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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면 끝날 것 같지 않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혜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장인에게 연봉 인상과 더 나은 근무조건은 필수사항이니까요.”
“다행이네요.”
언제 회사 앞에 도착했을까? 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레오가 움직였고, 바로 뒷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레오의 뒤를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모두 그의 체격과 외모에 놀라는 듯했고, 다음으로 ‘아! 오너 아들.’, ‘오늘부터 출근이잖아.’, ‘장난 아니네.’ 같은 숙덕거림이 뒤를 따랐다.
마케팅팀에 들어서서도 직원들의 시선은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레오가 팀장실로 들어가고서야 그를 좇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 시선들은 혜담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레오와 같은 공간이 아닌 다른 마케팅 직원들의 공간에서 팀장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배정받았던 혜담은 자리에 앉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하긴 소문의 진상을 직접 보았고, 같이 등장한 자신이 개인 비서라는 것까지 다 아는 이들은 그 넘쳐나는 호기심을 제게 풀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레오와 함께 있는 순간 잠시도 긴장의 끝을 놓지 못했던 혜담에게 필요한 건 조용한 휴식이었다. 근무 시작 전 카페인이 잔뜩 든 음료를 마시고 싶은 간절함은 다른 이들에게 닿지 않은 듯했다.
“안녕하세요. 이혜담 씨. 우리 어제 간단히 인사 나눴는데, 한유진입니다.”
해맑게 웃으며 제 앞으로 손을 쑥 내미는 유진의 손을 외면하지 못한 혜담은 그녀의 손끝을 살짝 맞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깔끔하게 인사를 나누고 손을 거두는 유진과 다르게 그녀의 뒤에 있는 무리 중 한 명은 기어이 선을 넘고 싶은 것인지 움찔거리는 모습에 혜담은 표정을 굳힌 채 먼저 말을 건넸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제게 무언가를 묻는다고 해도 해 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이미 그의 이름을 통해 오너가 자제인 것도 알았을 것이고, 검색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이름만 쳐도 연관 검색어로 그의 집안이나 부모님과 관련된 사항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거 알잖아요.”
지나친 호기심은 좋지 않은데. 결국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이를 향해 혜담은 냉랭한 표정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절로 익히는 걸 아직까지 익히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 10시에 팀장님과 정식 미팅 있는 거 아시죠? 그때 제대로 인사 나누시게 될 겁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내용도 다 브리핑해 주셔야 하고요.”
“연배 비슷할 거 같은데, 깐깐하게 하지 말고 말 좀 해 줘요. 그냥 비서도 아니고 개인 비서이고, 같이 출근까지 했으면서 중요한 건 미리 언질해 줄 수 있잖아요. 그래야 우리도 회사 생활이 편하고.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이제 같이 일도 하는데 서로 돕고 이해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아닌데요. 내가 왜요?
솔직한 속마음과 달리 혜담은 상대를 찬찬히 뜯어볼 뿐이었다. 모든 업무엔 기밀 사항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기밀을 누출 시엔 그에 따른 대가가 따르고. 그런 것이 꼭 업무와 관련된 것만 있을까.
다른 직책도 아니고 비서로 일해 온 게 몇 년인데, 모시는 상사와 관련된 이야기엔 무응답이 최고였다. 유언비어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앞으로 쭉 같이 일하시면 궁금해하시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것 같습니다. 미팅 준비는 끝나셨나요? 업무적으로 깐깐하신 분인데.”
업무적으로 깐깐한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일단 제게 쏠린 이목을 흐트러뜨려 놓기 위해 잠시 후 있을 미팅이나 준비하라는 말을 의미를 담긴 말을 남긴 혜담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무노동 고임금 하고 싶다. 진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긴장감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목을 죄는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리고, 빠르게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혜담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를 위해 담배라도 했어야 하나? 빠르게 변하는 숫자를 지켜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혜담은 손끝에 닿는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꾹 쥐었다. 이제 시작인 레오의 개인 비서 생활은 순탄치 않을 것 같았다.
* * *
아침 7시 40분.
