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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무언가를 많이 사는 것도 부담스럽다. 이런저런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둘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어제 할머니들의 수다를 들었으니 주말이면 제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걸 온달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부동산에선 언제 그 집이 팔릴지 모르니 그냥 잊고 살라고 했다지만, 할 일도 사람도 없는 이곳에 온달을 혼자 두고 떠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제 몸 하나 눕히기도 빠듯한 좁은 원룸에 그를 데려가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빵.”
꽤 심각한 표정을 짓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단어에 혜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읍내에 제대로 된 빵집이 있을 것 같아? 슈퍼마켓 빵이나 사 먹자.
“여기 앉아서 커피나 마시고 있어, 슈퍼 좁아서 너 돌아다닐 만한 공간 없어. 빵이랑 이것저것 사 올게.”
하나 있는 작은 카페라고도 말하기 그런 다방 앞 작은 테이블에 방금까지 산 짐들을 다 올려놓은 혜담은 여전히 자신을 봐주지 않는 온달의 손을 잡아끌었다.
“뭐 해? 여기 앉아서 기다리라고.”
온달이 의자에 앉는 것까지 확인한 혜담은 테이블 위에 자신의 커피를 올려 두고 길을 건넜다.
마켓 앞에 놓인 바구니를 들고는 곧장 빵이 있는 곳으로 가 이것저것 종류별로 하나씩 담았다. 빵을 먹으려면 우유도 있어야 하고, 대충 빵을 담은 혜담은 음료 코너로 가며 밖을 흘깃 보았다.
시킨 대로 얌전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온달을 보곤 우유와 오렌지 주스를 담았다. 베이컨도 사고 계란도 사면 나름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짐이 많아지고. 버스가 제일 합리적이긴 하지만 돌아가는 길엔 콜택시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사연이 어떻든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부실하게 대접할 순 없다는 생각에 혜담의 손이 빨라졌다. 바구니 하나가 가득 차자 계산대에 내려놓고는 새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읍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던 온달과 시선이 마주치자 혜담은 대충 한 손을 휘적거려 아는 척을 했다.
“아오. 사. 사. 뭐 망설여. 온달이 번 돈도 쓰고 내 돈도 쓰고. 다 먹고 살자고 버는 돈인데.”
치즈를 몇 번 들었다 놓던 혜담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 번째 바구니 역시 가득 채웠다.
“계산해 주세요.”
계산대 옆에 서서 계산이 끝난 물건을 비닐봉지에 바로바로 담던 혜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차가 줄지어 나타났다. 새까만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이 보였다.
차 한 대가 길 건너 다방 앞에 서자 방금까지 보이던 온달이 완전히 가려졌다.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온달이 보이고, 그는 싱긋 웃으며 그만큼이나 큰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와 포옹을 나눴다.
“어.”
물건을 담던 혜담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온달과 남자는 포옹을 나눴고, 웃었고, 줄지어 나타났던 검은 차들이 천천히 앞을 지나쳤고, 그 차량 행렬이 끝나고 나서야 짐을 쌓아 뒀던 테이블을 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엔 검은 봉지가 몇 개 있고, 두 잔의 테이크 아웃 커피 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없었다.
“어?”
삐빅 소리와 함께 혜담이 산 물건들이 계산대 한쪽에 쌓이고 있었지만 혜담은 밖으로 나갔다. 길을 건너 테이블 앞에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리에 남은 건 거의 마시지 않은 커피 컵과 반쯤 마신 커피 컵. 자신은 너무 커서 입을 수 없는 옷들과 슬리퍼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제 몸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흔적들이 있었다.
* * *
― 굿모닝.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헤라. 시끄러…….”
침대에 멍하니 앉은 혜담은 목 뒤를 받치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 입 안이 씁쓸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인데, 잊고 지냈던 기억이 방금 이 순간 일어난 것처럼 제 몸을 휘감았다.
“오랜만에 출근하는데, 시작이 개꿈이야. 찝찝하게”
볼멘소리를 뱉은 혜담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냈다. 물로 대충 헹궈내곤 껍질째 아삭 깨물어 먹었다.
“헤라, 오늘 날씨.”
― 오늘 최저 기온은 8도, 최고 기온은 15도입니다. 현재 기온은 10도이고, 습도는…….
AI 기기에서 나오는 날씨와 중요 뉴스를 들으며 혜담은 출근 준비를 마셨다.
“헤라, 저녁에 보자.”
― 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체 소등 및 모든 전자기기는 대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감사합니다.
