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는 제가 있던 자리를 아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이곳을 응시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바로 쳐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혜담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 크다. 얼굴 선이 더 굵어진 것 같지만 분명 제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가가 가늘어졌고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같은 표정을 읽는 혜담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이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얼굴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것처럼 머물더니 얼굴에서 목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느릿하고 질척하게 자신을 탐색하는 것처럼 그 향을 몸을 훑어 내렸다. 마치 그날처럼.
“이사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몸에 들러붙었던 향이 사라졌다. 그를 중심으로 있던 무리가 이사실로 들어가고 그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혜담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린 매정한 사람이어서,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많은 것들을 남겨 두고 간 사람을 향한 감정은 끝없이 불어났다.
제일 힘들 때 나타나서 정신을 쏙 빼놓더니 홀랑 사라져서 걱정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 잘난 얼굴과 제가 좋아하는 커피 향에 홀렸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왜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들만 잔뜩 했는지…… 마지막으로 그날 밤은 뭔지. 그리고 그렇게 떠나서 잘 사는지 궁금했다.
허.
바닥에 주저앉은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가늘어진 그의 눈가에서 자신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 초록 눈에서 혜담이 읽은 감정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마치 저를 처음 보는 것 같은 시선. 그런데 이건 뭐지? 라는 것 같은 호기심과 둘 사이의 거리가 제법 있었음에도 혜담이 느낀 건 그 시선은 절대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본 아이 같은 눈빛.
저를 전혀 모르는 그 눈빛.
상대는 자신을 모른다.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른 혜담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다. 사진 같은 게 나올 거라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에반 루이스, 김시우. 레오 루이스.
레오 루이스. 온달의 이름이 레오 루이스다.
그의 부친은 루이스 가의 둘째 아들이고, 그의 모친은…… 김시우. 둘은 자신도 아는 보이그룹 멤버이고.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수많은 영상과 사진들이 나왔다. 보이그룹 출신답게 그의 부모님 사진은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넘쳐났다. 반면 그의 사진이나 정보는 거의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고성도 있고, 호수도 있고, 말도 있고,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다. 그러니 총도 있을 테고, 사냥도 하고…….
혜담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대디? 코맘? 김시우. 그의 모친 별명이 코코라고?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머리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찾지 않아도 찾으러 온다고? 파출소도 병원도 가고 싶지 않다고?
그냥 생각나고 떠오른다고?
내가 못생겼다고?
한국 음식과 문화에 익숙한 게…….
“씨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개인 비서? 누가 누구의 개인 비서?
기억을 잃었다고? 그럴 리가. 다 기억한 거잖아. 네 부모가 누구인지 네 배경이 어떤 것인지 그가 하는 말에 그것들이 다 녹아 있었다. 멍청하게 그걸 알아채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돈 많은 귀족가 자제의 유흥이었나? 너무 심심하고 지겨워서 한국의 작은 산골 마을까지 들어와 서민 체험이라도 하고 싶었어?
기억상실이 흔한 일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자 혜담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날 기만하고, 이용하고 가지고 놀았어?
“혜담 씨, 괜찮아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있던 혜담은 자신의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흠칫 놀라며 손에 힘을 풀었다.
“네? 네?”
“아. 정보 찾고 있었구나. 진짜 잘생겼죠? 부모님 두 분도 대단하신 분인데 좋은 부분만 다 닮았다니까요. 같이 있던 체격 좋으신 노란 머리 있잖아요, 그분이 원래 개인 비서이시래요.”
스텔라의 추가적인 설명을 들으며 혜담은 회사 양식을 모아 놓은 파일을 열었다.
사직서가 어디 있더라. 퇴직금은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이직도 알아봐야 하는데, 일단 일 그만두는 게 먼저…….
마우스를 움직이는 혜담의 손끝이 떨렸다.
“사직서?”
“아침에 두 분이 계속 이야기하셔서 말을 꺼낼 타이밍이 없었어요. 퇴직 생각 중이었거든요. 12월까지만 하고 그만두려고요. 그래서 제가 마케팅 팀장님 개인 비서는 못 할 것 같네요.”
“진짜요? 왜? 무슨 일 있어요? 퇴직 의사 같은 거 전혀 비치지 않아서…….”
사직서를 보고 당황한 스텔라를 보며 혜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퇴직 의사 전혀 없었다. 일이 힘든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힘든 것도 아니다. 대기업인 만큼 복지도 좋고, 연봉도 연차에 비해 좋은 편이다.
방금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케팅 팀장 밑에서 그의 개인 비서를 하며 퇴직할 나이가 될 때까지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가 보내면서 이것저것 일이 좀 있었거든요.”
혜담은 화면에 뜬 사직서 양식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 일은 그 누구도 모른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하물며 오늘 점심 메뉴도 모르는데 자신인들 온달을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자신은 기다렸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금이야 무뎌졌고, 잊혔고, 사라졌다.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것 외 아무것도 없었을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지금도 달빛에 빛나던 초록 눈동자가 생생히 떠올랐다. 제 몸을 휘감던 커피 향의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단순한 쾌락만 있던 건 아니라고 여겼는데.
이젠 가끔 술을 마실 때나 울적할 때 그가 떠오르긴 했지만 한번 피식 웃고 날릴 만큼 가벼워졌다. 술 먹고 원나잇 한 것과 뭐가 달라.
그런데.
아니다. 잊고 있던 그 복잡한 감정은 방금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나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커피 향은 느끼는 순간 숨이 멈췄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입 안은 바싹 마르면서 희미해졌던 감각들이 살아난 것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먼 기억이라고만 여겼던 그가 다시 살아났고, 이대로라면 또다시 그에게 홀려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제 인생에 개입하고 분탕질할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혜담은 빠르게 손끝을 놀려 사직서 양식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혜담 씨. 퇴사하겠다고?”
스텔라에게 전해 들었는지 어느새 옆으로 온 팀장의 말에 혜담은 역시나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네, 스텔라에게 들었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어서 혜담 씨가 부서 이동하는 것에 긍정적이라 생각했거든.”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서윤의 말에 혜담은 속으로 깊게 동조했다. 방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니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당연했으니까.
“퇴사 한 달 전에 말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이나 내일 말하려 했는데,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말할 겨를이…….”
같은 말을 반복하던 혜담은 서윤이 아닌 이사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스텔라 너머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서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혜담 씨.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조용한 회의실.
온달과 아니 레오와 그의 개인 비서라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된 혜담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전히 강한 커피 향을 풀풀 내뿜으며 팔짱을 끼고 건너편에 앉은 레오 대신 제게 질문하는 개인 비서의 유창한 한국어 발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가뿐히 숨길 수 있는 나이였다.
“내일 오전부터 일하는 것으로 하죠.”
일방적인 대화에 혜담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때려치울 회사였으니 더는 그와 엮일 일도 없기에 불쾌한 감정을 숨기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퇴사 의사가 있음을 조금 전에 저희 비서팀 팀장님께 보고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너 같은 새끼 밑에서 일 안 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사회생활에 철저히 길든 입에서는 나름 공손한 말이 나갔다.
“…….”
자신의 거절 의사와 함께 사무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절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나 보지? 아직 회계팀의 연락을 받지 못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연봉이 획기적으로 오를지도 몰랐다. 워라벨이야 거기서 거기이니 굳이 따질 이유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부드럽거나 다정하지 않다. 제 기억 속의 목소리는 맞지만 묵직하고 딱딱한 어투에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숨겨져 있던 그의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은 다 기억하는데 상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