유명한 베이커리 앞에 선 혜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한겨울 추위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3도 안팎을 오가는 싸늘한 기온에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지라 몽롱한 기운을 떨치지 못하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몸을 가볍게 흔들어 추위와 싸우며 남아 있는 졸음기를 떨치는 혜담의 코끝으로 갓 구운 빵 냄새가 스며들었다. 긴 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잠시 후 그의 손엔 갓 구운 빵이 든 봉투와 커피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예약도 안 되고, 다른 방법을 찾든가 해야지. 더 추워졌다가는 이 짓도 못 할 것 같은데.”
자신의 집에서 베이커리까지는 30분이 걸리지만 베이커리에서 레오의 집까지는 걸어서 3분이면 됐다.
종종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넌 혜담이 유리문 앞에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 주는 경비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들어올 땐 겹겹이 몇 번이나 보안검사를 거쳐야 했지만, 지금은 안구 스캔 한 번이면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담이 커다란 문 앞에 발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벌써 일주일째 같은 생활을 반복한 혜담은 신발을 바꿔 신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전 8시.
부엌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으로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아일랜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부터 씻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빵 중 베이글을 골라 반으로 자르고 오븐에 넣은 후, 커피 트레이에서 에스프레소와 그린티 라테를 꺼내는 것까지 모든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버터와 잼을 꺼내 테이블에 놓던 혜담은 고개를 들어 근처로 다가오는 이를 확인하고는 목을 가볍게 숙여 인사를 건넸다.
“무화과잼이 있을 겁니다. 밀크잼도.”
통체리잼과 오렌지마멀레이드잼을 꺼냈던 혜담은 군말 없이 몸을 돌려 그것들을 넣어 두고 그가 말한 잼을 찾아서 꺼냈다.
샤워가운을 입은 채, 나타났던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혜담이 꺼낸 잼을 작은 접시에 옮겨 담고 나자 오븐의 알람음이 들렸다.
따뜻하고 몽글몽글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구워진 빵 냄새를 맡으며 냉장고에서 손질된 오렌지와 사과를 꺼내 믹서에 넣은 혜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오븐을 열었다.
접시 두 개에 베이글을 나눠 담고, 그사이 곱게 갈린 주스를 유리컵에 부어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이닝룸이 있지만 간단한 아침 식사는 부엌에 있는 아일랜드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다.
혜담이 준비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레오가 건너편 의자에 앉는 것으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린티 라테를 한 모금 머금은 혜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분명 그린티 라테를 마셨는데 커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이 집의 현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혜담은 커피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진한 커피 향이 집 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건지. 그것도 능력이라 생각하며 혜담은 무화과잼이 담긴 그릇에 손을 댔다.
“잼 드려요?”
“아니.”
잼은 먹지도 않으면서 왜 준비하라고 하는 건지. 대화가 끊어지자 혜담은 그린티 라테를 조금 더 마시고는 태블릿을 켰다.
“오늘 스케줄 말씀드리겠습니다. 낮 12시 점심 약속, 오후 2시 마케팅팀 CF 관련 회의 있으십니다. 오후 6시 콘퍼런스가 있기에 오후 5시에는 출발하셔야 합니다. 어제 말씀하셨던 마케팅 외 다른 부서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오전 중으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점심?”
“로버트 씨께 넘겨받은 일정이라 약속 장소와 만나시는 분은 알지 못합니다.”
“확인해서 다시 보고해요.”
“네.”
오늘 일정 브리핑을 마친 혜담은 구워진 베이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빵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첫날 얼떨결에 아침 식사를 준비했더니 자연스레 그 일이 제 일이 되었다.
회사 법인 카드가 아닌 레오 루이스라는 이름이 적힌 개인 카드를 건네며 정확히 어디서 무슨 빵을 사야 하는지 알려 준 로버트에게도 자세히 묻지는 못했다.
레오가 좋아한다는 에스프레소와 베이글 등의 빵은 그 카드로, 자신이 먹는 음료를 제 카드로 따로 결제하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침 준비를 했다. 하나의 베이글을 반으로 잘라 두 접시에 나눠 담았지만 늘 제 앞의 베이글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레오 역시 베이글은 반도 먹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레오의 앞에서 라테를 마시던 혜담은 반가운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