집을 나서려던 혜담의 시선이 침대 옆 협탁에 닿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난 온달,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를 만났던 것이 사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착각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건,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은 묵직한 시계가 협탁에 잠들어 있었다.
굳이 잊으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순간은 당황스럽고 놀라고 아프기도 했지만 복잡하고 힘든 감정들이 제일 먼저 사라지고 그 상황이 잊히고 이제는 그런 일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늘 같은 루틴으로 집을 나선 혜담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려야 할 곳에 내렸으며,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제가 일하는 사무실로 들어선 그를 반겨 준 건 밝은 목소리였다.
“안녕, 오늘도 잘생긴 혜담 씨.”
“안녕하세요, 오늘도 아름다우신 서윤 씨.”
“역시 이 기분이지. 2주 동안 나에게 아름답다는 말 하나 해 주는 사람 없었는데, 이제야 살 것 같네. 역시 그 말은 우리 혜담 씨 입으로 들어야 하나 봐.”
“스텔라, 팀장님께 아름답다는 말 안 해 드렸어요?”
“했어. 설마 안 했겠어? 여자가 해 주는 말에 감흥이 없으신 것뿐이지.”
“그럼. 한 번 더 말씀드려야겠네요. 사랑하는 서윤 씨,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저 없는 동안 별일 없었죠?”
“별일이야. 있다면 있는 거고 없다면 없는 거지. 우리 혜담 씨가 휴가 끝나고 돌아온 기념으로 내가 커피 쏠게.”
비서실 팀장인 서윤이 지갑을 꺼내 들자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스텔라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팀장님, 지갑 열린 거 보니 사내 카페는 안 될 것 같은데 제가 다녀올게요. 여기서 갈 사람 저밖에 없잖아요.”
“계속 서윤 씨라 불러 주면 안 돼?”
“에이. 조금 전엔 아침 인사잖아요. 팀장님은 팀장님이신데 어떻게 그래요.”
“혜담 씨는 참 개방적이면서 보수적이야. 그래서 더 맘에 들어. 그런 의미에서 난 늘 마시던 걸로.”
“저도요.”
제가 있든 없든 수다 떨기 삼매경에 빠진 두 사람을 두고 밖으로 나온 혜담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서렸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자 혜담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11월 말. 이맘때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 꿈을 꾸었겠지.
몇 년 전 할머니가 떠나고 갑자기 나타났던 온달도 떠났다. 주말이 지나도록 그를 기다렸지만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해 미소 지으며 사라진 그가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그 집에서 지냈다. 왜 그랬는지는 혜담도 알 수 없었다.
차에 그다지 관심 없는 저도 아는 비싼 차가 몆 대였더라. 한두 대가 아니라 다섯 대쯤 됐던 것 같은데.
거기다 온달과 포옹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남자의 금발이라든지 양복 같은 것들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진짜 어둠의 자식이든가, 아니면 정말로 집에 호수가 있고 말 타고 사냥을 즐길 만큼의 여유가 가득한 집안의 자식이든가.
어쨌거나 기말고사에 맞춰 혜담은 현실로 돌아왔다. 제 한 몸 누이기도 벅찬 7평 원룸에서 대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오갔다. 꿈도 희망도 없는 것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지원했던 대기업의 인턴이 되었다.
그 뒤로는 더 정신없었다. 인턴이 정직원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지금도 같이 일하는 서윤의 추천으로 정직원이 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회사 근처에 있는 유명한 카페에 다다른 혜담은 한참 동안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팀원들이 먹는 음료는 늘 정해져 있었다. 팀장인 서윤은 라테를 마셨고, 현재 임신 중인 스텔라에게 필요한 건 상큼한 피치&레몬주스였다.
카페엔 늘 저를 동하게 만드는 커피 향과 갓 구운 빵 냄새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카페는 카페인을 필요로 하는 직장인들로 북적거렸다.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카페의 커피 메뉴를 찬찬히 읽은 후, 혜담은 계산대 앞에 섰다.
“라테 따뜻한 것 하나. 피치&레몬주스 하나. 주스에 얼음은 빼 주세요. 베이글 세 개에…….”
“더블샷 아이스 아메리카노 둘, 크루아…….”
팀원들의 메뉴를 다 말하고 여전히 메뉴를 정하지 못해 메뉴판에 시선을 두고 우물거리던 혜담에게 바로 옆에서 주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렸다. 묵직한 목소리에 영어 발음이 참 좋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혜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