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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보인 건 검은 정장 재킷이었다. 그다음으로 알아챈 건 상대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짧고 간결하게 정리된 금발이었다.
“…….”
이렇게 큰 사람은 살면서……. 검은 정장은, 거기다 금발에……. 주문이 끝났는지 제게서 멀어지는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손님, 더 추가하실 건 없으신가요?”
카랑카랑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린 혜담은 저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는 카운터 직원을 보고 멍하니 웅얼거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더블샷 하나요.”
주문과 함께 결제를 끝낸 혜담의 시선이 넓은 홀에 닿았다. 카페엔 비슷한 색의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가득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 기업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서 체격 좋은 외국인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은 정장도 큰 체격도 금발 머리카락도 모두 흔하디흔한 것인데, 혜담의 심장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게 다 개꿈 때문이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건만, 지난밤 꿈은 그 모든 일이 방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있었다. 주식처럼 먹던 빵 냄새도 카페를 가득 채운 제가 좋아하던 커피 향도 모두 낯설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체격 좋은 금발 머리 남자를 찾던 혜담은 제 주문번호를 부르는 소리에 픽업 데스크에서 음료와 빵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트레이에 담겨 있는 석 잔의 음료를 바라보았다. 팀장님 것과 팀원의 것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더블샷.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전 혜담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얼른 돌아가서 음료를 나눠 주고, 휴가 중 있었던 일 중 중요한 사항이 있으면 전달받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동안 악착같이 돈도 모았고, 이번 전월세 만기일에 맞춰 더 쾌적한 곳으로 이사 갈 계획도 세웠다.
계속해서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생각은 돈을 떠올림과 동시에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힘들고 어려울 땐 돈을 생각해야…….
카페를 나온 혜담의 발걸음이 멈췄다. 연이어 서 있는 검은 차. 시간이 흐른 만큼 차도 최신형 모델로 바뀌어 있었다. 애써 고개를 돌린 혜담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사무실에 들어서서 자신이 아닌 음료와 빵을 반기는 스텔라를 보고서야 혜담은 지금껏 제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처에 맛있는 음료와 빵을 파는 곳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팀장님. 말 그만 돌리시고, 혜담 씨에게 꼭 전해야 할 말 하셔야죠.”
제가 사 온 커피가 아닌 탕비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신 혜담은 스텔라의 말에 팀장을 바라보았다.
“급할 거 없잖아.”
“급할 게 없긴요. 혜담 씨도 짐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하잖아요.”
가볍게 주고받는 그녀들의 대화에서 짐 정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혜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짐을 싸라고? 잘렸나? 잘못한 일이 없는데, 단지 올해 휴가 다 몰아서 2주간 쉬고 온 게 뭐. 그것도 올해가 처음이 아니고 매년 그래 왔다.
이상하게 할머니가 떠난 11월 중순이면 집중이 되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할머니 기일에 맞춰 앞뒤로 휴가를 내고 수목원도 다녀오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 왔다. 올해라고 다른 것도 아닌데, 왜 무슨 일이기에…….
“혜담 씨, 축하해.”
밑도 끝도 없는 대화에 이어 축하한다는 말까지 이어지자 혜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일단 잘린 건 아닌 모양이다.
“이번에 마케팅팀. 팀장 바뀌는 건 알고 있지?”
“네, 회사 오너 아들이라면서요.”
이사님 비서실에서 일하는 제게 뜬금없이 마케팅팀 이야기를 꺼내는 팀장을 보며 혜담은 제가 아는 것을 떠올렸다.
“그치. 그럼 오너 아드님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네.”
“루이스 가가 한국에 뿌리를 둔 가문이 아닌 건 알죠.”
“그렇다면 오너 아드님께선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없겠지?”
“그건 제가 알 방법이 없죠.”
“그래서 우리 비서팀에서 마케팅 팀장님의 개인 비서로 한 명 보내야 한다네?”
“왜 우리죠?”
“우리가 제일 널널하니까?”
“그랬나요?”
“뒷이야기는 안 해도 되지?”
팀장과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의 끝에 혜담은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우리 팀에서 한 명이 차출되어서 회사 오너의 아드님 개인 비서가 되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나?
여전히 자신을 손끝으로 가리킨 채, 팀장과 팀원을 본 혜담의 입꼬리가 아래로 쭉 내려갔다.
