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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인덕션을 쓰니 가스레인지 쓰는 법이 서투를 순 있다. 혜담 역시 서울의 전월세집은 인덕션을 쓰니까 말이다. 한데 전자레인지 못 쓰는 건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가스레인지도 못 쓴 건 아니잖아.
알아서 불도 켰고, 놀라서 그랬는지 무슨 일인지 끄는 건 까먹었지만 말이다.
레토르트 식품 포장지에 적힌 대로 귀퉁이를 조금 연 음식들이 상에 놓여 있고, 전자레인지 앞에서 몸을 굽히고 버튼 앞에서 헤매고 있는 기다란 손가락을 본 혜담은 그의 옆으로 가 몸으로 그를 툭 밀었다.
“진지하게 묻는데, 세탁기 돌릴 줄은 알아?”
전자레인지 문은 그래도 용케 잘 열었네. 전자레인지 안에 든 재료를 확인하곤 빠르게 버튼을 눌러 가동시키고 물러선 혜담은 턱을 괴고 서 있는 온달을 올려다보았다.
넣고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을 몰라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던 온달이었다. 글자도 아는데 사용법을 모르는 건 무슨 경우이지? 기억을 잃으면 그런 단순한 것도 까먹으려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엔 건조기도 없는데, 빨래 밖에 너는 건? 물론 시간이 지나고 빨래가 마르면 걷어서 개어야 되는데, 그건?”
말을 할 때마다 눈썹이 이리 꿈틀, 저리 꿈틀하는 것을 보다 턱을 만지고 있는 크고 긴 손가락에 시선을 둔 혜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는 걸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모를까? 하지만 기본적인 가전제품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오전에 보니 혼자 씻을 땐, 샤워기나 그런 것들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지 않았었다.
혹시 생긴 모습처럼 그렇게 살아왔으려나?
생긴 모습은 흡사 어디 유럽의 귀족 집안 자제 그 이상.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아니면 그 이상급의 수저라도 물고 태어났을 것 같았다.
피부 관리는 따로 받는 것인지 잡티 하나 없이 하얀 얼굴도 그렇고, 그의 손 역시 거친 일이라고는 조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의 손 같다.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에 힘이 있는 것도 처음 만난 제게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하고 명령조의 어투를 사용하는 부분까지 그러니 이런 사소한 일을 못 하는 건 당연한 사람 같았다.
혹시 너 어린 시절 돌봐 주는 보모가 서넛은 족히 되고, 제 손으로 음식 한번 만든 적 없고, 물론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빨래 같은 건 그냥 욕실 빨래 바구니에 넣고 나오면 끝. 뭐 그런 삶을 살아왔니?
학교 다닐 땐 운전사가 널 모시고 다니고, 쇼핑 같은 거 직접 매장 가는 거나 인터넷으로 클릭하는 게 아니라 백화점이나 아니면 집으로 퍼스널 쇼퍼들이 물건 갖고 와서 고르고 그런 상위 0.00001% 이상의 그런 삶 말이야. 밖에 다닐 땐 앞뒤로 경호원들이 붙고, 전용기 타고 날아다니는…….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며 잘난 외모를 뜯어보고 있던 혜담은 조리가 다 됐음을 알리는 알람음에 전자레인지를 열었다. 뜨거운 습기와 함께 훅 끼쳐 오는 맛있는 냄새에 입꼬리를 슬쩍 올리곤 행주 집으러 돌아서던 혜담의 귀에 들려선 안 되는 소리가 들렸다.
“아뜨…….”
“하아.”
다행히 중간에 바닥에 엎지 않고 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긴 했지만, 많이 뜨거웠는지 놀란 듯한 온달을 보며 혜담은 제가 이름 하나는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평강공주 기분이 이랬으려나? 진짜 허우대만 멀쩡했지. 하는 짓이…….
그냥 지금이라도 112 누를까? 혜담은 손목에 차고 있는 워치를 잠시 바라보았다.
파출소에 데리고 갔는데, 신분 조회가 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외국인으로 보이니 불법입국자나 뭐 그런 것으로 처리되려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이 사람은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인계될 테고, 그럼 유치장에서 지낼 것이다.
그러다 그다음엔…….
한번 본 건 바로 배우는지 온달은 뜯어 놓은 레토르트 식품을 바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조리 버튼을 눌렀다.
방금 방화미수에 이어 음식조차 제대로 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인지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을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모르는 거나 궁금한 거 그런 것들 있으면 말해. 가르쳐 줄 테니까, 이름이랑 뭐랑 다 까먹었다며. 그럼. 다른 것들도 같이 좀 까먹을 수도 있지.”
“이런 일은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검지로 눈썹 위를 긁적이며 솔직하게 하는 말에 혜담은 말없이 몸을 움직여 수저를 찾았다. 기억해 내라고 재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 성격상 경찰의 손에 이끌려 그가 어디로 가는 걸 지켜볼 수도 없을 것 같다.
“내일 병원 가자.”
의료 보험 없이 그냥 진료받으면 금액이 얼마나 나오려나? 무보험으로 진료받으면 엄청 비싸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일단 머리도 다쳤고 정말 다리가 불편한지 걸을 때 멈칫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이러니 내가 호구 소리 듣지.
그래도 사람 쫓아내 놓고 마음 불편하게 사느니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착한 일 하면 복 받는다잖아. 혹시 알아 나도 복이란 걸 받아 볼지.
