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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3화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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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정신을 잃어서 평소보다 더 무겁고 축축 처지는 사람을? 집 앞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부터 이 집 안까지 데리고 들어왔다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띠고 있던 혜담은 슬쩍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60kg 중반대의 자신이 100kg은 족히 되고 저보다 20~30cm는 큰 남자를 안으로 무사히 안전하게 이곳으로 이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긴 했다. 그래서 힘들면 팔만 잡고 질질 끌기도 하고, 집 안에선 굴려서 이동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옮긴 건데, 의심부터 한다고?

지금 생명의 은인을 의심해? 와. 진짜 잠들기 전에 생각한 게 맞네.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네.

“지금 의심하는 겁니까?”

“안 할 순 없잖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쪽 외국인이잖아요. 그런데 한국말 왜 그렇게 잘해요? 거기다 언제부터 나 봤다고 반말해요? 나이도 모른다면서요!”

“누구에게 물어도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목소리를 키운 것도 아니고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닌 채, 덤덤하게 자신이 하는 말마다 부정할 수 없는 대답을 너무 쉽게 내놓는 상대 때문에 혜담은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외국인인지라 나이 가늠이 더 어려웠다. 어려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체격이나 이런 걸 보면 더 들어 보이고 어쨌거나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 그럼, 나도 반말할…… 할게.”

차라리 말로 해. 버럭하는 자신의 말에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대충 턱짓으로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제스처를 하는 남자를 보니 끓어오르던 분노와 당혹감이 허탈하게 사라져 버렸다.

눈을 떴는데 기억도 나지 않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 머리에 상처까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발목도 아프다며. 그 말은 아무리 봐도 기억상실을 말하는 건데. 그런 상황임에도 침착한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좁고 허름한 깡촌의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의 앉은뱅이 식탁은 그에게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백조가 유유하게 헤엄치는 아름답게 관리가 잘된 호수가 있는 고성의 테라스에서 쓰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홍차에 핑거푸드나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제 앞에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따가 같이 파출소 가……. 그럼. 알겠지……요.”

막상 반말을 했지만 밀려오는 어색함에 혜담은 아주 작게나마 “요”라는 존칭어를 붙였다.

“안 가.”

“뭐?”

“파출소를 가면 신분 조회나 이런 걸 하겠지? 지문 조회를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그런 것들을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그냥 있다 보면 기억나는 게 있겠지. 그동안 여기서 신세 좀 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잠시만요. 저기요? 분명 그쪽이 한 말에 신세라는 단어가 정확히 들어 있긴 한데 왜 그렇게 당당한데요? 그쪽이 내 집에 얹혀사는 건데 마치 내가 그쪽을 모셔야 할 것 같은 뉘앙스로 들리는데 그거 제가 잘못 들은 거죠?

거기다 난 이 집 정리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세 지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기다란 다리를 접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것이 불편했는지 천천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던 혜담은 몸이 뒤로 꺾이다 못해 상체 전체가 뒤로 젖혀지는 느낌에 얼른 몸을 바로 했다. 무슨 솟대도 아니고 진짜 크네. 조금만 더 컸으면 천장에 머리 닿았겠소.

“저기 그럼…….”

귀신에 홀린 건가. 얼떨결에 같이 일어난 혜담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을 하려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옷은 이것밖…… 없겠군.”

눈빛 하나로 사람을 조종한다는 말이 이런 건가? 호랑이 앞의 토끼도 아니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대의 시선이 다시 제 몸을 훑는 것이 느껴지자 혜담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옷 없을까 봐?

너랑 나랑 기본적으로 2~3 사이즈는 차이 날 것 같아서? 거기다 내가 표준인 거지. 네가 비이상적으로 거대한 거거든? 말을 다 하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제게 갈아입을 옷을 요구하려 했지만 제 몸을 보곤 말을 거둔 것 같았다.

“있어. 있다고. 있으면 어쩔 거고. 없으면 어쩔 건데. 주는 대로 입어야 하는 사람은 그쪽이지 내가 아니잖아.”

씨름 선수 출신 친구인 준석이 두고 간 옷이 있기에 혜담은 얼른 옷장을 열어 커다란 옷들을 꺼냈다.

“이거면 되지?”

