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4화 (4/86)

4

집을 정리하는 동안 그를 머무르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머무는 동안 난방은 해야 했고, 옷은 아쉬운 대로 준석의 것을 입으면 됐다. 먹을 것이야. 제가 먹을 것 살 때 조금 더 사면 됐다.

그런데 그 뒤엔?

할머니의 유품만 정리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때까지 이 사람이 기억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같이 서울로 가야 하나?

지금 눈앞의 급한 일이 아닌 먼 미래까지 생각하던 혜담은 얼른 머리를 털었다.

“부동산이나 가자.”

상황이야 어떻든 할 일은 해야 하기에 외출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혜담은 여전히 평상에 앉은 온달의 뒷모습에 흘러나오던 한숨을 삼켰다. 잠시 기억을 잃은 것이면 좋겠다. 가끔 무언가를 깜박하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잖아.

물론 파출소나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 뒤에 따르는 무수한 일들이 귀찮은 혜담이 할 수 있건 기다림뿐이었다.

그나저나 추운데 왜 저리 오래 앉아 있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어젯밤에 비도 그리 맞았는데, 따뜻한 아랫목에서 낮잠이라도 자는 게 어떨는지…….

“온달, 나 읍내 갔다 올게. 냉장고에 과일 남아 있어. 오는 길에 이것저것 사 올 거니까, 참. 부엌 찬장에 라면 있으니 배고프면 라면 먹어요. 근데 진짜 같이 안 가? 파출소 가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에게 말을 하던 혜담은 온전히 말을 맺지 못하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낡아서 삐거덕 소리가 나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철문을 닫은 혜담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달의 모습에 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가지 말고. 어. 누가 와도 문 열어 주지 말고. 올 사람 없거든. 어…… 다녀올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버벅거리며 아무 말이나 뱉은 혜담은 제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온달의 모습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입이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면 놓쳤을 그 제스처를 보고 만 혜담은 좁은 길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잠시 느끼지 못했던 커피 향이 느껴지면서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대놓고 고맙다고 말했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쩍 미소 지은 그 얼굴과 살짝 움직이던 그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혜담은 두 손을 들어 제 양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 어제 내가 주운 게 사람이 아니라. 혹시 구미호 아냐? 꼭 구미호가 암컷이라는 법이 어딨나? 수컷 구미호도 있을 수 있지. 계속해서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차는 상황에서 혜담은 엄지와 검지로 제 코끝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커피를 직접 볶아 쓰는 카페는 근처에 없는데 왜 이리 진한 커피 향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읍내에 도착하자마자 카페에 들려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받았지만 혜담의 표정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이런 향이 아니다.

정말 질 좋은 생두 상태의 커피콩을 은은한 불에 뭉근하게 볶을 때 나는 그런 향이다. 정말 향긋하고 구수하며 알싸함이 포함된 향을 떠올리며 혜담은 검지로 코 아래를 마구 문질렀다.

즐겨 먹던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맛이 없을 줄이야. 불면증에 잠을 자지 못하더라도 맛있는 커피라면 늦은 밤에도 마실 수 있는 미각을 가진 혜담은 처음으로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부동산에 들러 집값은 중요치 않다고 크게 손해 보지 않을 정도 수준에서 알아서 팔아 달라는 말을 한 혜담은 근처 마트로 향했다.

두 손 무겁게 먹을 것들을 잔뜩 사고 하루에 두 대 있는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혜담의 심장이 이상하게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 할머니에서 기말고사, 인턴 지원서도 생각했지만 매번 그 끝은 미지의 남자였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커피 향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산속의 밤은 빨리 찾아왔고, 버스에서 내려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에 의지해 어두운 길을 따라 집에 다다랐을 때, 혜담의 심장은 마치 100m 달리기라도 한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허전한 평상 너머 있는 작은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확인한 혜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읍내 다녀오는 사이가 그가 떠났을지도 몰랐으니까.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혜담은 이상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늦은 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는 냄새라고 하기엔 참으로 불안한 향을 갖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평상에 짐을 내려놓고 집으로 뛰어가 문을 활짝 연 혜담은 다음 순간 매캐한 냄새에 코와 입을 막고는 기침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켁. 쿨럭. 뭐…… 이거…… 뭐야. 온달!”

희뿌연 연기까지 나오는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집 안에 온달이 있는 것을 떠올리고 급히 안으로 들어간 혜담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움직이자 얼른 밖으로 나오라는 뜻을 담아 크게 손짓했다.

“괜찮아.”

“쿨럭…… 응?”

“괜찮다고.”

도대체 뭐가 괜찮은데? 문을 열면서 밖으로 흘러나온 하얀 연기가 점차 사라지고 안의 상황을 제대로 보게 된 혜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연신 기침을 해 대는 자신과 다르게 온달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불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불은 나지 않았다. 날 뻔한 거지.

