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혼을 빼놓고, 집도 태워 먹을 뻔하더니. 술 먹다 말고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 같이 부어라 마셔라 한 혜담 역시 몽롱하게 취한 상태라 행동이 평소보다 굼떴다.
커다란 눈이 느릿하게 껌벅거렸고, 한순간 사르르 내려앉는가 싶었지만 다시금 번쩍 뜨인 크고 동그란 눈동자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가득했다.
“야!”
뒤늦게 바둥거리며 앞에 있는 거대한 덩어리의 어깨를 힘껏 밀어낸 혜담은 뒤 이어진 쿵. 소리에 반사적으로 “뭐야!”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것은 바닥에 누워 있는 온달이었다. 갑자기 빵 타령을 하다가 호기롭게 입술 박치기까지 한 놈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결론이었다.
목에 입술이 닿을 때까지만 해도 취해서 기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뜻하면서도 말랑한 감촉과 좋아하는 커피 향이 온몸을 뒤덮는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뭣도 하기 전에 자? ……진짜 자냐? ……설마 또 머리 박아서 이상한 일 일어나는 거 아니지?
황당한 상황에 대충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른 혜담은 발끝으로 슬쩍 온달을 밀어 보았다. 딱히 밀리지도 않지만 몇 번 쿡쿡 찔러 봐도 큰 반응이 없기에 이번엔 기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야 했다.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두툼한 가슴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결까지 확인한 혜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설마 미자는 아니겠지?”
맥주에 소주, 술을 섞어 먹긴 했다만 그래도 만취할 만큼 마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원래 술이 약한가? 미성년자에게 술 먹였으면 범죄인데. 역시나 오늘도 분주한 혜담의 머릿속은 쓸데없는 망상을 끝없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온달.”
환기로 인해 냉기 가득한 집에 다시금 온기가 돌고, 적당히 술도 마셔 나른해진 혜담은 방이 아닌 좁은 거실 겸 부엌 바닥에 누워 있는 그를 작게 불렀다.
지금이라도 제 발로 일어나 침실로 가서 자면 좋겠지만, 온달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금 그를 집 안에서 굴리고 끌면서 방까지 끌고 갈 만한 열정이 없는 혜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 만들고 사람 기분까지 묘하게 뒤흔든 온달을 보는 혜담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저를 완전히 잡아먹을 것 같았던 커피 향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온몸을 뒤덮던 기묘한 감각도 울렁거리던 속도 어느 순간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발이라도 붙은 듯 한참을 온달을 내려다보던 혜담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자업자득.”
이때 쓰는 말로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혜담은 개의치 않고 중얼거리며 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나왔다.
잠이 든 건지 취해서 뻗은 건지 또다시 머리에 가해진 충격에 의한 기절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온달을 챙겨 준 혜담은 느릿하게 먹은 것들을 대충 치웠다.
“야, 온달. 부디 네가 평강공주 만나서 행복해져라. 그 전에 기억 찾는 게 먼저겠지만.”
불을 끈 혜담은 푹신한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싶었지만 혜담의 망상은 그리 길지 않았고 집 안은 두 사람의 고요한 숨소리와 커피와 빵 냄새만 가득했다.
* * *
“아으. 이래서 내가 섞어 먹지 않는데, 하…… 진짜…….”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면서 일어난 혜담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대충 팔로 앞을 휘저으며 침실을 나섰다. 욕실로 들어가 미적지근한 물에 세수와 양치를 한 후,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 나서야 혜담은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레토르트 식품들의 흔적이 가득한 상에서 시선을 돌려 개수대를 보자 그 안에 술잔과 수저들이 들어 있었다. 다음으로 싱크대에 곱게 올려져 있는 빈 술병들을 세던 그의 시선이 다시 상으로 향했다.
거대한 것이 있어야 하는 자리엔 잘 개어진 이불과 베개만 있었다. 이불과 베개만 아니었다면 혼자 우울함에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다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온달이 없다고? 지끈거리는 두통과 메슥거리는 숙취를 느낄 새도 없이 혜담의 눈은 좁은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침실엔 분명 저 혼자였고, 방금 욕실을 사용하고 나왔다. 남은 건 할머니 방이지만 그 방은 처음부터 열지 않았고, 지금도 다른 방들과 다르게 문이 꼭 닫혀 있었다.
“갔어?”
은혜도 모르는 놈. 설마 지난밤에 기억이 다 나서 말도 안 하고 가 버린 거야?