키는 이 남자보다 작지만 어깨나 몸통은 만만찮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반바지도 준석이 것이 아니던가. 옷을 내밀었건만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친구 거!”

나 독심술사였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과 자신을 보기만 하는 남자를 향해 버럭한 혜담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는 옷을 집어 가는 남자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이내 욕실을 찾아 들어간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혜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청난 것을 주워 온 것 같은데, 어젯밤의 나 뭔 짓을 한 거냐.

내 코가 석 자이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혜담은 자신 하나 챙기기에도 급급했다.

울컥하는 감정과 우울함, 갑갑함이 몰려오다가도 남자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다. 혼자 덩그러니 좁은 거실 바닥에 남겨진 혜담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냉기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잘할 수 있어. 많이 생각해 봤던 상황이고 할머니와 이야기도 많이 나눴잖아.”

작게 웅얼거리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혜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네. 옆집 할매가 커피를 볶을 리가 없는데,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믹스 커피 좋아하시는데. 커피콩을 볶고 있을 때 나는 그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절대 이곳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이었다.

지난밤 자기 전에도 느꼈던 커피 향에 혜담은 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커피 마시고 싶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으며 입맛을 다신 혜담은 읍내에 가자마자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름은 어떡할래요? 계속 그쪽. 저기요. 이런 말을 할 순 없잖아.”

“날씨가 좋네.”

“저기요?”

“기억도 안 나는 이름 지금 기억해 내라는 거야?”

씻고 나온 남자와 좁은 집 안에 있는 것보단 밖이 나을 것 같아 마당에 있는 나무 평상에 앉은 혜담은 계속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일단 상대는 기억이 없기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힘으로 나가라고 하기엔 체격 차가 너무 컸고 파출소에 연락해 경찰을 불렀다간 일이 커질 게 분명했기에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충 물기를 털어 낸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든 말든 편하게 평상에 앉아 집 앞의 밭을 응시하며, 태평스럽게 말하는 그가 감당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건 아닌데 그가 하는 말들이 그리 곱지 않게 들리지만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속된 말로 뼈 맞아 순살이 된 기분이다.

거기나 일관적으로 꾸준히 반말하는 상대에 반해 자신은 반말도 존대도 반존대도 아닌 이상한 말을 쓰고 있었다.

나 며칠 전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가족인 할머니 돌아가셨고, 힘들고 지쳐. 이 집도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라고 외쳐도 되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 상황을 털어놓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떠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온달.”

“온달?”

바보 온달에서 따와서 온달이라고 부르려 했더니 또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것에 혜담은 얼른 고개부터 내저었다.

혹시 바보 온달 이야기 아는 거냐? 아무리 봐도 외국인이라 모를 것 같은데 무슨 인간이 눈치가 이렇게나 빨라. 처음이야 바보 온달이다만 평강공주 만나서 나중에 장군까지 되거든. 그러니 그리 나쁜 이름 아니라고.

“아뇨, 아뇨. 온달 몰라요? 온전한 달. 동그란 달. 보름달. 그걸 온달이라고 하잖아. 어제가 보름이라 어쨌거나 비가 와서 달이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보름달이 뜬 날 만났으니까…….”

“온. 달. 온달…… 온……달…….”

허겁지겁 떠오른 대로 말도 안 되는 해명을 내놓은 혜담은 혼자 온달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지금 제일 혼란스러울 사람은 이 남자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품은 맞긴 했지만, 손목과 발목이 덩그러니 나오는 남의 옷을 입고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은 이상한 단어의 새 이름을 받는 기분이 어떨까.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손목엔 그가 차고 있던 시계가 있었다. 고급스러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금색의 그 시계엔 어떤 마크도 없었다. 번듯한 유명한 시계 상표가 붙어 있을 만도 한 것에 아무것도 없으니 잘 만든 짝퉁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옷들도 상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물먹은 가죽 재킷은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몰라 그냥 그늘에 널어 놨고, 다른 옷들을 빨면서 훑어본 것이었다. 보통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소지품에서 상황을 볼 수 있었으니까.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안 나올 수 있을까?

어쨌거나 제 입에서 튀어나온 ‘온달’이라는 이름이 새로 생긴 남자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홀로 생각에 잠긴 채 곧 수확을 앞둔 배추와 무가 잔뜩 있는 밭만 바라보고 있기에 혜담은 조용히 그의 옆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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