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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2화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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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은 몸을 묵직하게 누르는 이불을 다리로 감아 옆으로 젖혔다. 이불 속과 다르게 서늘함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조금 더 뒤척거린 혜담은 소리 내어 하품을 하곤 기지개를 쭉 켰다.

거의 3일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오랜만에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혜담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흐릿했던 초점이 명확해지고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라는 것을 인지한 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우아. 어우. 아. 어.”

버둥거리며 겨우 일어나 앉아 마른세수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도 사람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침대 아래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친 혜담은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깨…… 깼어요?”

막 일어난 참이라 바람 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물었을 때 돌아온 것은 미세한 고개의 끄덕임이었다.

놀란 것도 잠시 지난밤 일이 떠오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가 어젯밤 그 남자인 것까지 안 혜담은 손으로 제 목덜미를 받치고 살짝 목을 움직이며 굳은 몸을 풀었다.

잠들었을 때보다 깼을 때가 더 잘생겼네.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그의 얼굴에서 가장 완벽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띤 눈동자였다. 속눈썹이 풍부하고 길며 짙은 쌍꺼풀이 있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는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저기. 오해하지 마시고요. 지난밤에 그쪽이 우리 집 앞에 있어 가지고, 옷은 비에 젖어서 제가 갈아입힌 거예요. 그 머리 옆에 요기 좀 다쳤는지 피가 났더라고요. 그래서 빨간약 발라 놨거든요? 그 상처도 제가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까 이따가 병원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또…….”

혜담은 어젯밤 일들을 급하게 늘어놓다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상대의 깊은 눈빛에 말끝을 흐렸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혹시 기억상실? 에이. 설마…….

“그쪽 이름이랑 나이가…….”

반응 없는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그의 신상에 관한 질문을 내놓았다.

“…….”

“……출신?”

“…….”

“아…… 한국어 모르시려나?”

단어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남자의 눈썹이 불편한 듯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것을 지켜본 혜담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다시금 쓸어내렸다.

“그쪽은?”

휴대전화를 찾아 번역기를 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들리는 한국어에 혜담은 얼른 대답했다.

“이혜담. 22세. 현재 대학교 다니고 여기는 제집이고, 가족은…….”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혜담은 말을 하다 말고 퍼뜩 입을 다물었다. 가족. 가족.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튀어나오며 왼쪽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쨌거나 제 소개를 끝낸 혜담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턱을 만지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 이야기했으니까, 그쪽도 말해 줘야죠.”

“내…….”

거참. 자기소개 한번 듣기 힘드네. 가슴에서 시작된 답답함인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에서 오는 갑갑함인지 모를 불편한 기분이 몸을 휘감자 혜담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남자가 이마를 가만히 짚고 있는 모습에 혜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네.”

어서 말해. 듣고 있어. 내……. 여기서 끝낼 게 아니라 쭉 말하라고. 지금 너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

“머리가 아픈데.”

남자에게 집중하느라 바짝 올라갔던 혜담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혹시 기억이 안 나는?”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아.”

불안함을 누르고 먼저 입을 꺼낸 혜담은 빠르게 돌아온 대답에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원래 배고프면 생각이 안 나. 그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듯 가만히 있는 남자의 모습에 혜담은 말을 돌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혼란스러운지 굳은 표정으로 있는 그에게 계속해서 파고들 듯 물을 순 없었다. 뭐 밥도 먹고 천천히 생각하면 하나둘 기억날 수도 있고.

말이 좋아 기억상실이지. TV 드라마 소재로도 식상한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리 없었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침실을 벗어나 냉장고부터 연 혜담은 난감한 표정으로 문이 열려 있는 자신의 방을 흘깃 쳐다보았다.

남자에겐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했지만, 정확히는 할머니 집이었다. 일찍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저를 키워 준 할머니와 살았던 집. 대학교 근처에 작은 전월셋방에서 살다 갑작스럽게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급히 내려온 것이다.

어제 삼일장을 끝내고, 할머님을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같이 모셔 놓고 왔다. 이젠 할머니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제가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마냥 넋 놓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기말고사도 쳐야 하고, 대기업 인턴 서류도 넣어야 했다. 할머니 말씀대로 살 사람은 살아야 했다.

혜담의 할머니는 슬픔에 빠져 허덕거리는 것보다 제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바랄 분이셨다.

혜담 역시 생각 없이 오느라 장을 보지 않았고 냉장고에 든 것이라고는 할머님이 드시던 밑반찬 몇 개와 옆집 할머니가 주신 과일 몇 알이 전부였다.