현관으로 간 혜담은 슬리퍼가 없는 걸 확인했다. 키도 체격도 큰 만큼 발도 컸기에 온달이 이 집에서 신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슬리퍼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억지로 발가락을 밀어 넣은 것이고, 뒤꿈치는 쑥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겉옷을 챙겨 입을 새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혜담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이 동네는 해 빨리 떨어지니까 서두르자고. 거기 레일 다 됐어? 아줌마들은 배추 털고 끈으로 묶고, 그쪽은 하나씩 뽑아서…….”
이틀 전에 비가 왔으니 더 냉해를 입기 전에 배추와 무를 수확해야 하는 건 맞다. 어릴 때부터 늘 보아 왔고 들어 왔던 풍경을 혜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요하던 산골 마을이 시끄러워질 때는 이렇게 밭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뿐이었다.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대충 신발이라 느껴지는 것에 발을 꿰어 넣은 혜담은 몇 걸음 더 걸어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혜담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훤칠하네. 이름이 뭐라고?”
“아까 온달이라 그랬잖어. 학생. 이해해. 이 할매가 귀가 좀 어두워. 그런데 여자 친구는 있고?”
“아니 뭘 그런 걸 물어 주책맞게. 남자고 여자고 아주 줄줄 따르게 생겼고만 애인이 없겠어?”
“왜? 우리 혜담이도 멀끔하게 생겼는데 애인 없잖어.”
“고놈은 매꼬롬하니 예쁘장하게 생긴 거고. 요 친구는 뭐시냐 그 눈 돌아가게 잘났잖아.”
그리 높지 않은 담벼락 밖으로 삐죽이 솟아 있는 덩어리와 보이지는 않지만 귀에 익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혜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혜담이가 많이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이리 챙겨 주는 친구도 있고.”
“애가 착하잖아. 요즘 그런 애가 어딨어? 박 씨도 그만큼 살았으면 된 겨. 호상이지. 큰 병을 앓았나, 힘들게 고생을 했나. 고렇게 자면서 가야 되는데…… 에잉.”
“이야기 들어 보니 바쁘다던데, 언제 돌아가?”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 없이 할머니들의 목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하긴 사람 앞에 두고 무언가 질문을 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다들 이야기하시느라 정작 혜담 자신은 대답할 겨를이 없을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온달도 그의 가슴께도 오지 않는 작은 할머니들에게 둘러싸여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녀들의 수다에 휘말려 있었다.
“거기. 놀지 말고 어서 와서 일해.”
“언제 가긴 언제 가. 주말에 가겠지.”
“그만 놀고 이리 오라고!”
조금 더 걸어 나가 마당 한가운데 선 채 바깥을 지켜보던 혜담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대환장도 이런 대환장이 따로 없네.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은 온달은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겉옷도 입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 끝에는 물방울이 얼어붙어 있었다. 어제 입었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인 걸 보아하니 씻고 옷을 찾아 입은 것 같았다. 씻은 후, 밖으로 나왔다가 이 모든 일에 휘말렸겠지.
새벽부터 일꾼들이 몰려왔을 테고, 새벽잠 없는 할머니들은 구경도 할 겸 마실을 나왔을 것이다. 그러다 온달을 보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거고.
문제는 건장한 체격의 온달을 일꾼으로 생각하는 쪽이었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밭 한쪽 길에 서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누가 봐도 노는 걸로 보이겠지.
“조용히 좀 하쇼. 이 친구는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 손주 친구니께.”
계속해서 온달을 부르는 소리에 은방울 할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마을에서 가장 작고 귀엽게 생기신 할머니의 별명은 은방울이었다. 반면 목소리는 가장 크셨다.
“학생. 일해 볼 생각 없나? 일당 두둑이 챙겨 줄게. 두 명이나 펑크내서 일손이 모자라는데, 체격도 좋고 일 잘할 것 같은데.”
“아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거지. 뭔 애한테 일을 시키려고…….”
“일당이 얼맙니까.”
온달에게 일할 것을 권유하는 작업반장의 말을 댕강 내치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온달의 목소리에 묻혔다.
“오메. 목소리도 좋네 그려.”
“30. 잘하면 끝나고 조금 더 얹어 주고.”
“……할게요.”
“옷 갈아입고 와. 그래 입고 일하다가 얼어 죽지.”
제가 나서거나 끼어들 틈도 없이 모든 일이 끝나 버린 상황에 혜담은 멍하니 서 있었다.
“30이면 어느 정도야?”
방금까지 담 밖에 서 있던 온달이 들어와서 하는 말에 “서울까지 차비하고…….” 혜담은 저도 모르게 30만 원으로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떠올리며 웅얼거렸다.
“고기 먹을 수 있어?”
“소고기로는 배 못 채워도 돼지고기로는 충분히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술도?”
“아마도.”
혜담은 준석의 옷을 잘도 찾아 입은 온달이 옆을 지나칠 때까지도 마당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