 제게 묻는 것 같은 뉘앙스에 혜담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만의 착각이었는지 로버트는 레오의 질문에 불어로 대답했고, 둘은 불어로 대화를 나눴다. 불어는 알지도 못하지만 제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임을 직감한 혜담은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레오의 손에 팔뚝이 잡힌 그가 마주한 것은 피식 웃는 레오의 얼굴이었다.
“정말 사람 곤란하게 만드네.”
낯선 언어에 섞여 들린 문장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긴가민가하는 사이 레오의 손이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입가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잡혀 있던 팔이 편해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부엌을 벗어난 혜담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쓱 문질렀다. 갑작스럽게 사람을 잡고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입술을 왜 건드린 건데. 제 턱을 받치던 온기와 입술을 건들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거칠게 입술을 문지른 혜담은 손등에 묻어난 옅은 액체를 보곤 혀를 찼다.
너무 뜨거운 게 싫어서 뚜껑을 열고 마셨더니 그새 거품이 묻은 모양이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이미 다 닦였겠지만, 재킷 상의에서 손수건을 꺼낸 혜담은 한 번 더 입가를 훔쳤다.
* * *
절박한 상황에서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 환경에 적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레오의 개인 비서가 된 지 벌써 2주. 아침마다 빵을 사 들고 그의 집으로 출근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말이 없는 편인 그와 일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긴장했던 것과 달리 그는 먹거나 마시는 것이 까다롭지도 않았고, 과한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가 제 입가를 건드린 이후, 혜담은 먹는 것에 더 신경을 썼고. 작은 실수나 틈조차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적으로나 사적인 부분으로나 더는 흠이 잡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가끔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을 받을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행동의 끝은 혀를 차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인사이동을 시켜 주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뜯어보지를 말든지.
그가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혜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을 꾹 다물고 다른 것을 신경 쓰는 척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모른다는 듯. 하지만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개인적인 일정도 관리해야 한다고 하더니 여전히 그의 곁엔 로버트가 있었고, 개인적인 스케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레오보다 로버트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개인 비서의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마케팅팀 회의에 자주 참석하다 보니 마케팅 팀원들과도 본의 아니게 친목을 다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혜담은 제 모니터 화면에 있는 CF 포트폴리오 파일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진 씨, 전 마케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괜찮아요. 만화책 본다고 생각하고 쭉 훑어보시면 돼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걸 말해 주면 된다니까요.”
“미적 감각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혜담 씨.”
방금도 진득하게 따라붙는 레오의 시선을 떨치고 나온지라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던 혜담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유진의 부탁을 피하려고 했다.
밀크티를 슬쩍 제 테이블에 올리곤 눈을 깜박이는 유진과 시선이 마주친 혜담은 작게 웃고 말았다. 바쁜 일이 있거나 누군가와 통화하며 조절해야 하는 스케줄이 있다면 몰라도, 마땅히 할 일도 없다.
“제가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혜담 씨가 커피는 싫어하고, 라테랑 티 좋아하는 건 팀원들 다 알걸요? 같이 일한 지 벌써 2주가 넘어가는데 그걸 모를까 봐요? 오늘은 날씨가 흐리기에 특별히 밀크티로 골랐답니다.”
무겁지 않은 뇌물과 밝고 경쾌한 유진의 목소리에 혜담의 마우스 커서 끝은 파일 위로 향했다.
“보라니까, 보는 거지 선택 못 할 수도 있어요. 선택 장애가 심하거든요.”
명색이 마케팅 팀장의 밑에서 일하면서 마케팅과 관련된 것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상황이 특이한 것을. 본의 아니게 회의까지 같이 들어가기에 퇴근 후 시간을 쪼개 마케팅 공부를 시작한 혜담은 이것도 다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절대. 절대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보실 때 상품도 상품인데 한태원 씨랑 어울릴지도 봐 줘요.”
“누구요?”
“한태원 씨요. 이번 시즌 모델은 한태원 씨가 하기로 했습니다!”
“그…… 영화 그거 가을에 대박 난 그…….”
“네! 그 한태원 씨요. 한태원 씨 섭외 진짜 어려웠는데, 지난 회의 때 팀장님 전화 한 통으로 바로 캐스팅했잖아요. 회의하다 말고 전화하더니 끝. 학연, 지연, 혈연이 없긴 왜 없어. 과정이야 어땠든 우리야, 한태원 씨 잡았으니 한시름 놨죠. 그럼. 혜담 씨의 소중한 의견 기다릴게요.”