손으로 얼굴 앞을 휘저으며 가까이 다가간 혜담은 싱크대에서 차가운 물줄기를 맞고 있는 시커먼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 이렇게 시커먼 색을 가진 덩어리 같은 게 있었나? 싱크대 옆에 대충 찢어져 나뒹구는 라면 봉지와 그 옆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지만 켜져 붉고 푸른 빛을 내고 있는 가스레인지를 보고는 얼른 가스레인지부터 껐다.

“뭐야?”

“라면.”

“라면이 왜 이래?”

“아…… 잠시 나갔다 왔는데, 이렇게 됐어.”

잠시 나갔다 왔다고? 너의 그 잠시라는 단어의 시간적 정의는 어떻게 되는 거니? 잠시라는 시간이 네겐 한 시간 되니? 나한텐 5분 안쪽인 것 같은데. 시간관념이 우리가 다른 거니? 너 정말 바보니? 라면은 3분이야. 나가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불 앞에 서서 보글보글 끓는 걸 보면서 면이 익기를 잠시! 기다리는 거라고.

설명서대로 물을 넣고, 라면을 넣었다며. 거기 3분 정도 끓이라는 글자는 못 읽었니? 글자는 읽었는데 숫자는 못 읽은 거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제발 나에게 설명이라는 걸 해 줄래?

자신의 재촉에 온달이 상황 설명을 시작했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혜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간단히 말해 라면을 먹으려던 온달이 끓는 물에 라면과 수프 가루를 넣고 몸이 찌뿌둥해 잠시 마당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밖을 기웃거렸고. 그런데 갑자기 집 앞에 있는 밭에 뭔 커다란 게 돌아다니길래 그걸 쫓았단다.

갑분 멧돼지? 하긴 가끔 내려오긴 한다만, 멧돼지가 얼마나 무서운데 그걸 네가 왜 쫓아내려고 해? 거기다 앞에 있는 밭. 우리 밭도 아니야. 어쨌거나 네가 밭으로 가니까 멧돼지가 다시 산으로 갔다고? 그러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됐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혜담은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로잡아 줘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일단 창문이나 다 열라는 제 말에 집 안의 문이란 문은 다 열었고, 집 안을 가득 채웠던 연기와 탄내가 조금 가셨을 때 혜담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추위였다.

늦은 밤 집에 문이란 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켰으니 추운 건 당연하지.

시커먼 재가 되어 버린 냄비를 들어 집 밖에 내놓은 혜담은 작은 소리로 온달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한번 평상 위에 있는 짐을 한번 바라보곤 말없이 집으로 들어가 열어 놓은 창들을 하나씩 닫았다.

사고 친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평상에 둔 짐을 들고 들어온 온달이 열어 놓은 창문을 닫는 걸 돕기 시작하자 이번엔 혜담이 그가 들고 들어온 짐을 풀기 시작했다.

“멧돼지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걸 쫓으러 나가요?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라면을 먹고. 여기 사과도 있는데 사과는 왜 안 먹었어! 사과는 안 깎아도 되잖아요. 흐르는 물에 씻어서 그냥 베어 먹으면 되는 건데.”

냉장고를 열자 세 알 남아 있던 사과가 그대로 있는 것이 보였고, 혜담의 입에서 절로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인가? 쫄쫄 굶던 그가 라면 하나 끓여 먹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울 뻔한 걸 생각하자 속이 답답해졌다.

낮에 말하는 걸 봐선 딱히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거나 하진 않을 것 같더니 속은 또 그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 온 것들을 다 정리하고 돌아선 혜담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집 안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그를 보곤 손짓을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빵 냄새 나던데…….”

“빵? 빵은 안 샀는데, 그럼. 내일 빵 사 올게.”

밥보다 빵을 좋아하나. 빵부터 찾는 그의 말에 냉큼 대답한 혜담은 레토르트 식품 몇 개를 꺼냈다.

“씻고 올 테니까, 여기 이것들 전자레인지에 돌려요. 그건 할 수 있죠?”

대답 대신 레토르트 식품을 들고 설명서를 보는 모습을 확인한 혜담은 옷가지를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진짜 이상하지. 도대체 이 커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야. 환기를 시켰다고는 하지만 탄내가 완전히 가지 않은 집 안에선 은은한 커피 향도 같이 나고 있었다.

급한 대로 밑반찬과 고기류,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들부터 사다 보니 주전부리는 전혀 사지 못했다. 그랬으니 당연히 빵도, 커피 같은 음료도 사지 못한 것이다. 빵집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온달은 갑자기 왜 빵 타령이지?

어떤 변화도 없이 고인 물 같던 혜담의 하루가 한 사람의 등장으로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변해 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