전자레인지 앞에 짝다리를 하고 서 있는 온달을 테이블 앞에 앉힌 혜담은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냈다.
“병원도 싫어?”
아픈 사람에게 술을 줘도 될지 모르겠다만, 레토르트 막창을 데웠는데 술 없이 먹고 싶지 않았다.
맥주캔 하나를 건네자 망설임 없이 능숙하게 따서 먹는 걸 보니 선택적 기억장애인가 싶었지만 길게 생각하기보다 혜담 역시 맥주캔을 따려 했다. 하지만 제가 따려는 캔을 가져가고 방금 딴 캔을 주는 온달의 행동에 혜담의 한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맥주캔을 대신 따 주는 건 또 뭐야. 아주 매너가 없는 건 아니려나?
“그거 매운…….”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맛은 괜찮은데?”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필수 가전제품 쓰는 건 서투른 것에 반해 젓가락질은 능숙하고 거기다 매운 것도 잘 먹었다.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빠르게 사라지는 막창을 보곤 혜담 역시 지지 않고 젓가락을 놀렸다.
처음엔 막창이었지만 다음으로 사 온 레토르트 불닭발에 이어 순댓국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은 혜담은 즉석밥까지 꺼냈다.
“이상하게 들릴 건 아는데, 굳이 다른 곳에 연락하거나 방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 기억이 돌아오든 아니면 누군가가 알아서 날 찾으러 올 것 같거든. 다리도 조금 삔 것이지 크게 다친 것 같지 않고. 그리고 이 근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대부분 제가 먼저 말을 꺼냈건만, 제가 없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는지 찬찬히 말을 꺼내는 온달에게 집중한 혜담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누가 써 줘.
“몇 가지 가정해 보자고. 일단 그쪽이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거든. 한국인도 아닌 것 같고, 한데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인들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도 잘 먹잖아. 그렇다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쳐.”
허리를 곧게 편 혜담은 빠르게 말을 하면서 마주 앉아있는 온달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다음으로 그쪽 외모나 손이나 하는 행동을 보면 몸 쓰는 쪽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 모델이나 연예계 쪽이라 치면 이해할 수 있겠는데, 댁 같은 얼굴이 그쪽에 종사한다면 내가 왜 모를까? 내가 그쪽에 관심이 없긴 하다만 그쪽 외형을 봐서 잡지나 광고에서 한 번은 봤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야.”
지금까지 반말과 존대가 어색하게 섞여 나오더니 술이 한잔 들어가서 그런가 이제는 반말이 편하게 나왔다. 그렇게 반말을 죽 늘어놓던 혜담은 전자레인지 알람음을 듣고는 일어나 데워진 순댓국을 둘의 사이에 놓았다. 지금껏 먹던 맥주캔은 두고 냉장고에서 이번엔 소주를 꺼내 왔다.
“지갑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고, 장신구라고는 어떤 상표도 없는 옷들과 시계가 전부…….”
소주잔 대신 물이 든 컵에 남은 물을 홀랑 마시고 그 안을 소주로 채운 혜담은 계속 말했고, 상대는 듣기만 했다.
“어둠의 사람?”
“그러기엔 주먹이나 몸에 특별한 외상이 없던데.”
“아! 그럼. 뭐지?”
“그런데 진짜 빵 없어?”
순댓국에 소주 먹으면서 웬 빵 타령이야. 그런데 이 와중에 커피 냄새는 뭔 일이래. 어제부터 커피 향 때문에 정신이 다 없네.
없다는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해 보인 혜담은 알아서 소주를 마시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제 옆으로 가까이 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왜 가까이 오지, 라는 생각보다 커피 맛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갓 구워 낸 빵 냄새가 너한테서 나.”
“에이. 뭔 빵……. 아 맞다. 이거 안 물어봤다. 알파? 생긴 거 딱 알판데, 내가 베타이니 알 방법이 있나. 뭐 그건 기억 잃는 거나 지금 상황이랑은 상관없긴 해도 궁금해서.”
“알파 아니야. 알파인데, 알파 아니라고 했어. 그리고 조금 전부터 나던 향은 빵 맞아.”
제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잠시 제 목덜미에 가까이 와 속삭이는 온달의 목소리와 행동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는 빵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혜담은 커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알파인데 알파 아닌 건 뭔데? 거기다 그건 기억이 난다고? 뭐냐. 네 기억은 간헐적이냐?
“먹고 싶다.”
당황스러움에 멈칫한 몸은 목에 닿는 낯선 촉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방금까지 코끝에서 살랑거리던 커피 향이 한순간 훅 짙어졌다. 옆에 있는 놈은 빵 타령 중이지만 혜담은 발아래부터 묵직하고 짙은 커피 향이 제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당황에 입 안에 고인 침조차 삼키지 못하면서도 혜담은 마지 늪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려는 커피 향을 떨쳐 내고자 발을 움직이려 했다.
향에 묶인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건가? 다리에 붙은 향을 떼어 놓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커피 향은 무섭게 온몸을 덮었다.
“맛있을 것 같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따뜻하면서도 말랑한 촉감 그리고 커피 향 가득한 음습한 공기에 혜담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무언가에 홀린 듯한 이상한 상황에서 그를 떼어 내곤 한마디 하려던 혜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감각이 사라지고 눈 앞에 초록색 보석이 나타났다.
“맛있어.”
보석은 아름답게 빛났고, 방금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 입술에서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