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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죽겠다. 죽겠어.”
냉장고 앞에 철퍼덕 주저앉은 혜담은 손에 있는 생수병을 거침없이 열었다. 500mL 용량의 생수를 단번에 비우곤 소매에 입술을 문질러 닦은 혜담은 가쁜 숨을 돌리며 빈 생수병을 찌그러트렸다.
“이놈의 오지랖은…….”
가쁜 숨이 겨우 진정되고 나서야 혜담은 현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아직 살아 있긴 하지?
처음 발견했을 때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고, 부축해 옮기다 힘에 부친 제가 비틀거리면서 “몸에 힘 좀 줘 봐요.”라고 애원하면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 스스로 걸으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두툼한 가슴이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혜담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파출소에 연락하고 올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그러기엔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자신의 집이 있었고,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11월 늦은 밤에 내리는 진눈깨비가 섞인 비는 얼음장만큼 차게 느껴졌다.
경찰에게 인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긴 하다만 그 뒤로 이어질 귀찮은 일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제겐 그런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쉰 혜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그러뜨린 생수병을 개수대에 던져 넣었다.
비에 젖은 채 정신을 잃은 사람을 언제까지나 현관에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체격의 남자를 보며 작게 기합까지 넣은 혜담은 우선 그의 가죽 재킷부터 벗기기로 결심했다.
이보세요. 정신을 잃은 건 알겠지만 축축하게 젖은 옷들부터 벗어 봅시다. 정신을 차리시면 따뜻한 음료를 드리지요. 그다음 이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가죽 재킷의 지퍼를 내리고 양쪽 팔을 빼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의 등 아래 깔린 옷을 빼려던 혜담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몸에 딱 맞는 가죽 재킷은 비에 젖어 더 벗기기 어려웠다.
잠시 후, 깨어난 남자가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빗소리가 점차 굵어지기에 자기 전 집 주변을 둘러보려고 나왔다가 보게 된 남자. 집 앞 낮은 담장에 기대 있는 그를 모른 척하기엔 마지막 남은 조금의 양심이 혜담의 발길을 붙잡았다.
제가 외면하고 지나친 이 남자가 밤새 알아서 깨어나 돌아가지 못한다면 내일 아침엔 얼어 죽은 남자를 마주할 것이 뻔했다. 그 뒤로 일어날 일들은 더 끔찍하고 지독할 테지.
설렁설렁 둘러볼 생각으로 나온 혜담에겐 우산조차 없었다. 혜담 역시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정신을 잃은 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저기요.”라고 불러도 보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상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흔드는 그 행동에 푹 숙인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드러난 이마에서 흐르는 한줄기의 피를 보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어야만 했다.
젖은 바닥에 어설프게 앉은 채 남자의 가슴이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췄던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로등 빛에 드러난 얼굴을 본 혜담은 눈썹을 찌푸렸다. 외국인?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동양인과는 다른 느낌의 선이 굵은 얼굴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다 이 남자 참으로 거대했다. 길게 뻗어 있는 다리 길이나 넓은 어깨는 일반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체형은 아니었다.
거대한. 진짜 크다고 표현하기보다 거대하다고 표현해야 할 이 남자에 대해 추측을 하려던 혜담의 생각은 점차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들어찼다.
혹시 어둠의 사람이 아닐까? 거기다 이런 외모에 체격이라면 알파일 것 같다.
마피아? 갱단?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이런 오지 깡촌에 와?
그러니 더 의심스러웠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고, 혜담이 어릴 때까지만 해도 열 가구가 살았지만, 혜담의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지금 이곳에 사는 이는 혜담 제외 네 분뿐이었다.
2035년. 드론 택시를 타고 다니는 시대에 이곳만큼은 2020년도 초반에 멈춰 있었다. 할머니 댁에 올 때면 늘 시간을 거슬러 오는 것 같은 오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나마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 네 분의 할머니 역시 모두 연로하신지라 그분들마저 떠난다면 이 마을은 사라질 것이 뻔했다. 오가는 이라고는 배추밭에서 일하는 이들이 전부이고, 사건 사고라고 해 봤자 동네 개들 사이에서 강아지가 태어나는 일밖에 없는 마을에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 외국인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뺑소니? 그렇다고 하기엔 차 역시 거의 다니지 않는 동네다. 거기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사고라면 보통 머리가 아닌 다리를 다치지 않을까?
뭘 어떻게 하기 전에 상대의 신분을 확실하게 알아 둬야 할 것 같아 혜담은 연신 “죄송합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잖아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옷을 뒤졌다. 하지만 그는 휴대전화나 지갑, 그가 누군지를 알려 줄 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목걸이도 귀걸이도 하지 않은 남자가 착용하고 있는 것은 시계가 전부였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건장한 남자를 집에 들여도 될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자 혜담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모아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정확히는 끌고) 들어온 것이다.
