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7화 (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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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거나 거들 틈도 없이 온달은 배추밭에서 작업하는 이들 사이에 섞여 버렸다. 말이 섞인 거지 어디서든 눈에 확 들어오긴 했다. 그는 그렇게 작업팀에서 빌린 것인지 맞지 않는 슬리퍼 대신 장화를 신고 배추밭을 누비고 다녔다.

“집은 내놨어?”

온달을 따라가 같이 밭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혜담은 어느새 할머님들과 집 안에 같이 있었다.

혼자 그걸 다 어찌하냐고. 이런 건 여자 손이 필요하다는 말로 집 안으로 들어오신 할머님들을 위해 믹스 커피를 탄 혜담은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었다.

“네, 어제 읍내 나가서 부동산에 말했어요. 시세보다 싸더라도 빨리 팔아 달라고 했는데, 언제 팔릴지는 잘 모르겠대요.”

“이 산골 집을 누가 선뜻 사겠어. 그래도 다 임자 있는 법이니 급하게 생각하지 말어.”

“그러려고요. 커피 드시고 하세요. 커피 말고는 뭐 드릴 게 없어서…….”

“주긴 뭘 줘. 커피믄 됐지. 마음 추스르고 잘 사는 게 효도하는 거야. 알지?”

“네.”

“근데 저짝 친구는 교환학생 뭐 그런 거야? 한국말 잘하든데.”

“네? 아, 네, 네.”

“한국 이름이 온달?”

“그…… 그렇죠”

역시나 호기심 많은 할머니들의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그렇게 쉼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할머니들의 빠른 손에 의해 집안 살림들은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지난 추석에 내려와 할머니를 뵙고 갔었고, 연로하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찾아 주는 이가 거의 없는 빈소를 지키는 동안 혜담이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 이제 마음껏 응석을 부릴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힘들면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분주히 오가며 도와주시는 할머님들의 수다를 듣던 혜담은 어느새 그녀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종량제 봉투에 가득 든 쓰레기들을 마당에 내어놓고, 옮기라는 것 옮기고 치우라는 것 치우고.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혼자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엄두도 나지 않던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다들 하고 있어. 나는 가서 국수 좀 삶을랑께.”

“신김치도 쫑쫑 썰어 와.”

“조개 있으면 넉넉히 넣어. 멸치보다 조개지.”

“조개가 없어. 주는 대로 먹어.”

“우리 집 냉장고서 꺼내 가.”

점심 메뉴 하나 정하는데도 수많은 말이 오가고 할머님이 시키는 대로 커다란 종량제 봉투 하나를 또 끌고 마당으로 나온 혜담은 집 앞 배추밭을 바라보았다.

집안일도 서툰 온달인데 밭일은 제대로 할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다.

배추 털고 엮는 건 프로 일꾼들이 했고, 온달은 그들이 뽑아 놓은 배추를 들어 레일 위에 있는 상자에 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힘과 요령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또 가슴이 일렁거렸다.

말이 없는 편이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환경에 덩그러니 던져진 상황에서 온달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제 낯선 곳에서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떴다. 상황 파악하고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며칠이 걸릴 것 같은데, 온달은 모든 것을 다 통달한 것처럼 행동했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밭일을 하는 모습에 입 안이 씁쓸했다. 원두가 너무 타 버려 쓴맛밖에 남지 않은 커피를 마시면 이런 맛일까?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며 이어지는 노동에 힘들었는지 허리를 곧게 편 온달이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집에 파스가 있던가? 오늘 밤 근육통으로 꽤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혜담은 멀리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거리가 있어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팔을 들어 이마를 슥 문지르며 땀을 닦는 그가 피식 웃은 것 같았다.

지난밤 있었던 그 입술 박치기가 고의인지 실수인지 같은 말을 포함해서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한데 이젠 그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거친 세상에 홀로 남아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가야 하는 동지라고나 할까? 혜담은 그길로 밭으로 향했다.

“안 힘들어?”

“안 힘들겠어?”

“……할머니가 국수 삶으신대. 같이 먹자.”

“응.”

온달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밭을 둘러보던 혜담은 그가 자신이 아닌 어딘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내 그가 밭 바로 옆에 있는 산 초입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는 같이 쳐다보았지만 산 초입은 초입일 뿐이었다.

“총 좀 가져와.”

지금껏 잘 끼고 있던 목장갑을 벗으며 그가 하는 말에 혜담은 눈을 끔벅거렸다.

“권총 말고, 사냥용으로.”

총? 초옹? 초오옹?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입니다만. 총기 소지가 합법이라고 해도 권총에 사냥용에 용도 다양하게 골고루 소지하고 있을 사람을 잘 없을 것 같은데?

“뭐?”

“어제 멧돼지 또 왔잖아. 계속 내려오는 걸 보니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얼쩡거릴 정도면 보통 아니야.”