기다린다면서요. 천천히 마음 편하게 보라면서요.
CF 촬영용 콘티를 천천히 보던 혜담은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 같이 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유진의 심각한 표정에 슬쩍 옆으로 움직여 그녀도 같이 볼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최근 태원 씨 이미지를 생각해서는 좀 거칠고 투박한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 한태원 씨의 부드러움. 그런 걸 강조하는 건 어떨 것 같아요?”
혼자 보라더니 결국 같이 보던 유진의 말에 혜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아요. 보통 성공한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숨겨진 걸 찾아내는 것도 좋잖아요.”
“혜담 씨. 진짜 제대로 볼 줄 아네요. 다들 우성 알파의 그 거친 이미지만 부각시키려 하는데 그런 것 말고. 자신의 페어를 향한 그 부드러움 있잖아요. 그런 거.”
동지를 만났다는 느낌에 기쁜 것인지 유진이 팔뚝을 툭툭 치며 하는 말에 혜담은 씩 웃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건 팬 입장에서 환영할 일이었다. 늘 거칠고 소유욕 강한 그런 모습만 보여 줬으니 봄바람 살랑살랑하는 그런 모습도 보여 줘야지.
“태원 씨 눈동자 색이 갈색이랑 회색이랑 섞어 놓은 것 같잖아요. 한국인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색이니까 눈빛을 살리는 것도…….”
마케팅이고 뭐고 팬으로서의 사심을 채우고 싶은 내용을 말하는 혜담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주접이 스며들었다.
“맞아. 맞아. 소비자를 사로잡을 딱 그런 거 그런 포인트를 아는 게 진짜 중요한데, 오. 혜담 씨 이쪽으로 재능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나이 먹고 우성 알파 팬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혜담은 포트폴리오를 핑계로 유진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마음껏 덕심을 풀어냈다.
“그런 걸 생각하면 B가 좋을 것 같은…….”
“너무 촉촉 보들하는 것보다는 여기 D 스타일의 치명 섹시는 어때요?”
A부터 하나씩 보았기에 A보다는 B가 나은 것 같아 말을 하던 혜담은 어느새 유진이 마우스를 잡아 D를 옆에 띄우자 한 손으로 자신의 하관을 가렸다.
“치명 섹시는 태원 씨가 많이 보여 준 이미지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상체 탈의한 태원을 떠올린 혜담의 보조개가 깊어졌다.
똑똑.
“한태원 씨가 이번 시즌만 계약했거든요. 전속이었으면 이것저것 다 해볼 텐데…….”
“그래요? 그럼. B랑 D를 섞는 게…….”
“눈밭에서 벗겨요? 춥잖아요!”
“벗는 게 메인이라면, 배경이야 CG 처리하면 되잖아요! 모델들이 다 몸도 좋고 하지만, 태원 씨는 특히 복근하고 장골이 섹시하잖아요! 노출하기로 결정할 거면 수위 잘 조절해 봐요. 거기다 그 눈빛 아시죠?”
똑똑.
“혜담 씨는 파격적인 노출까지 원한다는 거군요.”
“꼭 그렇다기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제 의견이 들어갈 만한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요.”
“최종 컨펌은 제 몫입니다.”
유진과 수다를 떨던 혜담은 둘 대화 사이에 쑥 들어온 목소리에 열심히 움직이던 마우스 커서를 멈췄다.
방금까지 어깨와 팔을 딱 붙이고 앉아 수다 떨던 유진이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고 레오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게 된 혜담은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여 열어 놓은 파일들을 닫았다.
언제 나타나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을까? 그런데 이건 들어도 되는 내용이 아닌가?
“혜담 씨, 지금 저 좀 봅시다.”
갑자기 나타난 레오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먼저 몸을 돌려 팀장실로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던 혜담은 옆에 둔 태블릿부터 집어 들었다.
오전에 오늘 일정과 이번 주 일정을 브리핑했고, 아직까진 추가된 사항이나 변경된 것은 없었다.
혹시나 제가 빠트린 것은 없는지 확인한 혜담은 두 번의 노크 후,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문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부터 강하게 느껴지는 커피 향을 느낀 탓이었다. 향에 느낌과 기분이 스며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제 몸에 다닥다닥 붙는 커피 향은 그리 착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 났을 때나 느낄 만한 기분을 고스란히 받은 혜담은 난감한 표정으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제가 이상한 걸 느낀다는 걸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것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