밥솥 액정 화면에 뜬 109H라는 숫자에 혜담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러곤 손에 잡히는 대로 과일을 꺼냈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과일로 대충 아침 때우면 되지. 낮에 이 사람 돌려보내면서 집 내놓으면 되고, 먹을 것을 조금 사 와야겠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과를 깎던 혜담은 “퍽.” 하는 소리에 파드득 놀라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그곳엔 밖으로 나오다 문틀에 머리를 박은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게…… 절대 낮은 문이 아닌데, 그쪽이 키가 좀. 많이 크셔서…….”

보통 집에서 쓰는 문의 높이가 얼마더라. 거기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소리라면 다친 상처 때문이 아니라 방금 문틀에 머리를 박은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깎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 손을 씻은 혜담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구급상자에 닿았다. 문틀에 이마 박았을 땐 어떤 처치를 하지? 구급상자를 뒤적이던 혜담의 손에 작은 연고가 들어왔다.

정확히 어떨 때 바르는 것인지 모를 연고의 유통기한이 1년 정도 지나긴 했지만,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바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은 혜담은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여전히 한 손으로 이마 위쪽을 감싼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연고를 들어 보였다. 이내 손을 치운 남자의 이마에서 상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불그스름하게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조심스럽게 검지 끝에 유통기한이 지난 연고를 묻혀 남자의 이마를 문지르던 혜담은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을 보내고 돌아온 날. 때마침 비가 내리고 집 앞에서 쓰러진 남자를 주웠는데 상대가 절세 미남에 하는 짓은 허당이라면? 거기다 기억까지 잃었다? 이건 시트콤이나 드라마로 써도 될 만한 소재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여자나 오메가가 아니라서 로맨스는 아닐 것 같긴 하다만. 어쨌거나 연고 바르는 걸 끝낸 혜담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렀다. 잘생긴 외모와 큰 체격이 현실성 없게 느껴지면서도 부주의하게 나오다 문틀에 머리를 박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다.

“괜찮아요?”

“아니, 전혀.”

보통은 괜찮냐고 물으면 안 괜찮더라도 괜찮다는 말이 돌아오지 않나?

“일단 배라도 좀 채우면서 이야기하죠. 집에 먹을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건 안 괜찮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예쁜 그릇도 아니고 오래 쓴 접시에 담긴 울퉁불퉁한 과일을 두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손에 비해 과하게 작아 보이는 포크로 사과를 찍어 들기에 혜담은 까 놓은 귤 한 알을 입에 집어넣었다.

[잘 먹으면 돼. 동물이고 사람이고 아프면 먹지를 않어. 뭔 일이 있든 먹어야 살어. 산 놈은 살아야지.]

제가 아프거나 집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아프면 할머니는 제일 먼저 먹을 것을 가져다주셨다. 하긴 정말 아프니 그리 좋아하던 고기도 안 넘어가긴 하더라. 어쨌거나 앞의 남자도 먹긴 먹으니 괜찮겠지, 뭐.

“이름 기억 안 나요?”

귤을 다 먹은 혜담은 곶감 한쪽 끝을 깨물며 말을 꺼냈다. 이 집을 정리하는 것도 정리하는 것이지만 이 남자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내가 왜 여기 있는지까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까 물어도 해 줄 말은 없어.”

“좀 전에도 말했지만, 어젯밤에 이 집 앞 담벼락에 정신 잃은 채 기대 있었어요. 시간도 늦고 비도 오고 해서 여기로 제가 데리고 온 거고.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었어요. 참, 손목시계는 풀어서 침대 옆에 있는 책상 위에 뒀구요. 파출소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파출소 가실래요?”

“파출소?”

“경찰서요. 여긴 작은 동네라 출장 파출소가 있거든요. 할 일이 있어서 읍내 나가야 하니까 그때 같이 가요.”

“……아닐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린 채, 뜸을 들이던 남자의 대답에 혜담은 뭔 헛소리냐고 되물을 뻔했다.

“머리도 머린데, 왼쪽 발목도 불편하네.”

“둘 다 제가 한 거 아닌데요. 처음부터 있던 상처라고요. 전 그냥 그쪽 집으로 데리고 오고 비에 옷도 젖어서 갈아입힌 게 전부라니까요. 거기다 다리는 아픈지도 몰랐는데!”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은 눈초리에 혜담을 얼른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제 말은 신빙성이 없는지 그의 눈꼬리가 가늘어지더니 자신을 천천히 훑어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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