“…….”

“없어?”

“있겠어? 거기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기 풀이랑 큰 돌 있는데 그쪽 뒤에 있잖아. 활도 없지?”

도대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면, 권총에 사냥총에 활이 당연히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니? 어이없는 상황에 혜담은 여전히 온달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보았다.

“말도 없고.”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을 무시했더니 온달은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다.

“너도 말하면서 없을 거라는 거 알긴 알지? 거기다 뭐가 보인다는 거야?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시력이 2.0 이상이라도 돼?”

“말이랑 사냥총만 있으면 반나절이면 근처는 대충 정리할 것 같은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혜담은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진짜 평범하게 산 게 아님이 분명했다. 말 타고 총 소지하고 산속을 다니면서 사냥하는 것이 그에겐 별로 새롭거나 특이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시력은 최소 2.0 이상인 것 같고.

“취미가 사냥이었어?”

“대디랑 꽤 자주 다니긴 했지. 코맘은 싫어했지만 말이야.”

“말이랑 총이 있다고?”

“본가엔 있지.”

“본가가 어딘데?”

“…….”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이어지던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다시 바라본 온달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전히 숲 언저리를 보고 있긴 했지만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가자. 국수는 금방 삶아.”

어렴풋이 과거 기억이 났다면 생각보다 기억이 빨리 돌아올지도 몰랐다. 대디가 누구인지 코맘이 누구인지 그리고 말도 총도 다 있는 본가가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혜담은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실존하길 바랐다.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그에겐 대디도 있고 코맘도 있고 본가도 있고 말도 있고, 본가가 있다는 말은 다른 집도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방금까지 같은 처지라고 가졌던 동질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입을 닫고 미간을 찌푸린 온달은 할머니들의 수다 속에서 국수를 먹을 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국수를 받을 때 두 손으로 그릇을 받으며 “잘 먹겠습니다.”, 다 먹은 후 “잘 먹었습니다.” 하는 격식에 딱 맞는 말이 전부였다.

하루 일하기로 했으니 온달은 식사 후 바로 밭일을 하러 나가고, 순식간에 정리가 끝나 텅 비어 버린 집에 혼자 남은 혜담은 냉동실을 열었다. 서울까지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다 가져갈 수도 없기에 대부분의 음식들은 할머님들께 나눠 드린 상태였다.

커다란 냉동실엔 얼린 고등어 두 손과 돼지고기 한 뭉텅이만 놓여 있었다.

고기 먹고 싶었나 보지. 일당에 대해 묻던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게 고기를 먹을 수 있냐 없냐였다. 이미 아침 버스를 놓쳤기에 읍내로 가서 고기를 사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받은 일당을 들고 내일 나가서 사 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꽁꽁 언 고기를 밖에 내놓은 혜담은 집 밖으로 나가 창고를 뒤적였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몰려와서 마당에서 캠핑 아닌 캠핑을 즐겼으니까. 조금 춥긴 하겠지만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캠핑이었다.

혼자도 아니고, 같이할 사람도 있고. 어제 먹다 남은 소주도 있고.

번듯하고 멋진 바비큐용 그릴이 아닌 그을음 가득 묻은 양철통 비슷한 것부터 끌고 나왔다. 양철통 아래 장작을 쌓고, 석쇠를 씻고, 옆집 할머니께 채소를 얻어 왔다.

집 안과 마당을 오가며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혜담의 시선은 계속해서 밭으로 향했다.

“진짜 밭일하는 사람 같네.”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장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늦은 오후, 오늘 일을 끝낸다는 작업반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혜담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에 불을 붙였다. 좁은 거실에 있던 상은 평상 위에 자리 잡았고, 그 위로 갓 지은 밥과 야채, 신김치 등 돼지고기와 먹을 밑반찬들이 투박스럽게 놓여 있었다.

토치를 들고 불이 온전하게 붙기를 기다리던 혜담은 낡은 철문을 밀고 들어오는 온달을 향해 씩 웃었다.

“씻고 나와. 고기 구울게.”

온달은 평상 위에 하얀 봉투를 내려놓고는 목에 둘렀던 수건을 휘둘러 몸에 묻은 흙들을 툭툭 털었다.

“이거 가져가.”

별다른 대답 없이 흙을 털고 들어가는 온달을 지켜보던 혜담은 평상에 놓인 일당이 들었을 봉투를 보고 소리쳤다.

“네 거야.”

“뭐? 이걸 왜 날 줘?”

“배고파. 고기 먹고 싶어.”

질문엔 대답하지도 않고, 집으로 쑥 들어가 버린 온달 때문에 또 홀로 남겨진 혜담의 시선이 봉투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이상한 놈.”

내일은 읍내 나가서 제대로 된 옷이라도 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혜담은 봉투를 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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