집 현관 입구에 구겨지듯 쓰러져 있는 남자의 한쪽 어깨를 밀고 가죽 재킷은 당기고, 잠시의 실랑이 후 벗겨 낸 재킷을 옆으로 던져 버린 혜담은 남자의 니트가 거의 젖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킷 하나 벗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젖은 재킷을 대충 욕실 쪽을 향해 던졌다.
그나저나 도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나 크는 거야. 키는 최소 2m에 몸무게 100kg은 충분히 넘는다는 것에 자신의 남은 재산을 다 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양말을 벗겼다. 이제 뭘 더 하지? 초면에 바지까지 막 벗기긴 그렇지만 젖은 바지를 그냥 둘 순 없었기에 “죄송합니다. 저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바지 역시 벗겨 욕실 쪽으로 던졌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인 준석이 두고 간 빅사이즈 반바지를 찾아 입히고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굴려서 침대까지 이동시켰다.
“걍 바닥에서 재워?”
침대는 하나뿐이고, 상대는 아프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혜담 역시 선뜻 상대에게 침대를 내어 주겠지만 여기까지 굴려서 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끌어 올릴 생각까지 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냥 거기서 자요.”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 놔서 바닥 따뜻하잖아. 두툼한 이불을 덮어 주고 베개를 베어 주고 나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선이 짙은 얼굴의 외국인이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각진 턱과 높은 코,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까지 자기주장이 격하게 강한 얼굴은 잘생김 그 자체였다.
“모델인가. 아니면 영화배우?”
옷을 갈아입히면서 본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 있는 몸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끔 했다.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런 근육을 가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영화배우가 혼자 시골을 돌아다닐 리도 없고, 모델은 왜 여기를 와. 어쨌거나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머리를 작게 흔든 혜담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도 갈아입혔고, 젖은 머리를 살짝 넘기며 확인한 결과 그의 이마에서 흐른 피는 머리 옆을 어딘가에 부딪혀서 난 것 같았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 있으니 피도 그리 따라 그른 것 같고, 하지만 상처는 그리 깊어 보이지도 않고 그새 피도 멈춰 있었다.
이걸 어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인데. 혹시 뇌진탕이나 그런 것 아니야? 기억상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혜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에 가려면 응급실이 있는 큰 병원을 가야 할 텐데, 여기서 제일 가까운 읍내 병원이 차로 20분이었다. 응급실이 있는 병원까지는 최소 한 시간.
콜택시가 이 시간에 와 줄 리가 없으니 말 그대로 119나 112에 신고해서 관공서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 생각대로 또 복잡한 일에 얽히고 말 것이다.
신체 건강해 보이는데 뭐 별일 있겠어? 빨간약이라도 발라 놓고 깨어나면 자초지종을 확인하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귀찮니즘에서 시작된 자기합리화 과정을 끝낸 혜담은 네발로 기어가 서랍에 들어 있는 구급상자를 찾았다.
남자의 옆에 앉아 구급상자를 열고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어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는 빨간약을 발라 주었다.
추운 날씨에 체온이 떨어졌을 것 같아 다시금 목 끝까지 이불을 잘 덮어 준 후에야 혜담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을 검색하다 밖을 둘러보러 나갈 때가 11시였는데 현재 시각이 12시 20분이라니. 의식 없는 저 남자와 한 시간 넘게 실랑이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누적된 피곤함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혜담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비바람이 얼마나 불지 몰랐다. 낡은 시골집의 창틀이며 혹여 강풍에 날아다니며 피해를 입힐 만한 것이 없는지 찬찬히 확인하고 돌아온 혜담은 미동 없는 남자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열도 없고, 오한이 드는 것 같지도 않다. 편안한 표정까지 확인한 혜담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제가 오메가나 여자도 아니고 신체 건강한 20대 초반의 남자인데 제가 잠든 사이 상대가 일어난다고 해도 별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든 일을 내일로 미룬 혜담은 이불을 꼭꼭 여며 덮었다. 이내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일 아침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 그런데 혹시 외상이 아니라 내상을 입은 것이면 어떡하지?
그건 그렇고 이 커피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야. 그것도 진짜 맛있는 원두커피 내리는 냄새인데, 아아 말고 뜨아로 한잔 쭉 들이켜면 좋겠네.
할머니 집 정리도 해야…….
나른함과 몽롱함이 뒤섞인 무의식은 제멋대로 흘러갔지만, 머릿속의 조잘거림은 혜담이 잠드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연재] Double Shot(더블 샷)
지은이 하루후에
발행일 202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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