오랜 시간 이사님과 함께한 팀장? 내일모레 출산 휴가를 앞둔 팀원? 그리고 자신.
“오너 아드님이시면 젊겠죠?”
“혜담 씨 또래야. 그러니 여기 이거 확인해 둬.”
혜담은 팀장이 건네는 파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파일을 열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이름이었다. 이어 그가 자신보다 세 살 어리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 뒤로 그가 다닌 엄청난 학교 이름을 보며,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확신까지 가졌다.
“학력을 보니 사기캐네요. 어떻게 이런 학력을 가질 수 있지?”
“거기다 엄청. 진짜 엄청. 엄청. 미친 듯이 잘생겼어.”
사진이 없어 당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외모에 대해 엄청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말하는 스텔라를 보며 혜담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제가 아는 엄청. 진짜 엄청. 엄청 미친 듯이 잘생긴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런데 개인 비서요?”
“마케팅 팀장에게 비서팀까지 꾸릴 순 없잖아. 말이 마케팅 팀장이지, 잠시 있다가 훅훅 위로 올라갈 사람이고, 지금 그 자리 수락하면 혜담 씨 앞길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1, 2년 안에 그분을 위한 비서팀이 꾸려지게 될 테니까.”
딱히 나쁜 조건도 아니고 조직사회에서 일하는 제가 뭐라고 할 건 아니었다.
“회계팀에서 개인적으로 연락이 갈 거야. 연봉도 올라갈 테고, 나이도 비슷하고, 비서팀에서 일한 경력 있는 베타를 찾고 있는데 회사 직원 중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혜담 씨뿐이잖아. 혜담 씨가 거절한다면 또 다른 사람을 찾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거기다 혜담 씨 이사하고 싶다며.”
이사 가고 싶죠. 미친 듯이 가고 싶죠.
계속해서 한 사람이 떠오르기에 머뭇거리던 혜담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사라는 단어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연봉도 오른다는데. 쉬는 동안 보고 온 햇빛 찬란하게 들던 15평 원룸을 떠올린 혜담의 입이 꾹 다물렸다. 무엇보다 레오 루이스. 앞으로 제가 모시게 될 상사의 학력에서 그가 한국에 살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영국 귀족 가문 태생이 한국에 살았을 리도 없고, 그랬다 한들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언제 온대요? 이……분?”
분명 자신보다 어리지만 상사이기에 거기다 엄청난 집안의 자제이기에 혜담은 단어를 고르고 골라 분이라는 호칭을 찾아냈다.
“오늘요.”
팀장이 아닌 스텔라가 하는 말에 혜담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고인 호수처럼 참으로 잔잔한 삶이었다. 딱히 신나는 일도 없고 힘든 일도 없고, 정직원이 된 이후 혜담의 삶은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돌이 던져진 것 같았다. 제 생각과 결정과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 있었다.
“제가 거절하면요?”
“말했잖아. 다른 팀으로 넘어갈 거라고. 사측에선 혜담 씨가 하는 걸 원하는 상황이고 일단은 혜담 씨가 휴가 중이라 보류이긴 한데 결정 났다고 보는 게 나을 거야.”
가타부타 말도 못 하고 어영부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혜담은 사내 전화가 울리자 곧장 탕비실을 나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 10시에 이사님과 미팅하시는 분이 마케팅팀 팀장님이세요? 지금 오신다는데?”
짧은 통화를 끝낸 혜담은 탕비실에서 나오는 팀장에게 물었다.
“응. 혜담 씨, 지금 인사하면 되겠다. 내일부터 마케팅팀으로 출근하면 돼. 짐은 오늘 옮기면 되겠지?”
정확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혜담은 이것저것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는 제 책상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후에는 이 짐을 옮기는 게 먼저겠지? 시간에 맞춰 미팅을 한다는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미적거릴 시간도 없이 혜담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먼 복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나 고개를 든 혜담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정장 무리였다. 그다음으로 잘 정리된 노란색 머리카락이었고, 그 옆으로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비서실 데스크로 나간 팀장은 그들과 인사를 나눴고, 혜담은 여전히 비서실 안에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의 큰 키와 체격보다 먼저 와 닿은 건 묵직하고 짙은 커피 향이었다.
탕비실 안에 둔 커피에서 나는 향이 아닌 이미 제가 익히 아는 향. 그리고 그런 향을 가진 한 사람. 데스크 안쪽에 있기에 굳이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혜담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